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대기업의 임원을 대상으로 한 시간짜리 프레젠테이션을 했다.기업의 임원이 우리 회사에 직접 제품 설명회를 요청하였고 지사장님이 두 부서에 과제를 주셨다. 두 부서에서 30분씩 나눠서 해당 기업과 우리 회사가 파트너십을 가지고 co-innovation 할 수 있는 제안을 만들어 달라고 하셨다. 세션 준비를 위한 시간은 한 달 정도 주어졌지만 언제나 그렇듯 매일매일 업무에 쫓기다 보니 2~3일 전에 촉박하게 준비할 수밖에 없었다.
프리세일즈 업무를 해 본 사람들은 공감하겠지만 이러한 임원 대상 세션은 참 부담스럽고 준비하기도 어려운 세션이다. 대기업의 임원들은 혜안을 가지고 계시고 업계 동향이나 지식도 풍부하신 분들이라 수박 곁 핥기 식의 프레젠테이션을 하면 바로 Stop 사인이 떨어진다. 보통 30분이나 한 시간 정도의 시간이 주어지는데 약속된 시간이 채 끝나기도 전에 시계를 보면서 다음 미팅이 있어서 이만 나가보겠다던지, 그런 내용은 우리 기업의 과제와는 관련이 없으니 준비해 온 다른 내용이 없으면 이만 중단하자고 한다던지의 등의 즉각적인 Stop 사인이 나온다. 워낙 시분초를 다투어 사는 분들이기에 필요 없는 내용이다 싶으면 본인이 직접 혹은 실무자 선에서 바로 세션을 중단시키는 것이다. 프레젠테이션을 한 번이라도 해 본 사람은 알겠지만 세션 중간에 쫓겨나는 것은 정말 당황스럽고 참혹하기까지 하다. 따라서 이러한 임원 대상 프레젠테이션은 프리세일즈들에게 가장 어렵고 힘든 세션이다.
나는 이제 은퇴를 할 예정이니 유사한 일을 하고 있는 후배 혹은 동지들을 위해 임원 대상 프레젠테이션을 준비하는 나의 노하우를 공유하려고 한다.
제일 먼저 대상 기업의 최신 IR 자료를 찾아서 읽어본다. 기업의 IR 자료는 정기적으로 공시하도록 되어있기 때문에 기업 웹 사이트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기업의 IR 자료를 살펴보면 이 기업이 최근에 어떤 과제를 추진하고 있고 어떤 분야에 투자하고 있는지 등의 중요한 정보를 알 수 있다.
다음에는 내가 만나는 임원의 이름을 포털에서 검색해본다. 임원들은 인터뷰도 많이 하고 발표도 많이 하기 때문에 뉴스나 기사에서 이 분이 어떤 주제에 관심이 있으며 최근에 어떤 기업들과 협업을 하고 있는지 등의 정보를 찾을 수 있다. 운이 좋으면 만나야 할 임원분이 CES 등의 각종 콘퍼런스에서 강연한 동영상을 유튜브 같은 곳에서 찾을 수 있다. 이런 것들을 보고 나면 어떤 주제로 이야기를 풀어나가야 할지 서서히 윤곽이 잡히기 시작한다.
다음 단계는 회사에서 제공하는 다양한 자료들를 검색하는 것이다. 임원을 대상으로 세션을 진행할 경우 본사에서 제공되는 일반적인 자료를 사용하면 안 된다. 저명한 리서치 기관과 협업하여 업계 동향을 분석한 자료, 동종 업계의 성공 사례 등을 검색해보고 여러 자료를 조합하여 스토리를 짜서 프레젠테이션을 만들어야 한다. 사실 이 과정이 가장 시간이 많이 걸리고 힘든 과정이다.
그러나 대기업 임원분들과 미팅을 할 수 있는 기회는 자주 주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임원 미팅이 잡히면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 준비하여야 한다. 임원이 참석할 경우 동석하는 실무진도 부장급 이상인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인지 프리세일즈 팀에서 상대적으로 경력도 많고 나이도 많은(^^) 내게 임원 대상 프레젠테이션 요청이 많이 들어왔고 임원 대상 프레젠테이션을 여러 번 하면서 나만의 노하우를 쌓게 되었다. 은퇴하기 전에 나와 비슷한 일을 하는 사람들을 위해 이런 것들을 기록해놓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한번 정리해보았다.
내가 프레젠테이션을 준비하는 방식은 누군가가 가르쳐 준 것은 아니다. 22년 동안 프리세일즈 일을 하면서 힘들었던 것 중 하나는 프레젠테이션을 정말 많이 해야 하는데 제대로 가르쳐주는 사람도 없고 배울 수 있는 곳도 별로 없다는 것이었다.
그나마 나는 운이 좋아서 첫 번째로 입사했던 회사에서 양질의 프레젠테이션 교육을 받을 수 있었는데 이러한 교육이 20여 년간 프리세일즈 일을 하는 데 있어서 큰 도움이 되었다. 당시 내가 일하던 부서는 교육 부서였는데 본사에서 강사 인증을 받지 않으면 한국에서 강의를 할 수 없도록 규제를 하고 있었다. 인증받은 강사 만이 강의를 할 수 있도록 규제해서 전 세계 어디서나 제대로 된 강의를 제공하겠다는 강력한 의지 때문이었다. 이러한 규제 덕분에 나는 새로운 교육 과정이 나올 때마다 본사에 가서 마스터 강사 앞에서 영어로 강의를 하고 날카로운 질문 공세를 통과해서 강사 인증을 받아와야 했다. 힘든 과정이었지만 강사 인증 프로그램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이 회사와는 연이 닿지 않아서 2년 정도 근무하고 이직을 했지만 2년 동안 정말 좋은 선생님들을만났다.2년 동안 전 세계에 내로라하는 실력을 가진 마스터 강사들을 만났고 그들에게 다양한 프레젠테이션 노하우를 배울 수 있었으니 돈으로 살 수 없는 값진 경험이라생각한다.
