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년 동안 쉼 없이 일했지만 제대로 보상을 받지 못했다. 의욕 상실과 권태, 누적되었던 몸과 마음의 피로, 쓰레기 같은 사람들과의 갈등, 덜컥 도입된 재택근무가 주는 스트레스, 이 모든 것들이 나를 서서히 갉아먹고 있었다.
스트레스가 너무 심하니 자꾸만 사람들과 부딪쳤다. 너무 힘들어서 같은 회사에서 일하고 있는 친구에게 조언을 구했다. 친구는 여러 가지 조언을 해줬는데 그중에서 가장 기억이 남는 말이 "너무 열심히 일하지 마라."였다.
많은 것을 내려놓았다고 생각했는데 내 친구가 보기에 나는 아직도 너무 열심히 일하고 있다고 했다. 혼자서만 열심히 일하니 빈둥거리는 사람들을 지적하고 그들과 쓸데없는 감정 소모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친구의 말은 듣고 망치로 머리를 맞은 것 같았다.
나는 회사 생활에서 명백한 패배를 맞보았다. 25년 동안 열심히 일했지만 원하는 자리에 오르지 못했다. 나의 실패가 남녀 차별 때문인지, 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운이 없었기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경력 20년 차가 넘은 즈음부터 진급을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십오 년 넘게 근속한 회사는 내게 기회를 주지 않았다. 이직을 시도해 보았지만 한 회사를 오래 다녔다는 것이 핸디캡이 되어 나의 발목을 잡었다. 수많은 시도 끝에 더 이상 할 수 있는 것이 없음을 깨닫게 되었고 입사 20주년 기념일에 은퇴하기로 결정했다.
25년의 회사 생활동안 남녀 차별의 피해도 보았다. 내가 다닌 회사는 한국 대기업과 글로벌 기업 두 곳인데 아이러니하게도 글로벌 기업에서 남녀 차별이 더 심했다. 남자 직원들보다 열심히 일했다고 자부하건만 여자는 팀장이 될 수 없다며 지원 자체를 거부했던 지사장도 있었다. 승진을 요구하자 왜 욕심이 그렇게 많냐고,살림이나 하지 왜 밖에 나와서 남자들 자리를 넘보냐고 대놓고 말하는 상사도 있었다. 세상이 많이 바뀌고 좋아졌지만 한국 노동법의 지배도 받지 않고 본사의 정책도 따르지 않는 글로벌 기업의 한국 지사는 인권의 사각지대였다.
조직 개편이 있을 때마다 능력도 없는 남자들은 진급해서 팀장으로 진급하는데 내겐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몇 년 동안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시도를 해 보았고 뼈아픈 실패를 맛보았다. 할 수 없이 은퇴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래서 은퇴하는 그날까지 너무 열심히 일하지 않으려고 한다.
너무 열심히 일하니 입으로만 일하는 인간들이 싫고 그들을 지적하는 것이다. 내일부터는 쓸데없는 애사심을 버리고 남의 일에 신경 쓰지 않으면서 평화롭게 살겠다.
너무 열심히 일하니 남의 업적을 가로채서 자신의 공으로 포장하는 인간들과 싸우게 되는 것이다. 하이에나 같은 인간들이 내가 한 일을 가로채서 자신이 한 것처럼
포장하더라도상관하지 않겠다.
타고 난 성실함 때문에 불성실하고 무책임한 인간들을 혐오했다. 어떻게 저따위로 일하면서 월급을 받을 수 있는지, 부끄럽지도 않은지, 대체 회사는 저런 인간들에 대해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런 부류들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지적을해대니 적이 생겼다.
25년이 지나고 나서야 보이는 것 같다.
나는 쓸데없이 너무 열심히 일해서 패배한 것이다. 회사에서는 적당히 일하고 적당히 비위를 맞추는 사람이 필요한데 나는 쓸데없이 너무 열심히 일만 했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