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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르페지오 Dec 15. 2021

퇴사 후 정신없는 한 주

20년 다니던 회사를 퇴사했고 총 25년의 직장생활에 종지부를 찍었다.

 

철저하게 준비를 했다고 생각했는데도 20년 만의 퇴사는 쉽지 않았다. 예상치 못했던 감정의 무너짐에 일상생활이 어려웠다. 이 복잡한 감정이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집에서는 도저히 견딜 수 없을 것 같아서 무작정 제주도에 왔다. 일상의 장소를 옮기는 것만으로도 퇴사의 충격을 덜어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제주도에 여행을 온 것은 거의 20년 만이었다.

주변에서 제주도를 여행지로 많이 추천했는데도 중국인 관광객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는 뉴스를 본 후부터 왠지 발걸음이 가지 않았다.

그런데 이십 년 만에 다시 찾은 제주도는 정말 달라져있었다. 아니 겨울에 제주도에 와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제주도의 겨울은 가벼운 옷차림으로 돌아다닐 수 있을 정도로 따뜻했고 야자수 나무와 활짝 핀 꽃들이 이국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멀리 어딘가로 날아온 것 같은 기분에 감정의 무게와 현실의 고민이 날아가버렸다.


힘들었던 퇴사 과정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여행자의 기분이 되어 풍경을 즐겼다. 퇴사 기념 여행지로 이곳을 선택하길 잘했다 싶었다.


오랜만에 즐겁고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던 차에 갑작스러운 부고를 받았다. 前 부사장님의 부고였다. 다른 회사의 APAC VP(Asia Pacific Vice President)로 가셔서 승승장구하고 계시다고 들었는데 부고라니 믿을 수가 없었다. 잘못된 것이 아닌가 하고 몇 번이나 다시 보았다. 정신을 차린 후 지인에게 물어보니 쇼크사로 갑자기 돌아가셨다고 했다. 여행을 잠시 멈추고 추모하는 마음속으로 조용히 지냈다. 예순도 안 된 나이에 황망하게 떠난 그분과 남겨진 그분의 가족들이 안타까웠다.


애써 마음을 가다듬고 여행을 다시 시작하려던 차에 지사장님의 퇴임 소식이 들려왔다. 며칠 전 퇴사하는 나를 따뜻하게 위로해주시던 분이 며칠 만에 퇴사하신다니 망치로 머리를 맞은 것 같았다.

연달아 날아오는 충격적인 소식으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은퇴한 나를 위로해주신다며 제주도에서 돌아오면  한 잔 하자고 하셨는데 나에게 위로를 건넬 때 이미 퇴임이 예정되어 있었던 걸까.


이런 와중에 후배가 큰 회사의 임원으로 승진했다는 연락이 왔다. 축하 인사로 동문회 카톡 방이 정신없이 울리는데 선뜻 동참할 수가 없었다.


오십 대 지인의 부고와 소식으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데 사십 중반의 후배는 국내 굴지 기업의 임원으로 승진하였다고 하니 어디에 장단을 맞춰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슬퍼해야 할지 기빠해야 할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한참 동안 어정쩡한 감정의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정말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세상이라지만 너무하다 싶었다. 답답한 마음에 가깝게 지내던 동료에게 문자를 보냈더니 안타까운 일이지만 서울에서 일어난 일은 신경 쓰지 말고 제주도에서의 지금 이 순간을 즐기라고 했다.


그녀의 말을 듣고 나서야 제주도 풍경이 다시 눈에 들어왔다.

충격적인 소식들이 연달아 와서 내가 제주도에 있다는 것을 잠시 잊고 있었다.






나는 나의 직업을 사랑하지만 은퇴를 했다.

여행을 왔는데 시간에 쫓기지 않고 내가 있고 싶은 만큼 여행지에 있어도 된다는 것이 아직 실감 나지 않는다.

이렇게 하나씩 은퇴 생활에 적응해나가는 중이다.


고인의 명복을 빌고

지사장님의 퇴임은 안타까워하고

후배의 승진은 축하하며

나는 나의 시간에 집중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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