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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르페지오 Feb 14. 2021

너무 열심히 일한 것이 문제였다

돌이켜보면 나의 직장생활은 여러 가지 문제가 뒤섞여 있는 총체적 문제 덩어리였다.


25년 동안 쉼 없이 일했지만 제대로 보상을 받지 못해서 쌓인 의욕 상실과 권태, 자신을 돌보지 못해 누적되었던 몸과 마음의 피로, 쓰레기 같은 사람들과의 갈등, 덜컥 도입된 재택근무가 주는 스트레스...


스트레스가 너무 심하니 자꾸만 사람들과 부딪쳐서 친구에게 조언을 구했다. 친구가 여러 가지 조언을 해줬는데 그중에서 가장 기억이 남는 말이 "너무 열심히 일하지 마라."였다.


많은 것을 내려놓았다고 생각했는데 친구가 보기에 나는 아직도 너무 열심히 일하고 있다고 했다. 너무 열심히 일하니 빈둥거리는 사람들을 지적하고 괜스레 그들과 쓸데없는 감정 소모를 하는 을 반복하고 있다고 했다.


친구의 말을 듣고 망치로 머리를 맞은 것 같았다.


나는 회사 생활에서 명백한 패배를 맞보았다. 25년 동안 열심히 일했다고 자부하지만 원하는 자리에 오르지 못했다. 나의 실패가 남녀 차별 때문인지, 아니면 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운이 없었기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다.


경력 20년 차가 넘은 즈음부터 진급을 하기 위해 무단히 노력했다. 그러나 십오 년 넘게 근속한 회사는 내게 기회를 주지 않았다. 이직을 시도해 보았지만 한 회사를 오래 다녔다는 것이 핸디캡이 되어 발목을 잡었다. 수많은 시도 끝에 더 이상 할 수 있는 것이 없음을 깨닫게 되었고 입사 20주년 기념일에 은퇴하기로 결정하였다.


25년의 회사 생활동안 남녀 차별의 피해도 보았다. 내가 다닌 회사는 한국 대기업과 글로벌 기업 두 곳인데 아이러니하게도 글로벌 기업에서 남녀 차별을  경험했다. 남자 직원들보다 열심히 일했다고 자부하건만 여자는 매니저가 될 수 없다며 팀장 지원 자체를 거부했던 지사장도 있었고 승진을 요구하자 왜 욕심이 그렇게 많냐고, 살림이나 하지 왜 밖에 나와서 남자들 자리를 넘보냐고 대놓고 하는 상사도 있었다. 세상이 많이 바뀌고 좋아졌다지만 한국 노동법의 지배도 받지 않고 본사의 정책도 따르지 않는 한국 지사는 인권의 사각지대였다.

조직 개편이 있을 때마다 능력도 없는 인간들이 진급해서 팀장으로 진급하는데 아무리 노력을 해도 내겐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최근 몇 년 동안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시도를 해 보았고 뼈아픈 실패를 맛본 후 은퇴를 결정했다.


그래서 은퇴하는 그날까지 너무 열심히 일하지 않으려고 한다.


너무 열심히 일하니 입으로만 일하는 인간들이 싫고 그들을 지적하는 것이다. 내일부터는 쓸데없는 애사심을 버리고 남의 일에 신경 쓰지 않으면서 평화롭게 겠다.


너무 열심히 일하니 남의 업적을 가로채서 자신의 공으로 포장하는 인간들과 싸우게 되는 것이다. 하이에나 같은 인간들이 내가 한 일을 가로채서 자신이  것처럼

 포장하더라도 이젠 그들과 싸우지 않겠다.


타고 난 성실함 때문에 불성실하고 무책임한 인간들을 혐오했다. 어떻게 저렇게 일하면서 월급을 받을 수 있는지, 세상에 부끄럽지도 않은지, 대체 회사는 저런 인간들에 대해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런 부류들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지적하니 많은 사람들과 적이 되었다. 내일부터는 주인 의식을 버리고 더 이상 적을 만들지 않으려고 한다.


25년이 지나고 나서야 보이는 것 같다.

나는 쓸데없이 너무 열심히 일해서 패배한 것이다.


빨리 가을이 왔으면 좋겠다.

가을이 올 때까지 너무 열심히 일하지 말고

더 이상 적을 만들지 않고

조용히 은퇴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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