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들어 자꾸 아버지 생각이 난다. 주식으로 전재산을 다 날렸을 때 아버지의 나이는 55세였다. 당시에 나는 '어떻게 어른이 저렇게 무책임할 수 있을까' 하면서 아버지를 원망했는데 비슷한 나이가 되어보니 아버지가 이해되기도 한다.
당시 아버지는 은퇴를 해서 별다른 수입이 없었다. 자식들 결혼도 아직 못 시켰고 노후 대비도 해야 하는데 모아 놓은 돈은 없었으니 하루하루 불안했을 것이다. 평생 은행에 몸 담았던 사람이니 쉽게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이 주식 투자였고 몇 번의 투자에서 재미를 보고 일확천금을 꿈꿨을 것이다. 그러다 갑자기 손해가 나기 시작했고 대출에 대출을 받아서 밑이 빠진 항아리인 줄도 모르고 계속 돈을 부었을 것이다. S대를 나와서 엘리트 코스를 밟았고 30년 넘게 은행에서 일하셨으니 설마 나 같은 사람이 망할까 하는 자만심도 있었을 것이다. IMF라는 사건이 터지지 않았더라면 그렇게 처참하게 무너지진 않았을 것이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아버지는 가족을 위해 돈을 벌려고 했던 것이었고 지나치게 운이 없었던 것이었다.
나의 기억 속에 아버지는 항상 불안하고 외로워 보였다. 내성적인 성격이라 친구도 별로 없었고 퇴근하면 곧장 집으로 오셨지만 가족들은 아버지와 시간을 보내기 싫어했다. 집에서도 항상 담배를 피우고 술을 드셨기 때문에 딸들은 아버지가 불러도 안방에 잘 들어가지 않았다. 원래부터 남편에게 애정이 없었던 엄마는 늘 냉랭하게 아버지를 대했다. 이런 가정에서 아버지가 어떻게 안정감을 느낄 수 있었을까? 회사에서 온갖 스트레스를 받고 집에 돌아왔지만 집조차 편안히 쉴 수 있는 공간이 아니었을 것이다.
어린 시절 어머니의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해서 애정 결핍이 있었던 아버지는 자신의 딸들을 무척이나 사랑했다. 그러나 제대로 애정을 받아보지 못한 그의 애정 표현은 지나치게 과격했다. 무등을 태워주면서 세게 뺨을 비비거나 뽀뽀를 하곤 했는데 언젠가부터 담배 냄새나는 아버지 곁이 꺼려지기 시작했다. 아마도 사춘기 무렵부터였던 것 같다. 그렇게 자신의 애정의 대상이었던 딸들도 품에서 떠나가고 아버지는 집에서 다시 혼자가 되었다.
이제 와서 후회해 봐야 소용이 없겠지만 아버지를 다시 만날 수 있다면 미안하다고, 그리고 가족을 위해 30년이나 일하시느라 고생하셨다고 말하면서 안아드리고 싶다. 한 직장에서 30년 넘게 일했다는 것은 그 자체로 존경스러운 일인데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다. 부모가 되어 봐야 부모 마음을 안다더니 이제야 아버지 마음을 이해하게 되었다. '엄마가 아버지를 사랑으로 보듬어 주었다면 우리 집 상황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 다시 엄마에 대한 원망만 밀려온다.
할머니는 왜 아버지를 키우지 못하셨는지, 엄마는 왜 아버지를 그토록 냉랭하게 대했는지, 큰 아버지는 어쩌면 그렇게 동생을 외면할 수 있었던 것인지 궁금한 것들이 많지만 이제는 알 수 없는 것들뿐이다.
그래도 즐거웠던 유년 시절의 기억이 조금이나마 위로가 된다. 가세가 기울기 전까지 우리 가족의 연례행사는 아버지 양복을 맞추러 양복점에 가는 것이었다. 양복점에 가서 멋진 재단사가 아버지의 치수를 재는 동안 나와 동생은 널브러진 천 조각을 가지고 인형 놀이를 실컷 했다. 치수 재는 것이 끝나면 아버지는 우리를 양복점 옆 백화점으로 데리고 가서 맛있는 경양식을 사주셨고 우리 가족은 깔깔 웃으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엄마의 표정은 그때도 냉랭했던 것 같지만 적어도 그때까지는 우리 가족은 행복했던 것 같다.
아버지 생각을 하면서 '내가 조금 더 일찍 철이 들었더라면'하고 뒤늦은 후회를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