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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위로하기 위해 했던 것들이 나를 특별하게 만들었다

by 아르페지오

나는 이 나이가 될 때까지 내가 줄 아는 것이 별로 없고 재주도 없는 평범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살았다. 대학과 대학원을 졸업한 후 취직을 했고 직장을 다니다 남편을 만나서 결혼을 했고 아이를 낳고 키우며 25년째 직장을 다니며 살고 있는 그저 평범한 워킹맘이라고 생각하고 살았다.


그러나 50여 년의 인생 동안 이런저런 고비들이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나를 위로하려고 이것저것을 시도하곤 했었는데 그것들이 모여서 나를 조금은 특별하게 만들어준 것 같다.


나의 첫 번째 인생 고비는 대학 진학이었다. 공부를 못 하진 않았고 원하는 대학은 쉽게 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대학의 문턱은 생각보다 높았다. 우리 아버지는 S대를 나오셨고 큰 아버지, 작은 아버지 모두 S대 출신이셨다. 사촌 오빠도 S대를 갔기 때문에 집안의 모든 사람들이 S대 출신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당연히 S대를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고등학생이 되어 처음으로 받아 본 전국 등수는 초라했고 열심히 공부를 해도 등수는 원하는 만큼 올라가지 않았다. 그때 내가 선택한 길은 도피였다. 어차피 S대를 못 갈바엔 아예 다른 것을 하자는 생각으로 클래식 기타에 빠졌다. 공부는 안 하고 새벽까지 기타만 쳤다. 손가락 끝 피부가 벗겨지고 또 벗겨질 때까지 기타만 치는 내게 엄마, 아빠는 아무런 말씀도 안 하셨다. 사춘기의 반항이라고 생각하고 언젠가는 돌아오겠지 하며 기다리셨다는데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그러실 수 있었던 건지 존경스럽다. 고등학교 2년 내내 기타만 두드리니 성적은 자꾸만 떨어졌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기타를 전공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2년 내내 하루에 서너 시간씩 기타를 쳤더니 어느 날 갑자기 손목에 심한 통증이 느껴졌다. 병원에 갔더니 다른 사람에게는 없는 작은 뼈가 손목에 있어서 손목을 심하게 꺾는 자세를 하면 안 된다고 했다. 기타를 치려면 왼손 손목을 항상 90도 정도로 꺾어야 하는데 손목을 꺾지 말라니, 기타를 치지 못한다는 선고였다. 이런 손목으로는 기타를 전공할 수 없겠다는 생각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고3 일 년 동안 정말 열심히 공부했다. 야간 자율 학습이 끝나고 독서실에 가서 공부하다가 새벽에 들어오는 내가 걱정되셨는지 아빠가 매일 독서실로 데리러 오셨다. 열심히 일 년을 보낸 끝에 S대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부모님이 원하는 대학에 진학했고 신촌에서의 대학생활이 생각보다 재밌어서 즐겁게 학교를 다녔다.

