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의 아니게 다음 학기에 강의를 쉬게 되었다. 학교에서 새로운 과목을 강의하라고 해서 단칼에 거절했다. 그리고 다시 백수가 되었다.
처음 강의를 시작할 때 계속 같은 강의를 하는 줄 알고 열심히 준비했다. 내가 하겠다고 부탁한 강의가 아니고 학교에서 요청한 것이라 안일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데 일 년도 지나지 않아서 느닷없이 다른 과목을 하라니 짜증이 나기도 했고 생뚱맞은 과목을 배정하면서 아무런 설명도 없는 행정실의 태도에 화가 났던 것 같다.
거절하는 이메일을 보낸 후 너무 감정적인 결정이 아니었나 잠시 고민했다. 그러나 이미 보낸 이메일을 되돌릴 수도 없었고 그다지 아쉽지도 않았다. 이렇게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다시 백수가 되었는데 시간이 조금 지나니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24시간을 대체 무엇으로 채워야 할까, 할 일이 없으면 다시 갱년기 우울증의 늪에 빠지지 않을지 막막했다. 강의를 하겠다고 번복하는 이메일을 보내려다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러면 안 돼'라는 내 마음속 목소리가 나를 저지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유독 쉴 줄 모른다. 해외 출장을 갔을 때 깃발을 든 가이드를 따라서 쉴 새 없이 움직이는 사람들을 만나면 100 % 우리나라 여행객이었다. 외국 사람들은 혼자서 혹은 2,3명이 걷고 보고 그러다가 쉬면서 자유롭게 여행을 하던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단체로 빨리빨리 몰려다녔다.
나는 이러한 모습이 우리 국민의 민낯을 보여주는 것 같아 안타까웠다. 대한민국이 유독 경쟁이 심한 나라이긴 하지만 여행까지 전투적으로 임하는 모습은 탐탁지 않았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은퇴하고 여행을 간다면 절대 패키지여행은 가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런데 나도 어쩔 수 없는 대한민국 국민이었나 보다. 겨우 한 학기 쉬겠다고 결정한 후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내 모습이 어이가 없었다. 그나마 학교에 전화를 걸어 다시 강의를 하겠다고 말하기 전에 제정신을 차려서 다행이었다.
차 한 잔을 마시면서 내가 왜 이렇게 되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2024년의 목표를 쉬는 법과 노는 법을 배우는 것으로 정했다.
나는 70년대 초반에 태어났다. 우리 세대는 쉬는 법을 배우지 못하고 자랐다. 한 반 학생수가 70명을 육박했던 시대였고 심지어 초등학교는 한 교실에 수용이 불가능해서 오전, 오후반으로 나눠서 다녔다. 학생 수가 많으니 모든 경쟁이 치열했다. 치열한 입시 경쟁을 뚫고 대학에 진학했지만 대학 생활은 기대와 달랐다. 그러나 놀아 본 적이 없어 놀 줄도 몰라서 어영부영하다 보니 졸업을 했다. 아무래도 공부는 적성이 아닌 것 같아서 사회로 나갔더니 이번에는 생존 경쟁에 맞닥뜨렸다. 회사는 약육강식의 세계, 동물의 왕국 그 자체였던 것이다. 그래도 내가 선택한 길이니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생각에 열심히 자기 일을 한 죄 밖에 없는데 사십 대 후반이 되자 회사에서 눈치를 주기 시작했다. 몸 바쳐 일한 회사는 젊은 사람들에게 기회를 줘야 한다며 사십 대 후반의 우리들을 거리로 내몰았다.
꾸역꾸역 버티다가 마흔 끝자락에 은퇴를 하였다. 운이 좋아서 정년까지 다닐 수 있는 회사에 다녔지만 피폐해진 내 몸과 마음이 허락하지 않았다. 은퇴한 후 쉬면서 지친 몸과 마음을 추스르겠다 다짐했는데 여전히 나는 무언가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강의하는 것을 좋아했던 이유가 강의가 나를 정신없이 바쁘게 만들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회사를 그만두고 나니 시간이 넘쳐났다. 아침에 눈을 떠도 가야 할 곳이 없었고 해야 할 일도 없었다. 도무지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런 시기에 갱년기 우울증까지 나를 덮쳐 버렸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축 처져 있던 나에게 강의 제안이 왔고 새로운 일을 하면서 다시 활력을 찾았던 것이다.
나는 왜 쉬지 못하는 사람이 된 걸까? 18년을 꽉 채워서 공부를 했고 25년이나 직장을 다녔으면 이제 좀 쉬어도 되는 것이 아닐까? 그런데 왜 도무지 멈추지를 못하는 것일까? 이것도 일종의 중독이 아닐까?
이러한 생각에 다다르자 제대로 쉬는 방법을 한번 배워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이 오십이 되도록 쉬지 않고 열심히 달려왔으니 노는 방법과 쉬는 방법을 모르는 것이 당연하다. 나의 세대는 출산 휴가도 겨우 한 달이었고(법정 휴가는 60일이었지만 30일쯤 되었을 때 팀장님 전화가 와서 바로 회사로 복귀했다.) 이직을 할 때도 쉴 생각도 못하고 바로 다음 직장으로 출근했다. 아마 내 또래의 다른 직장인들의 삶도 비슷할 것이다. 우리 70년 대생들은 고도의 경쟁 속에서 쉬지 않고 달려와서 어떻게 멈춰야 할지 모르는 기관차와 비슷하다. 기관차가 멈추려면 급정거를 해서 어딘가가 망가지거나 제대로 멈추는 법을 배워서 천천히 정차하는 두 가지 방법이 있을 것이다.
직장을 다니면서 입으로는 맨날 '놀고 싶다. 쉬고 싶다.'라는 말을 내뱉었지만 정작 쉴 줄도 놀 줄도 모르는 바보가 되었다. 그래서 이제부터라도 놀고 쉬는 법을 제대로 한번 배워보려고 한다. 자고로 모르는 것은 배워야 하고 오십이 넘었지만 배움에는 나이 제한이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