꽤 오랫동안 비행기를 타지 않았다.
일 년에 몇 번씩 출장을 다닐 때면 역마살이 있어서 이런 직업을 얻었나 보다 생각하기도 했다. 차곡차곡 쌓인 마일리지로 승급이 되니 항공사 라운지를 당연하게 여겼고 비즈니스로 업그레이드를 해서 다녔다. 출장은 많이 다녔지만 여행을 맘껏 다니는 싱글들이 부러웠다. 아이 대학만 보내면 실컷 여행을 다니겠다고 다짐했는데 대학을 보내고 나니 다른 것들이 나의 발목을 붙잡았다. 시아버님이 편찮으셔서 장시간 집을 비울 수가 없었고 회사도 바쁘게 돌아갔다. 그러다 보니 출장만 다니고 여행은 떠나지 못하는 몇 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러다가 코로나라는 역병이 지구를 덮쳤고 모든 출장이 중단되었다. 그렇게 몇 년의 세월이 또 흘렀고 그러다가 은퇴를 하게 되었다.
은퇴를 한 후에는 굳이 비행기를 타고 떠날 이유를 찾지 못했다. 국내에도 가보지 않은 좋은 곳이 많은데 번거롭게 비행기를 타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비행기를 타지 않은지 5년의 시간이 흐른 후 어느 날 갑자기 항공사에서 마일리지가 만료될 예정이라는 메일을 받았다.
그제야 어디를 가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가고 싶은 곳은 딱 두 곳 밖에 없었다. 친구가 살고 있는 보스턴과 런던, 두 곳 중에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보스턴을 선택했다.
굳이 해외여행을 갈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저 친구가 보고 싶고 마일리지도 만료된다고 하니 떠난 여행이었다. 그런데 막상 여행을 떠난 후에야 알게 되었다. 가끔씩 나와 다른 말을 하고 다른 생김새를 한 사람들이 있는 나라로 떠나야 한다는 것을.
일상을 떠나 친구 집에서 보내는 매일매일의 순간이 새로웠다. 새소리로 깨어나는 아침도 좋았고 창 밖으로 펼쳐지는 파란 하늘과 구름도 좋았다. 친구와 따뜻한 차를 마시면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저녁 시간도 좋았고 무엇보다 일상에서 벗어나서 오로지 나 자신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좋았다.
국내 여행을 떠날 때에는 일상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여행 중이지만 걸려오는 전화를 받아야 했고 이메일을 확인해야 했고 일상의 자질구레한 일들을 처리해야만 했다. 그런데 다른 나라로 오니 전화기도 울리지 않았고 시차를 핑계로 이메일도 확인하지 않았다. 그래서 오로지 나에게만 집중하고 온전한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보스턴으로 떠날 때 아무것도 검색하지 않았다. 꼭 봐야 할 것, 꼭 해야 할 것, 꼭 먹어야 할 것들을 찾아보지 않고 그저 그날그날 떠오르는 것을 하면서 보냈다. 어떤 날에는 미술관에 가서 하루 종일 그림만 보기도 했고 어떤 날에는 마음에 드는 공원 벤치에 앉아서 하늘과 구름, 나무를 하염없이 바라보기도 했다.
이전에는 여행을 가면 계획표를 짜서 하루종일 바삐 움직였다.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면서 아등바등했다. 그런데 막상 여행에서 돌아오면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너무 짧은 시간에 많은 것을 하느라 온전히 경험하고 느낄 시간이 없었기에 아무런 기억도 남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이번 여행에서는 친구와 함께 앉아 있었던 호숫가의 바람, 물결, 풀내음까지 모든 것이 기억이 났다.
은퇴하고 떠난 여행에서야 비로소 여행의 의미를 깨달았다. 여행이라는 것은 쉼이고 일상으로부터 탈출이다. 일상에서 떠나서 새로운 시각으로 나를 바라보고 새로운 관점으로 나의 인생을 되짚어보는 시간을 가지는 것이 진정한 여행의 의미가 아닐까?
한때 세상의 모든 곳을 가보고 싶다는 꿈을 꾼 적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것들이 의미가 없음을 알게 되었다. 이제는 도장 깨기 식의 여행은 그만두고 아주 가끔 진정한 휴식이 필요할 때에만 여행을 떠나야겠다.
이번 여행에서 나는 잊고 있었던 것들을 깨달았고 삶에 대한 용기를 되찾았다. 2주가 넘는 시간 동안 먹여주고 재워주고 놀아주기까지 한 친구에게 고마움을 전하면서 다시 일상을 열심히 살아가려고 한다.
표지 사진 : 월든 호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