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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르페지오 Oct 02. 2023

어쩌다 보니 계획적인 은퇴

어쩌다 보니 계획적인 은퇴를 하고 대학 강단에 서게 되었다. 그래서 뒤늦게 캠퍼스 라이프를 만끽하고 있는 중이다.


대학생이었을 때 나는 캠퍼스를 즐기지 못했다. 통학 거리가 너무 멀어서 수업이 끝나면 집에 오느라 바빴기 때문에 다른 무엇을 할 여유가 없었다. 편도로 2시간이 걸리는 거리였는데도 불구하고 보수적안 부모님은 자취를 절대 허락하지 않았다. 왕복 4시간을 거리에서 허비해야 하니 항상 피곤에  있었고 시간에 쫓겼다. 피할 수 없는 저녁 약속이 있을 때 시계만 쳐다보다가 8시만 되면 일어서던 나의 별명은 신데렐라였다.


"나의 해방일지"라는 드라마를 보면서 세 남매의 퇴근 풍경이 나의 대학 시절너무 비슷해서 추억에 젖었다. 요즘 세상에도 저렇게 사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에 묘한 위안을 느끼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왜 그렇게 미련하게 살았을까 싶은데 당시 내게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렇게 대학 4년을 보냈으니 캠퍼스에 대한 추억이 있을 리가 만무했다. 어른들이 대학에 가면 하라던 것들,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미팅을 하고 연애를 하는 등등 그 모든 것들이 내겐 사치처럼 느껴졌다. 챗바퀴를 돌리는 다람쥐처럼 그저 학교와 집만 왔다 갔다 했다.


타고 난 모범생 기질 덕에 공부를 소홀히 할 수는 없었다.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신도시에 쳐 박혀 있었으니 따로 할 것도 없었다. 나중에 혹시 필요할지도 모른다며 교직 이수까지 했으니 공부는 열심히 한 것 같다. 제일 신나게 놀아야 할 나이자식들을 촌구석으로 끌고 온 부모님을 원망하며 꾸역꾸역 학교를 다녔지만 의도치 않게 장학금을 받고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을 했다.


졸업을 앞두고 생각해 보니 공부가 적성에 맞는 것 같았다. 달리 해 본 것도 없었고 여태까지 해 온 것이 공부이니 하던 대로 계속하면 될 것 같았다. 별다른 고민 없이 대학원에 진학했는데 어찌 된 것인지 대학원 생활은 공부와는 거리가 멀었다. 각종 학회 참석, 학과 조교 활동, 교수님 심부름 등 온갖 잡다한 일을 다하고 나서야 겨우 공부할 시간이 주어졌다. 공부를 더 하려고 대학원에  것인데, 이런 잡다한 일을 배우려고 온 것이 아닌데... 2년 내내 방황하며 지냈다. 


다행히 석사 2년은 금방 지나갔다. 그러나 석사 과정 1년 차에도, 2년 차에도 시간에 쫓기며 바삐 지냈다. 6년이나 같은 학교를 다녔는데도 캠퍼스를 온전히 즐기지 못한 채 캠퍼스와 헤어졌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직장을 다니면서 이상하게 모교가 그리웠다. 추억도 별로 없는데 대체 왜 그리운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그냥 그리움을 품고 살았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갈 수 있었지만 물리적인 거리보다 마음속 거리가 더 멀었던 것 같다. 내게 학교는 산을 넘고 물을 건너 두 시간이 걸려야 겨우 도착할 수 있었던 아주 먼 곳이었다.


세월이 흘러 이십 대의 소녀는 반백의 나이가 되었고 25년의 직장 생활을 마무리한 후 은퇴를 했다. 그리고 어쩌다 보니 모교에서 강의를 하게 되었다.


