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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르페지오 Jun 27. 2023

비워내는 시간

은퇴 후 나를 비루하게 만들었던 것들을 비워내는 중이다.


출근 준비를 하면서 헤어지고 낡은 속옷을 입을 때마다 비루한 기분이 들었지만 속옷을 사러 갈 여유가 없었다.

맞벌이하는 엄마라서 아이에게 신경 쓰지 못한다는 낙인이 찍힐까 봐 아이의 겉옷과 양말, 속옷은 항상 새것을 준비해 았는데 정작 나에겐 신경을 쓰지 못했다. 겉옷도 사러 갈 시간이 없으니 속옷까지 신경 쓸 여유가 없어서 낡고 닳은 속옷을 입고 또 입었다. 낡은 속옷을 입을 때마다 오늘은 꼭 사겠다고 다짐하곤 했지만 정신없는 하루 일과가 시작되면 까맣게 잊어버리곤 했다. 

은퇴 후 제일 먼저 속옷을 다. 보이지 않는 것까지 신경 쓸 수 있는 여유가 생긴 것에 감사하면서 매일 보송보송한 속옷을 입는다.


쇼핑을 좋아하지 않는 데다 이상하게 까다로운 구석이 있어서 마음에 드는 옷을 찾기 어려운 편이다. 직장을 다니면서 아이도 키우느라 쇼핑할 시간이 없으니 년도 옷들입고 다녔다. 어느 날, 직원 한 명이 상무님은 왜 그런 옷을 입고 다니냐고 물었을 때 화들짝 놀랐다. 미지는 못했지만 나름 단정한 옷차림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모욕적인 말을 들을 정도로 내 차림이 엉망이었나 보다.

온라인으로 급하게 브랜드 옷을 몇 벌 샀지만 까다로운 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유행이 한참 지난 낡은 옷은 더 이상 입을 수가 없으니 브랜드 옷을 입고 다녔다. 그 후론 옷차림에 대한 모욕적인 언사는 듣지 않았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 옷을 입을 때마다 비참한 기분이 들었다. 몸에 맞지도 않는 갑옷을 입은  같았고 옷이 나를 조이는 것 같았다.

은퇴하자마자 나를 비참하게 만들던 비싼 옷들을 버렸다. 이제 내 몸에 맞지도 않는 정장에 몸을 구겨 넣을 필요가 없으니 몸도 마음도 한결 가벼워졌다. 


화장대 한편을 채우고 있던 유통기한이 지나버린 고가의 화장품들도 비워냈다. 회사 생활이 너무 힘들고 고될  나를 위로한답시고 평소에 쳐다보지도 못하던 명품 화장품을 몇 개 샀다. 그런데 막상 사놓고는 거의 쓰지 못했다. 한번 덜어낼 때마다 후덜덜한 가격이 생각나서 선뜻 손이 가지 않았다.

은퇴 후 화장대를 정리하다가 쓰지도 못하고 유통기한이 지나버린 명품 화장품을 발견했다. 아껴서 쓴다고 구석에 놓았다가 잊어버린 건지, 비싼 화장품이  피부엔 맞지 않았던 지 모르겠지만 그 화장품을 볼 때마다 힘들었던 내 모습이 기억나서 속이 아렸다. 어차피 유통기한도 지났으니 미련 없이 비워내었다.


나를 비루하게 만들던 것들을 비워내고 나니 마음도 가벼워졌다. 은퇴를 결심하게 된 가장 큰 이유가 사람이었고 도록 미운 들이   있었는데 그들에 대한 미움도 희미해져서 마음도 가뿐해졌다.


이제 내 옷장과 화장대, 그리고 내 마음은 내게 필요한 것들,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만 채워져 있다. 내가 좋아하는 로션 향을 맡으며 아침을 열고 내 몸에 편안하게 맞는 옷을 입고 하루 일과를 시작하는 요즘 비로소 나 자신을 찾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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