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부부는 여행을 많이 다니지 못했다. 맞벌이를 하면서 아이를 키우느라 정신없이 바빴고 둘 다 해외 출장도 많았기 때문이다. 따로 가족여행을 간다기보다 남편이 출장 갈 때 내가 휴가를 내고 아이와 함께 따라가거나 내가 출장을 갈 때 남편이 휴가를 내고 아이와 함께 하는 출장 겸 여행을 하곤 했다. 그래서 우리 가족의 해외여행은 항상 반쪽짜리 여행이었다. 한 사람은 출장이라 일주일 내내 일을 해야 했고 다른 한 사람만 아이와 함께 휴가를 즐기다가 마지막 2~3일 정도만 함께 보내는 여행이었기 때문이다.
아이를 다 키운 후 돌아보니 우리 가족의 해외여행은 모두 출장지에서 함께 한 여행이었다. 게다가 이상하게도 남편이 휴가를 내고 나의 출장을 따라온 것이 대부분이라 온전히 가족 여행을 즐긴 기억이 없었다. 엄마 없이 일주일 내내 놀다 지친 아빠와 아들은 빨리 집에 가고 싶어 했다. 완전체가 된 가족과 함께 며칠만 더 놀다 집에 가고 싶은 엄마의 마음은 아랑곳하지 않고 둘은 호텔방에서 쉬기를 원했다. 나가서 놀자는 엄마와 방에서 쉬겠다는 아빠와 아들이 티격태격하다가 집으로 돌아오곤 했던 기억, 그것이 나의 가족 여행에 대한 추억이었다.
아들이 성인이 된 후 남편과 실컷 여행을 다니려고 마음먹었다. 그런데 코로나라는 역병이 세상을 덮쳤고 우리의 여행 계획은 무산되었다. 그렇게 몇 년 동안 국내 여행만 소소히 다니다가 작년부터 다시 해외로 나가기 시작했다. 한 살이라도 젊을 때 내가 가보지 못한 세상에 가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작년에는 혼자 보스턴에 다녀왔다. 보스턴 여행을 가면서 비행기 표만 끊고 아무 계획도 세우지 않았다. 친구 집에서 지낼 예정이라 숙소도 예약할 필요가 없었다. 주변에서 보스턴에 가면 꼭 봐야 하는 것들과 해야 하는 것들을 알려주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남들이 꼭 봐야 하는 것들과 꼭 해야 하는 것들이 내게 의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보스턴에서 나는 친구와 함께 느긋하게 일상을 즐겼다. 친구가 일하러 갈 때 따라가서 새로운 동네를 구경하기도 했고 하루 종일 미술관에서 시간을 보내면서 그림을 보고 밥을 먹고 사람 구경을 하기도 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스트레칭을 한 후 차를 마시면서 글을 썼다. 친구와 아침 식사를 한 후 동네 산책을 하면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눴다. 특별히 가고 싶은 곳이 없는 날에는 친구와 집에서 시간을 보냈다. 이렇게 자유롭고 충만한 시간을 보낸 후 지친 몸과 마음을 충전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올해에는 남편과 에든버러 여행을 다녀왔다. 다녀온 사람들이 하나같이 추천해서 오랫동안 마음속에 품고 있던 곳이었다. 에든버러행 비행기 티켓을 끊고 숙소를 예약한 후 남편은 나를 채근했다. 빨리 여행 계획을 짜고 동선을 짜서 주요 관광지를 예약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미 한번 유유자적 여행을 경험한 나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드디어 출발 날짜가 다가왔고 느긋하기만 한 나를 못마땅하게 바라보는 남편과 함께 에든버러에 도착했다. 서울에서 런던까지 14시간 반의 비행, 그리고 런던에서 기차를 타고 4시간 반이나 가야 하는 먼 길이었다.
에든버러는 해리 포터의 도시 그 자체였다. 중세 시대 건물이 잘 보존되어 있어서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시대를 거슬러 올라간 것 같았다. 도시 전체가 온통 회색빛이었고 툭하면 거센 바람이 불면서 비가 쏟아지곤 했는데도 전혀 우중충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마주 한 모든 사람들이 친절하고 유쾌해서 그랬던 것 같다.
에든버러에서 우리는 매일 아침 그날의 기분에 따라서 가고 싶은 곳을 딱 한 곳만 정했다. 그리고 목적지로 가는 길에 구경하고 싶은 곳이 있으면 들어가서 보고 먹고 싶은 것이 있으면 먹으면서 여유를 즐겼다. 처음에는 이런 스타일의 여행을 어색해하던 남편도 하루 만에 완전히 적응했다. 둘째 날부터는 남편도 긴장을 풀고 에든버러를 온전히 즐기는 모습이 보였다. 날이 좋은 날에는 언덕에 올라가서 도시 풍경을 보면서 시원한 공기를 실컷 마셨고 호텔로 돌아오다가 우연히 발견한 펍에 들어가서 스코틀랜드 맥주와 피시앤칩스를 즐겼다. 바람이 불고 쌀쌀한 날에는 거리의 상점들을 구경하고 성당에 들어가 보았다. 19시간이나 걸려서 도착한 에든버러에서 겨우 일주일 머물 예정이었지만 수많은 관광지를 찍고 다니기는 싫었다. 짧은 시간 내에 많은 것을 보는 것이 우리에게 큰 의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에든버러의 유명한 관광지 중에 우리가 가보지 못한 곳들도 많을 것이다. 그런데 그 많은 곳에 다 가보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예전에 패키지여행을 한번 해봤는데 짧은 시간 내에 수많은 곳을 다녔지만 돌아온 후에는 기억에 남은 곳이 별로 없었다. 아마도 그 이후에 여행에 대한 정의를 다시 내린 것 같다. 내게 의미 있는 여행은 주어진 시간 내에 새로운 도시를 여유롭게 즐기는 것이라고.
우리는 에든버러를 충분히 즐기고 집으로 돌아왔다. 비행기 표과 숙소만 예약해 놓고 아무 계획도 짜지 않던 나를 못마땅해하던 남편도 이제 나를 믿는 눈치이다. 저녁을 먹으면서 남편과 다음번에는 어떤 곳으로 여행을 떠날지 이야기를 나누니 벌써 여행을 떠난 것처럼 설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