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 후 나를 비루하게 만들었던 것들을 비워내는 중이다.
출근 준비를 하면서 헤어지고 낡은 속옷을 입을 때마다 비루한 기분이 들었지만 속옷을 사러 갈 여유가 없었다.
맞벌이하는 엄마라서 아이에게 신경 쓰지 못한다는 낙인이 찍힐까 봐 아이의 겉옷과 양말, 속옷은 항상 새것을 준비해 놓았는데 정작 나에겐 신경을 쓰지 못했다. 겉옷도 사러 갈 시간이 없으니 속옷까지 신경 쓸 여유가 없어서 낡고 닳은 속옷을 입고 또 입었다. 낡은 속옷을 입을 때마다 오늘은 꼭 사겠다고 다짐하곤 했지만 정신없는 하루 일과가 시작되면 까맣게 잊어버리곤 했다.
은퇴 후 제일 먼저 속옷을 샀다. 보이지 않는 것까지 신경 쓸 수 있는 여유가 생긴 것에 감사하면서 매일 보송보송한 속옷을 입는다.
쇼핑을 좋아하지 않는 데다 이상하게 까다로운 구석이 있어서 마음에 드는 옷을 찾기 어려운 편이다. 직장을 다니면서 아이도 키우느라 쇼핑할 시간이 없으니 십 년도 넘은 옷들을 입고 다녔다. 어느 날, 직원 한 명이 상무님은 왜 그런 옷을 입고 다니냐고 물었을 때 화들짝 놀랐다. 꾸미지는 못했지만 나름 단정한 옷차림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모욕적인 말을 들을 정도로 내 차림이 엉망이었나 보다.
온라인으로 급하게 브랜드 옷을 몇 벌 샀지만 까다로운 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유행이 한참 지난 낡은 옷은 더 이상 입을 수가 없으니 브랜드 옷을 입고 다녔다. 그 후론 옷차림에 대한 모욕적인 언사는 듣지 않았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 옷을 입을 때마다 비참한 기분이 들었다. 몸에 맞지도 않는 갑옷을 입은 것 같았고 옷이 나를 조이는 것 같았다.
은퇴하자마자 나를 비참하게 만들던 비싼 옷들을 버렸다. 이제 내 몸에 맞지도 않는 정장에 몸을 구겨 넣을 필요가 없으니 몸도 마음도 한결 가벼워졌다.
화장대 한편을 채우고 있던 유통기한이 지나버린 고가의 화장품들도 비워냈다. 회사 생활이 너무 힘들고 고될 때 나를 위로한답시고 평소에 쳐다보지도 못하던 명품 화장품을 몇 개 샀다. 그런데 막상 사놓고는 거의 쓰지 못했다. 한번 덜어낼 때마다 후덜덜한 가격이 생각나서 선뜻 손이 가지 않았다.
은퇴 후 화장대를 정리하다가 쓰지도 못하고 유통기한이 지나버린 명품 화장품을 발견했다. 아껴서 쓴다고 구석에 놓았다가 잊어버린 건지, 비싼 화장품이 내 피부엔 맞지 않았던 건지 모르겠지만 그 화장품을 볼 때마다 힘들었던 내 모습이 기억나서 속이 아렸다. 어차피 유통기한도 지났으니 미련 없이 비워내었다.
나를 비루하게 만들던 것들을 비워내고 나니 마음도 가벼워졌다. 은퇴를 결심하게 된 가장 큰 이유가 사람이었고 죽도록 미운 이들이 몇 명 있었는데 그들에 대한 미움도 희미해져서 마음도 가뿐해졌다.
이제 내 옷장과 화장대, 그리고 내 마음은 내게 필요한 것들,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만 채워져 있다. 내가 좋아하는 로션 향을 맡으며 아침을 열고 내 몸에 편안하게 맞는 옷을 입고 하루 일과를 시작하는 요즘 비로소 나 자신을 찾은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