오랜만에 다시 만난 모교는 너무나 아름다웠다. 학교가 이렇게 예쁘다는 것도 모르고 6년이라는 세월을 보냈다니 아쉽기 짝이 없었지만 괜찮았다. 지금이라도 즐기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요즘 강의를 하러 갈 때마다 학교 곳곳을 탐방하는 중이다. 추억 어린 식당을 찾아서 밥을 먹기도 하고 예쁜 카페를 찾아서  한잔의 여유를 즐기도 한다. 오며 가며 눈여겨보았던 팸플릿을 보고 학교에서 하는 공연이나 전시회도 보러 다닌다. 축제 기간에는 젊은이들 사이를 어슬렁거리며 축제 분위기를 한껏 느끼고 왔다.


이전에 미처 몰랐던 대학 생활의 즐거움을 만끽하면서 친구들에게 사진을 보내줬더니 친구들이 이렇게 말했다. 30년 넘게 지켜봤는데 네가 무언가를 이렇게 좋아하는 것을 처음 보았다고.


생각해 보니 그런 것 다. 딱히 좋아하는 도 없고, 취미도 없고, 무색무취의 재미없는 사람이었던 내가 요즘은 신이 나서 학교를 헤매고 다닌다. 학생들도 이 좋은 것들을 누렸으면 하는 생각에 자꾸 애먼 소리를 한다. "지금 너희가 가장 이쁠 때이고 빛날 때이니 너무 공부만 하지 말고 캠퍼스 라이프도 즐기라고."

여느 때보다 치열한 경쟁 속에 살고 있는 아이들에게는 별로 먹히지 않는 것 같지만 안타까운 마음에 같은 말을 하고 또 한다.


25년 동안 직장 생활을 열심히 했고 상무 타이틀까지 달고 은퇴했으니 직장 생활은 할 만큼 한 것 같다. 더 이상 할 수 있는 것도 없고, 갈 수 있는 곳도 없다는 무력감에 은퇴를 했는데 어쩌다 보니 모교에서 강의를 하게 되었다.


가장 가까이에서 나의 은퇴와 재취업 과정을 지켜본 남편은 나를 부러워한다. 은퇴한 후에 나처럼 지낼 수만 있다면 본인도 자신 있게 그만둘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한다. 친구들도 비슷한 이야기를 한다.

남편과 친구들 이야기를 듣고 보니 아무 계획도 없었던 내 은퇴가 꽤 계획적이었던 것처럼 보인다.


학생들 입장에서 생각해 봐도 IT 업계 25년 경력자의 강의를 듣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 콘퍼런스에서 프레젠테이션 하던 버릇을 못 버리고 밋밋한 파워포인트에 다양한 멀티미디어를 추가해서 강의 교안을 만들고 강의 중간중간에 IT 기업에 대한 이야기도 해주고, 최신 AI 기술 동향도 소개해주니 학생들도 좋아하는 눈치이다.


계획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어쩌다 보니 완벽한 은퇴가 되었다.


오십 년 동안 일분일초를 쪼개가며 치열하게 살았다. 그런데 어찌 된 건지 인생은 뜻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아무리 노력을 해도, 아무리 철저하게 계획을 해도 항상 내 예상과 다른 일이 벌어졌고 세상은 나를 무너뜨리곤 했다.


그런데 아무 생각 없이 했던 은퇴 후,  인생은 마치 치밀하게 계획한 것처럼 흘러가고 있다. 이십오 년 동안 죽어라 일만 하다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쉬기에는 조금 이른 나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이 때문에 은퇴를 망설이기도 했다. 일주일에 두세 번 정도 할 수 있는 일을 소망했는데 딱 맞는 일을 하게 되었다.

  

물론 알고 있다. 시간 강사라는 직업한순간에 사라질 수 있는 불안한 계약직이라는 것을.  

그러나 지금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나를 불러주는 곳이 있다는 것에 감사하며 이 순간을 즐기려고 한다.


"죽은 시인의 사회"라는 영화를 본 이후 "Carpe Diem"이라는 문장을 사랑하게 되었다. 아마도 내가 가장 못하는 것을 콕 집어낸 명언이라 마음에 와닿았던 것 같다. 가장 감명 깊게 본 책이 "그리스인 조르바"인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평생 잘 못했던 것이지만 이제는 한번 실천해보려 한다.


Carpe Di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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