그러나 그 이후에는 프레젠테이션 교육을 체계적으로 받을 수 있는 기회가 별로 없었다. 주로 다른 회사의 콘퍼런스에 참석해서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세션을 진행하는지배우거나 TED나 유튜브 등에서 외국의 유명한 강연들을 찾아보면서 공부를 했다. 업계의 전설이라고 여겨지는 스티브 잡스의 프레젠테이션도 여러 번 반복해서 봤다.
어제 세션도 오랜 시간 고민하고 준비를 해서 진행했는데 다행히 임원분의 관심사에 있던 내용이라 실무자 대상으로 후속 세션을 진행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사실 이 기업의 경우 우리 부서의 제품과는 매칭 시킬 수 있는 것이 없어서 고민 고민하다가 동종 업계에서 우리 제품을 사용한 성공 사례를 찾아서 소개했는데 이 기업에서도 같은 과제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나는 다음 주에 요청받은 실무자 세션을 준비하면 된다.
그러나 내 세션에 이어서 진행한 다른 부서의 세션은 실패하였다. 세션을 진행한 사람은 10년 차 정도 된 프리세일즈였는데 이 사람의 프레젠테이션이 왜 잘못되었는지 분석해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다.
첫째, 주어진 발표시간은 30분이었는데 그는 너무 많은 내용을 준비해왔다. 많은 것들을 알려주고 싶은 마음이야 이해하지만 프레젠테이션은 반드시 주어진 시간에 맞춰서 해야 한다. 내게 주어진 시간이 30분이면 발표 자료는 15장에서 최대 30장 정도가 적당하다. 그런데 이 사람은 50여 장의 발표 자료를 준비해왔고 심지어 제품이 너무 많아서 30분 안에 세션을 진행해본 적이 없다는 말까지 했다. 발표자에게 주어진 미션이 30분 안에 핵심 내용을 전달하라는 것이었는데 시작할 때부터 해본 적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발표자에 대한 신뢰를떨어지게 만든다.
둘째, 그가 제안하려는 솔루션은 크게 4가지였는데 프레젠테이션 중간에 갑자기 제안과 관련 없는 특정 제품을 소개하는데 많은 시간을 사용했다. 우리 회사 제품에는 AI 기술이 접목되어 있는 신기한 제품들이 있다. 사실 이런 제품들은 아직 판매하는 것이 아니고 실험 단계의 제품들이라 긴 세션에서 청중들의 집중력이 떨어질 때쯤 재밌는 기능을 두어 개 보여줄 때 유용하다. 그런데 그는 겨우 30분짜리 세션에서 주제와 관련도 없는 재밌는 제품을 소개하느라 5분 이상의 시간을 사용했다. 게다가 그가 소개한 AI 기술을 적용한 제품은 모두 내가 담당하고 있는 제품들이었다. 그는 참석자의 흥미를 끌기 위해 자신이 담당하는 제품도 아닌 우리 부서의 제품을소개했던 것이다. 내가 보기에도 주제와 관련이 없는 다른 제품 기능이 갑자기 튀어나오니 산만하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듣는 청중은 어땠을지 상상이 된다.
셋째, 안타깝게도 그의 세션은 이 기업의 과제와는 맞지 않았다. 임원분이 세션 중간쯤에 좋은 내용이지만 우리 회사는 이러한 과제들에 대해 고려하지 않고 있으며 올 해에는 이런 사업을 할 계획이 없다고 말씀하셨다. 청중이 이렇게까지 말하는 것은 발표자가 준비해 온 내용에 대해 관심이 없다는 뜻으로 이런 경우 당황하지 말고 자연스럽게 세션을 마무리해야 한다. 그런데 그는 당황하진 않았으나 세션을 꿋꿋이 진행했다. 점잖으신 분이라 돌려서 이만 마무리했으면 좋겠다는 뜻을 비추신 건데 그는 준비한 세션을 끝까지 진행했고 심지어 약속된 30분을 넘기는 결례까지 범했다.
프레젠테이션은 고객을 위해 하는 것이지 자기만족을 위해 하는 것이 아니다. 가끔 자아도취에 빠져서 청중은 관심이 없는데 프레젠테이션을 끝까지 이어나가고 있는 강연자들을 보곤 한다. 청중이 냉랭한 반응을 보이고 관심이 없다고 의사를 표하면 프레젠테이션은 적절한 단계에서 중단해야 한다. 많은 강연자들이 열심히 준비한 것이 아깝고 속상하다며 세션을 끝까지 진행하는데 이것은 서로에게 시간 낭비일 뿐이다. 내가 열심히 준비한 것은 내 사정일 뿐이고 그 내용이 청중에게 외면당했다면 바로 중단하는 것이 맞다.
이렇게 세 가지가 프레젠테이션에서 절대 하지 말아야 할 주의사항이다.
25 년의 직장 생활과 경험에서 나 혼자 좌충우돌하며 배운 것이라 정답이 아닐 수도 있지만 비슷한 일을 하며 고민하고 있는 누군가에게는 도움이 될 거라 생각되어서 프레젠테이션의 기술에 대해 한번 정리해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