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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르페지오 Sep 22. 2023

너무 열심히 일했던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2년 전쯤 퇴사를 앞두고 너무 열심히 일한 것이 문제였다는 글을 쓴 적이 있다.

은퇴를 하고 나의 삶을 돌아보면서  글을 쓴 것을 후회하게 되었다.


나는 눈앞에 일이 있으면 바로바로 해치워야 하는 성격이다. 해야 할 일이 있으면  일이니 내 일이니 따지기보다 그냥 내가 하는 것이 속이 편하다. 

  

아마 이러한 성격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형성되었을 것이다.


유독 나를 예뻐하셨던 할머니는 오전 6시면 곤히 잠든 손녀를 깨워서 새벽 운동을 데리고 다니셨다. 다섯 살부터 오전 6시에 일어나는 습관을 가지게 된 아이는 어른이 되어 시간이 부족해지오전 4시에 기상하는 사람이 되었다.  


막내며느리였던 엄마는 늙고 병든 시아버지와 시어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성심껏 돌보셨고 시댁의 제사를 도맡았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자란 딸은 수험생일 때도 엄마를 도와 제사상을 차렸다.


대학원 시절, 연구실에서 누군가 해야 하는 궂은일이 있으면 시키기도 전에 알아서 했다. 출근하면 환기를 하고 커피를 내렸고 우편물도 정리해서 교수님 책상에, 선배님들 책상에 올려놓았다. 선배들이 논문 교정이 필요하거나 시물레이션을 돌려야 할 때면 나서서 도왔다. 커피는 어차피 나도 마셔야 하니 내렸고 석사 과정 동안 하나라도 더 배우는 것이 내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지내다 보니 언제부터인지 교수님과 선배들은 항상 나만 찾 시작했다. 동기들은 논문에 필요한 연구만 하고 퇴근 시간이 되면 휘리릭 사라지는데 논문을 쓰면서 잡다한 일까지 처리하느라 집에 가지 못했던 수없이 많은 날들이 기억난다.


회사를 다니면서도 누군가 해야 하는데 업무 영역이 불분명한 부분이 있으면 따지지 않고 그냥 했다. 니 일인지 내 일인지 따지는 시간에 일을 먼저 해치워버리고 전체 프로젝트를 진행시키는 편이 속이 편했다. 그렇게 살다 보니 업무 영역이 애매한 작업들은 전부 내게 떨어졌다. 회사라고 모든 업무 영역이 칼 같이 구분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보니 계속 이런 상황이 벌어졌다.

뭐 어쩔 수 없었다. 눈앞에 일이 벌어져 있는 것을 참지 못하니 성격 급한 내가 처리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살다 보니 평생 일복이 많다는 말을 듣고 살았다. 생각해 보면 나의 일복은 내 성격이, 그리고 내 행동이 만든 것이었다.


회사 생활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사람들에 치여서 너무 힘들고 지쳤을 때, 너무 열심히 일한 것이 문제라고 생각했다. 남의 일까지 척척 해주고 말하지 않은 부분까지 알아서 처리해 주니 사람들은 점점 더 내게 더 많은 것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몸도 지치고 마음도 지쳐서 나를 좀 배려해 달라고 했더니 모두 나를 외면했다.

사람들에게 상처를 받아서 너덜너덜해진 후에 너무 열심히 일한 것이 문제였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은퇴를 하고 나서 몇 년의 시간이 지나고 난 후 생각이 달라졌다.


지독하게 긴 여름을 견딘 나무에 풍성한 열매가 맺힌 것처럼 열심히 보낸 시간에 대해서는 반드시 보답이 돌아온다는 것을 게 되었기 때문이다.


대학원 시절, 누구보다 솔선수범했고 열심히 살았던 내 모습을 기억하는 선배는 모교에서 강의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강사와는 아무 연결고리가 없는 내게 뜬금없이 전화를 서 "너라면 믿고 맡길 수 있을 것 같아"라고 하던 선배의 말은 내게 큰 울림이 되었다. 1~2년에 한 번 만날까 말까 했던 선배가 수많은 졸업생 중에 나를 떠올린 이유는 누구보다 먼저 아침을 열던 내 모습을 기억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했다.


20년 동안 근속했던 회사에서도 연락이 왔다. 파트타임 업무 의뢰였는데 보수도 괜찮고 쉽게 할 수 있는 일이라 흔쾌히 수락했다. 파트타임일지라도 은퇴한 직원에게 의뢰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고마웠다. 그들은 하나같이 내게 큰 도움을 받았기에 제일 먼저 내 얼굴이 떠올랐다고 했다.

친구들이 우스개 소리로 무슨 덕을 쌓았길래 은퇴하고도 회사 일을 받아서 하냐고 놀리는데 덕까지는 아니더라도 열심히 살았던 것이 도움이 된 것 같다.


그래서 2년 전에 올렸던 나의 글을 수정하려고 한다.

너무 열심히 일했던 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다만 내 몸과 마음이 허용하지 않는 선까지, 지나치게 나를 혹사시켰던 것이 문제였던 것이었다.

애매한 일이라 남들이 손을 안 대는 일들을 솔선수범해서 했고, 시키지도 않았는데 궂은일을 도맡아 했던 나의 오지랖이 인생 2막을 시작할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래서 나는 계속 생긴 대로 려고 한다. 애써 나를 뜯어고치려 하지 고 오십 년 동안 살았던 그대로 그저 열심히 살아가려고 한다.


예전에 썼던 글을 곱씹어 보면서 그냥 마음에만 품고 있으려다가 수줍게 고백한다.

이제 나는 너무 열심히 일했던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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