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결혼한 지 29년 차 부부이다.
남편과 나는 연애 5개월 만에 결혼을 했기 때문에 신혼 초에 정말 많이 싸웠다. 연애기간이 짧아서 서로를 잘 모른 채로 결혼을 했기에 서로의 다름을 알아가는 과정이 쉽지 않았다.
모든 것이 정리정돈되어 있어야 하고 계획되어 있어야 하는 나와는 달리 남편은 뭐든 빨리빨리 해치워야 하고 즉흥적이다. 이렇게 서로 다른 두 남녀가 29년, 24년 동안 각자의 방식대로 살다가 한집에서 같이 살게 되었으니 매일 티격태격했던 것 같다.
모든 부부들이 다 그렇겠지만 우리는 시시한 것들로 다퉜다. 예를 들면 화장실에 휴지를 거는 방향부터 바깥쪽이 맞다 안쪽이 맞다고 하면서 티격태격했다.
어렸을 때부터 우리 집 화장실 휴지는 바깥쪽(아래 그림의 왼쪽 참고)으로 걸려 있었다. 24년을 이렇게 살다가 남편과 한집에서 살게 되었는데 그는 항상 휴지를 안쪽 방향(아래 그림의 오른쪽 참고)으로 걸어 놓았다. 매번 휴지 방향을 돌려놓다가 휴지를 반대쪽으로 걸어 달라고 했더니 남편은 대뜸 화부터 냈다. 이 바쁜 세상에 휴지 따위는 아무렇게나 걸면 되지 대체 방향이 왜 중요하냐는 것이었다.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 일로 싸우곤 했으니 하루도 조용하게 넘어간 날이 없었던 것 같다.
매일 티격태격하면서 서로의 다름을 알아가고 어떤 때는 서로에게 맞추면서 살다 보니 어느새 남편과 28년 넘는 세월을 함께 하였다. 이제 남편은 내게 배우자인 동시에 가장 가까운 친구이다. 그러나 결혼 생활 28년 동안 우리에게도 위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래도 이렇게 함께 할 수 있었던 것은 서로의 다름을 존중해 주었기 때문이다.
20대와 30대에 남편은 집안일을 전혀 도와주지 않았다. 장모가 한집에서 같이 사는 특수한 환경이 한몫을 하기도 했지만 맞벌이인데 집안일을 전혀 도와주지 않는 남편에게 많이 서운했다. 서운함을 꾹꾹 눌렀다가 어쩌다 한 마디 하면 남편은 화부터 냈다. 남편은 특히 남과 비교하는 것을 싫어했는데 서운함을 이야기할 때마다 나는 누구의 남편은 이런 것도 해준다던데 하는 식으로 말했던 것이다. 그렇게 불편한 대화가 이어지고 나면 남편에게 바라던 것들을 하나씩 포기해야 했고 결국 집안일은 모두 내 차지가 되었다.
그런데 40대 중반쯤 남편이 변하기 시작했다. 별다른 이야기를 한 것도 아닌데 님편이 집안일을 하나씩 하기 시작했다. 주말에는 대청소도 하고 설거지도 도맡아 했다. 아직도 남편이 왜 갑자기 변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상대적으로 남편보다 일찍 출근하고 늦게 퇴근하는 나를 배려한 변화였던 것 같다.
그리고 50대가 된 지금에는 전세가 역전되어서 대부분의 집안일을 남편이 하고 있다. 갱년기를 거치면서 만사가 귀찮아진 나는 점점 집안일에서 손을 놓았다. 그리고 깔끔한 집에 익숙해졌던 남편은 집안일을 하나씩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내가 집안일에서 손을 놓은 몇 년 동안 남편은 내게 한 번도 불평을 하지 않았다. 불평을 하는 대신 그저 조용히 내가 하던 일들을 하나씩 직접 하기 시작했다. 아마도 나의 변화에 대해 무언가 이유가 있겠지라고 이해하고 배려한 것 같다. 이렇게 서로에게 변화가 있었을 때마다 우리는 절대 서로에게 불평을 하지 않았다. 그저 서로를 기다려줬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아래 사진은 요즘 우리 집 화장실 수납장 사진이다. 남편은 항상 이렇게 반대 방향으로 수건을 정리한다. 그런데 이렇게 수건을 넣으면 수납장 문을 열고 닫을 때마다 수건이 걸려서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다. 결혼 초기에는 남편에게 수건 정리를 부탁한 후 다시 정리를 하면서 잔소리를 했다. 그런데 내가 잔소리를 시작하면 남편은 수건을 정리하는데 왜 방향이 중요하냐며 따지기 시작했고 결국 '그럴 거면 네가 다 해'로 끝나서 집안일은 내 차지가 되곤 했다. 결혼 29년 차인 지금도 남편은 여전히 수건을 반대 방향으로 정리하지만 나는 이제 남편이 정리한 수건을 바꿔놓지 않는다. 28년 살아보니 수건 하나 반대로 넣는다고 해도 별 문제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결혼 생활에서 무엇이 정답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서로를 조금만 더 배려하고 기다려 주는 마음만 있다면 서로 다른 두 사람도 함께 어울려서 잘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요즘 세상이 너무 각박해진 것 같다. 어느 누구도 참지 않고 어느 누구도 상대방을 배려해주지 않는 것 같다. 결국 함께 살아가야 하는 세상인데 서로 조금만 참고 서로 조금만 배려해 주면 좋지 않을까. 아침에 카페에 들어 기는데 안에서 나오려는 사람과 딱 마주쳤다. 이런 경우에 확 밀치고 나오는 경우가 많아서 나도 모르게 움찔하며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런데 안에서 나오려던 분이 문을 잡고 나에게 먼저 들어오라고 손인사를 건넸다. 이런 친절을 받아본 것이 오랜만이라 하루 종일 기분이 좋았는데 내일은 내가 다른 이에게 작은 친절을 베풀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