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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르페지오 Oct 02. 2021

퇴사하고 싶지만 사표는 내지 싶지 않아

오래전부터 결심했던 대로 입사 20주년 기념일에 매니저에게 퇴사를 고했다.

예상과 다르게 매니저는 놀라지도 않았고 붙잡지도 않았다. 번아웃이 온 것 같으니 쉬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고 말했다. 바로 인사부와 미팅이 잡혔고 퇴사 절차를 문의했다. 인사 담당자는 퇴사일 2주 전에 공식절차를 밟으면 되고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으니 천천히 진행하자고 했다.


퇴사하겠다고 말하면 속이 후련할 줄 알았은데 후련하지만은 않았다. 20년을 몸담았던 직장이고 총 25년의 직장 경력을 끝내는 결심이었다. 오십이 가까운 나이에도 어딘가 취업이 되면 좋겠지만 나는 이미 몇 번의 고배를 마셨고 더 이상 도전할 용기와 베짱이 남아있지 않았다. 25년 동안 매일 어딘가로 출근을 했었는데 갑자기 갈 곳이 없어지면 어떨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퇴사를 고했던 날이 금요일 오후라서 주말 내내 생각을 좀 더 해 볼 수 있었다. 다른 회사로 이직하는 것이 아니기에 퇴사 희망일을 정하지는 않았고 매니저가 분기 마감 때까지는 일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런데 매니저가 말한 퇴사 날짜에 맞추려면 앞으로 두 달 반이나 더 근무를 해야 했다.

주말에 차분히 생각해 보니 두 달 반이나 근무를 해야 한다면 몇 주만 더 연장해서 연말까지 근무를 하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월요일 아침에 매니저에게 애초 생각했던 것보다 퇴사일이 늦게 잡혔으니 조금만 더 배려해 주어서 연말까지 근무하는 것으로 해줄 수 없겠냐고 이메일을 썼다. 연말까지 근무하면 성과급 1년 치를 다 받을 수 있고 하반기에 매입한 자사주도 받을 수 있으니 최근 몇 년 동안 성과급을 제대로 받지 못한 내게 조금이나마 위로가 될 것 같다고 덧붙였다.

겨우 3주를 연장하는 것이고 후임자를 빨리 구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니 조정이 가능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안된다는 회신이 왔다. 아무 설명도 없이 건조한 어투로 퇴사일 조정은 어렵다고 적혀 있었다.

 

금요일 오후에 퇴사를 이야기했고 월요일 오전에 구두로 정한 퇴사일을 조정해 달라고 했는데 진행되는 사항이 있어서 어렵다는 말은 수긍이 가지 않았다. 끝까지 아름답지 못한 이별이라 싶었다. 돈 몇 푼을 생각하면 나도 같이 억지를 부리면서 인사부에 퇴사일 조정을 해달라고 요청하면 될 것이다. 그러나 소심한 성격에 그러지도 못한 채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매니저로부터 다른 이메일이 왔다. 퇴사일을 명시한 사직서를 작성해서 서 인사부에게 보내라고 했다.


퇴사일 조정이 거절되어 받은 상처가 아물지 않은 상태라 괜히 부아가 났다. 퇴사를 통보하고도 두 달 반이나 더 근무를 하라고 했고 인사부에서도 공식적인 절차는 두 달 후에 처리하자고 했는데 왜 이리 서두르는 건지 짜증이 치밀었다. 겨우 마음을 추스르고 매니저가 요청한 퇴사 이메일을 작성했지만 전송 버튼을 누르기가 싫었다. 20년 근속한 직원에게 겨우 3주 더 근무하도록 조정해 주는 것이 그토록 어려운 일인가 하는 서운함에 결국 이메일 전송 버튼을 누르지 않았다.


내 의지를 관철하기 위해 매니저와 싸워볼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결국 그러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안다. 예민하고 소심한 성격 때문에 화를 내고 나면 내가 더 힘들고, 싸우고 나도 내가 더 힘들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마지막까지도 이렇게 손해 보고 가야 하는 것이 직장인가 보다. 퇴사 면담을 할 때 정신을 차리고 날짜를 잘 협의했어야 했는데 바보 같은 나 자신을 탓해본다.


날을 곤두세우지 않으면 짓밟히고 당하는 회사라는 정글에서 그동안 어떻게 버텼는지 모르겠다.




결국 퇴사일을 내가 원하는 대로 조정하지 못한 채 매니저가 원하는 날짜를 적어서 사표를 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런 인간을 더 이상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 매니저가 사표를 내라고 매주 채근했지만 달 넘게 버티다가 정확히 퇴사일 한 달 전에 사표를 냈다. 나만의 소심한 복수였는데 효과가 있었을지는 모르겠다.

당초 계획은 입사 20주년 기념일이던 9월 중순에 퇴사하는 것이었는데 어찌하다 보니 12월 첫째 주에 퇴사하게 되었다. 한 달 정도 남은 기간 동안에는 고마운 분들께 퇴사 소식을 전하고 감사 인사를 하려고 한다. 이제 정말 끝이 보인다.  



나의 후임은 내가 퇴사한 지 5개월이 넘은 후에 겨우 뽑았다고 한다. 당장 데려올 사람도 없으면서 겨우 3주 퇴사일 조정을 안 해줬던 인간이 나의 마지막 직장 상사였다는 것이 서글프다.  


나의 후임으로 뽑은 사람이 2년을 못 버티고 퇴사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수십 개의 제품을 다루어야 하는 데다 기존에 하던 일과 많이 달라서 적응하지 못했다고 한다. 소식을 듣고 나니 싱숭생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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