서른다섯 살 정도 된 된 나의 소중한 기타

두 번째 고비는 한참 후에 왔다.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에 진학했고 대학원을 졸업한 후에 연구원으로 취직을 했다. 그러다가 남편을 만났고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키우다 보니 연구원으로는 도저히 살 수가 없었다. 말이 연구원이지 개발직 연구원의 삶은 너무 고단했다. 주 7일 근무에 365일 내내 야근을 해야 했고 아이 얼굴을 볼 시간조차 없었다. 고민 끝에 이직을 결심하고 외국 회사로 이직을 했다. 그런데 직장 생활 십 년 차쯤 되고 나서 내 삶을 돌아보니 너무 외로웠다. 십여 년 동안 집과 회사만 왔다 갔다 하다 보니 내겐 친구가 남아있지 않았다. 학창 시절의 친구들과는 언제 연락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고 육아에 쫓겨 직장에서는 친구를 만들 여유가 없었다. 남편은 친구들과 골프도 치고 여행도 하고 결혼 전과 똑같이 살고 있는데 나만 이렇게 혼자 희생을 강요당하는 것 같아서 억울했다. 그래서 나도 친구를 만들기로 결심했다. 마침 다니던 회사의 미국 본사에 한국 동료들이 있어서 출장을 갈 때마다 연락하고 만나기 시작했다. 타지에서 생활해서 한국 사람이 그리웠던지 내 동료들은 나를 몇 년 된 친구처럼 따듯하게 대해줬다. 우연히도 그중 두 명이 나와 동갑이어서 쉽게 친해진 탓도 있었다. 내 동갑 친구 중 한 명은 남자이고 게이이다. 나의 동성 연애자에 대한 편견은 이 친구 덕분에 일찍 깨졌다. 내 친구는 자신이 동성 연애자인 것을 고등학교 때 알게 되었고 한국에서는 도저히 살 수 없어서 미국에 가서 취업을 하여 정착하게 되었다고 한다. 취향도 비슷하고 이야기가 잘 통해서 우린 쉽게 친해졌다. 자주 만나진 못해도 나의 제일 친한 친구 리스트에 미국에 살고 있는 이 친구들이 자리 잡고 있다. 이 친구들 덕분에 출장이 더 이상 외롭지 않았다. 출장을 가서 업무가 끝나면 만날 친구들이 있기에 출장 가는 것이 즐거워졌다. 그렇게 생긴 친구들이 미국, 싱가포르, 영국, 호주 세계 곳곳에 있다.

세 번째 고비는 아들 사춘기에 왔다. 회사 일로 항상 바빴던 엄마 밑에서 자라서 어린 시절 사랑을 충분히 받지 못한 아이는 사춘기를 심하게 겪었다. 집에 오면 말 한마디 안 했고 공부도 안 하고 머리를 노랗게 염색한 친구들과 같이 다녔다. 다 큰 아들을 때릴 수도 없고 야단을 쳐도 듣지 않길래 요리를 시작했다. 맛있는 음식을 유난히 좋아하는 미식가 아들과 대화를 하기 위해서 프랑스, 스페인, 이태리, 모로코, 그리스 요리 레시피를 찾아서 매주 주말마다 새로운 요리를 해줬다. 매주 새로운 요리를 하는 엄마를 보며 입을 열지 않던 아들이 이것저것 물어보기 시작했다. 이번 주말에는 무슨 나라 요리를 해줄 것인지, 유튜브에서 본 어떤 요리가 먹고 싶다던지 등등 자연스럽게 대화가 시작되었다. 그렇게 아들의 사춘기가 지났고 아들의 고등학교 3년 동안 공부에 지친 아들을 위로하기 위해 계속 요리를 했다. 4~5년 정도 요리를 열심히 했더니 우리 가족은 레스토랑에 가서 먹는 것보다 내가 해주는 요리가 더 맛있다고 했다. 물론 아들과 남편의 평가이니 객관적인 평가는 아니다. 어쨌든 이렇게 나는 남편과 아들에게 인정받는 요리사 엄마가 되었다.

내가 아들에게 해 준 지중해 요리들

그리고 나는 항상 일기를 써왔다. 초등학교 때 학교 숙제로 시작한 일기가 나의 일과가 되었다. 생각이 많았고 상처를 잘 받는 성격 때문에 나를 위로하기 위해 꾸준히 일기를 썼다. 중학교 때부터 보관해 온 일기장들은 나의 소중한 추억이 되었고 회사를 다니면서 괴롭고 힘들 때마다 컴퓨터를 열고 일기를 썼다. 글을 쓰고 나면 생각이 정리되는 듯했고 마음이 훨씬 평온해졌다.


이런 것 글이 쌓여서

나는 기타와 피아노를 치고(물론 십 대 때처럼 펄펄 나는 실력은 아니다.)

지중해 요리를 하고

세상에 편견을 가지지 않으려 노력하며

글을 쓰는 사람이 되었다.


이젠 친구들이 나를 다재다능한 사람이라고 한다.

나를 위로하기 위해 했던 소소한 취미들이 나를 특별하게 만들어주었다.

지나고 보니 그동안의 고뇌의 시간들이 내 인생에 무언가는 남겨준 것 같아서 뿌듯하다.

퇴사까지 남은 6개월도 후회하지 않게 보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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