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작 소설> 엄마의 인생 11

by 아르페지오

군자씨와 군자씨 딸의 불편한 동거가 지속되던 어느 해, 결국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어느새 오십을 훌쩍 넘긴 군자씨 딸은 갱년기가 찾아온 후 유독 병원 신세를 많이 졌다. 몇 주째 멈추지 않는 하혈 때문에 조직 검사를 하고 집으로 돌아오던 길에 군자씨 딸은 군자씨로부터 다급한 전화를 받았다. 약속 시간에 늦어서 빨리 나가야 하는 군자씨가 도무지 자동차 차 키를 찾을 수 없어서 전화를 했던 것이다. 군자씨가 명량한 목소리로 차 키를 못 찾겠는데 어디에 두었냐고 물었고 딸은 버럭 소리를 지르고 전화를 끊었다.


군자씨의 머릿 속은 갑자기 하얘졌다. 군자씨는 열흘 전쯤 자동차 사고를 냈고 다시는 운전을 하지 않겠다며 딸에게 키를 반납했다. 그런데 채 열흘도 안 지나 그 사실을 까맣게 잊고 딸에게 차 키가 어디에 있는지 물은 것이다. 군자씨는 딸을 보자마자 미안하다고 말했다. 그리고 고민을 해봤는데 자동차가 꼭 필요하니 보험료를 본인이 부담하는 조건으로 운전을 다시 하게 해달라고 덧붙였다.


군자씨의 말에 안 그래도 어둡던 딸의 표정이 싸늘하게 변했다. 군자씨는 여든을 바라보는 나이였고 몇 년 전부터 접촉 사고를 내기 시작했다. 딸이 계속 운전을 그만두라고 했지만 군자씨는 말을 듣지 않았다. 삼십 대 중반부터 운전을 시작한 군자씨는 운전이 너무 좋았다. 딸의 집에 얹혀 살아서 온전한 군자씨만의 공간은 자동차 밖에 없었다. 군자씨 는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면서 드라이브를 할 때 행복을 느꼈다. 운전을 못하는 친구들을 태우고 다니면서 생색내는 것도 군자씨의 즐거움이었다. 1940년대생 친구들은 대부분 운전을 하지 못했고 운전해서 어디든 갈 수 있는 군자씨를 부러워했다. 그런데 이렇게 유일하게 좋아하는 것을 하지 말라니 도저히 뜻을 굽힐 수 없었다.


군자씨 딸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다음 날, 중고차 업체에 전화를 걸어 차를 처분해 버렸다. 어차피 군자씨 이름으로 된 재산은 하나도 없었고 군자씨가 몰고 다니던 자동차도 딸이 사 준 것이라 군자씨 동의는 필요하지 않았다. 차를 처분한 후 큰딸과 사위는 짐을 싸서 시댁으로 갔다.


군자씨는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몇 년 동안 면허증을 반납하라고 하던 딸이 자신의 운전을 그토록 싫어했다는 것도 그제야 알아차렸다. 그러나 후회를 해봐야 이미 소용 없었다. 한 달이 넘도록 시댁에서 머물다 온 딸은 군자씨에게 말했다. 이제 도저히 엄마랑 같이 살 수 없으니 방을 마련해서 이 집에서 나가달라고.


어떤 위기가 닥쳐도 이성을 잃지 않았던 군자씨는 이미 이런 상황을 예견하고 있었다. 방을 마련해 주는 대로 집을 나가겠다고 침착하게 대답했다.


그런데 큰딸이 갑자기 소리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내가 ATM 기계인 줄 아냐고, 28년 동안 군자씨를 먹여 살리기 위해 그토록 고군분투했는데 아픈 딸에게 또 돈을 요구하는 거냐고 울부짖었다. 큰딸은 둘째에게 전화를 걸어 당장 엄마를 모셔 가라고 통보했다. 하필 추석이라 근처에 있던 둘째는 엄마를 모시고 집으로 돌아갔다. 동생의 시댁은 군자씨네 집 근처여서 동생은 차례를 지낸 후에 군자씨네 집으로 올 예정이었다.


그렇게 군자씨와 군자씨 큰딸의 오십 년 넘는 동거는 막을 내렸다. 군자씨 큰 딸은 반백살이 넘어서야 처음으로 엄마와 떨어져 살게 되었다. 그리고 군자씨는 며칠 후 둘째 딸이 마련해 준 원룸으로 이사했다. 둘째 딸네 집에는 군자씨가 지낼 방이 없었다. 둘째는 서둘러서 군자씨가 지낼 방을 계약했다.


손바닥만 한 원룸에 들어가면서 군자씨는 자신이 그동안 큰딸네에서 얼마나 편안하게 지냈는지 깨달았다. 그러나 군자씨에게 이제 돌아갈 곳은 없었다. 큰딸은 현관 비밀번호까지 바꾸고 군자씨의 방을 싹 정리했고 작은 딸네 집에는 군자씨가 지낼 방이 없었다. 급히 집을 구하느라 급전을 다 써버린 둘째 딸은 큰 딸이 주던 용돈의 절반도 주지 않았다. 군자씨는 삼십 년 동안 꼬박꼬박 팔십만 원씩 용돈을 주던 큰딸에 대한 고마움도 뒤늦게 깨달았다. 진작에 고맙다는 말을 했어야 하는데 이제는 큰딸에게 고마움을 표현할 기회조차 사라졌다. 군자씨 큰딸은 군자씨의 전화도 받지 않았다. 모녀는 아름답지 않게 이별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군자씨 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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