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씩 너무 우울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날들이 찾아온다. 회사를 다닐 때는 괜찮은 날보다 우울한 날들이 훨씬 많았다. 직장 상사의 말도 안 되는 트집과 괴롭힘, 동료의 모함과 뒤통수, 도무지 풀리지 않는 업무들...... 곳곳에 우울증을 유발하는 요인들이 널려 있었다.
우울증의 가장 큰 원인이던 회사를 그만두었지만 우울증은 가끔씩 나를 괴롭힌다. 아마도 갱년기와 함께 우울증이 다시 찾아온 것 같다. 우울한 기분이 들면 수년 동안 우울증과 고전분투하면서 만든 나만의 루틴을 시작한다.
우울증이 찾아오면 일단 며칠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푹 쉰다. 어차피 애를 써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이니 쓸데없이 아등바등하지 않고 내 몸과 정신이 푹 쉴 수 있도록 내버려 둔다. 푹 쉬어도 우울증이 나아지지 않으면 그다음에는 그나마 하고 싶은 일을 찾아본다. 우울증에 빠지면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지만 머리를 쥐어짜 내서 조금이라도 하고 싶은 일을 찾아보는 것이다. 아주 단순하고 시간이 많이 걸리는 일일수록 좋다. 해야 할 일들은 산더미같이 쌓여 있지만 그런 것들은 지금 할 수 없다. 그저 지금 하고 싶은 일, 그리고 할 수 있을 것 같은 일을 찾아보는 것이다.
청소를 하거나 기타 연주를 하거나 쓰지도 않는 물건들을 꺼내서 닦고 정리해 본다. 그렇게 쓸데없지만 내가 하고 싶은 일에 몰두하다 보면 조금은 괜찮아지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면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 이번 단계에는 내가 해야 하는 일들 중에서 가장 쉬운 일을 찾아본다. 아직은 우울증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어렵고 중요한 일은 할 수 없다. 하지만 쉬운 일들은 해 낼 수 있을 것 같으니 그런 것들을 찾아서 해보는 것이다. 그렇게 쉬운 것들부터 하나씩 처리하다 보면 당장 해야 하는 중요한 일들을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이 생긴다. 작고 쉬운 일들을 해내면서 얻은 자신감이 나를 우울증에서 꺼내주었기 때문이다. 이런 방법으로 나는 25년의 회사 생활을 무사히 버터 내었다.
아마도 내가 우울증과 잘 지낼 수 있었던 것은 나의 우울이 심하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아무리 경증의 우울증이라도 한번 빠지면 헤어 나오기가 힘들었다. 매일 아침 무기력한 상태로 눈을 떴고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내 인생은 실패했다는 생각이 나를 괴롭혔다. 세상의 모든 걱정이 내게 붙어서 나를 무너뜨리려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작은 것들에 매달렸다. 기타 연주, 정리정돈, 요리 등 그때그때 달라지는 사소한 것들에 매달렸다. 쓸데없지만 사소한 취미 덕분에 나는 우울증과 잘 지낼 수 있었다. 우울증과 지내기 위한 나만의 루틴은 다행히 이번에도 효과가 있었다. 이번에는 사용하지 않는 액세서리들을 꺼내서 모두 세척했다. 서랍을 뒤져서 액세서리를 꺼내고 정성스럽게 닦았더니 반나절이 훌쩍 지났고 나의 우울도 지나갔다. 우울증의 깊은 늪에 빠지기 전에 나를 꺼내 준 나의 사소한 취향들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한다.
매일 비만 오는 것은 아니다. 비가 그치면 아름다운 무지개가 뜨고 햇빛이 찬란한 날도 온다. 우울증에 빠져 허덕일 때 브런치에서 읽은 글들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 나의 글도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길 바라며 기록을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