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몸살

by 아르페지오

시아버님이 돌아가신 이후 집안 일과 회사 일로 정신없이 바빴다. 장례식을 치르고 난 이후에도 처리해야 할 것들이 많았고 이런저런 것들을 마무리하기 위해 정신없이 바빴다. 혼자 계시는 어머님도 챙겨야 했기에 주말에도 쉴 수가 없었다.

장례를 치르기 위해 겨우 4일 휴가를 냈을 뿐인데 마치 한 달 쉬고 돌아온 것처럼 회사에서는 일이 쏟아졌다. 사규를 읽어보니 부모님 상은 2주까지 휴가를 낼 수 있던데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밀린 업무를 빨리빨리 하라며 다그치는 매니저와 팀장을 보며 정말 어떻게 이렇게까지 배려심이 없는지 분노에 치를 떨었다. 차라리 욕을 먹더라도 2주 휴가를 낼 걸 그랬다.


그렇게 49일을 겨우겨우 버텨왔다. 모레가 아버님 49재인데 어제부터 컨디션이 좀 이상하더니 결국 몸살이 났다. 도저히 출근을 할 수 없는 상태라서 휴가를 냈다. 다행히 매니저는 너무 무리한 것 같다며 푹 쉬라고 말했다.


오전 내내 침대에 누워있으니 몸 상태는 한결 나아졌지만 온몸이 쑤시는 듯 아팠다. 남편이 사다 준 죽을 먹고 기운을 좀 차리려고 하는데 영업 팀장에게 전화가 왔다. 분명 아파서 휴가를 낸 것을 알고 있을 텐데 전화를 하는 의도가 궁금했지만 받지 않았다. 몸이 아픈데 전화를 받아서 마음까지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전화를 받지 않았더니 email invitation이 대여섯 개가 한꺼번에 날아왔다. 분기별 리뷰 미팅, xxx 고객사 현황 체크 미팅, xxx 파트너사 미팅 등등 영업 팀장이 보낸 일정으로 내 월요일 일정이 다 차 버리는 것을 보며 거절을 해 버릴까 하다가 그냥 놔두었다. 월요일에 미팅을 하고 싶으면 적어도 2~3일 전에 보내야 하는 것 아닌가, 아파서 누워있는 사람에게 다음 날 미팅을 하자고 이메일 폭격을 보내야 하는 걸까? 그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문득 이 사람도 나 같은 서러움을 당해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사람의 부모님도 언젠가는 돌아가실 텐데 그때 복수해주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러다 갑자기 무서워졌다. '내가 이렇게까지 변해가고 있구나. 회사 생활 때문에 내가 이렇게까지 무섭게 변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에 입사 20주년까지 버티려던 생각이 사라져 버렸다.


버티지 말고 그냥 그만두는 것이 낫지 않을까. 이런 상태로 회사 생활을 몇 개월 더 지속한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나만 더 상처받고 더 힘든 것이 아닐까.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어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 있던 중에 고객사에서 전화가 왔다. 초기 인연부터 꼬였던 악성 고객사였다. 영업 사원 하나가 말도 안 되는 기능을 차후에 제공하겠다는 약속을 하고 제품을 제안했고 고객은 그 말을 믿고 제품을 구매했다. 그런데 막상 프로젝트를 오픈하려고 보니 영업 사원이 했던 약속이 부도 수표임을 알게 되었다. 애초부터 우리 회사 같은 글로벌 회사에서 고객사 하나가 원하는 기능을 개발해 준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분노한 고객사가 지사장에게 이메일을 보냈고 사고를 친 영업 사원은 기술적인 이슈라서 프리세일즈(기술영업)에서 대응해야 한다고 발뺌했다. 없는 기능을 제공하겠다고 한 것이 어떻게 기술적인 이슈로 둔갑할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항상 세일즈 편만 드는 매니저는 나에게 고객사를 던져 버렸다. 고객사에 가서 욕을 있는 대로 다 먹고 팩트대로 이야기를 하고 왔더니 이번에는 영업 팀장이 자신의 직원을 감싸고돌았다. 더 이상 거짓말은 못 하겠다고 했더니 영업 팀장이 고객사와 커뮤니케이션은 본인이 담당하겠다고 했다.

그 이후로 고객사로부터 온 말도 안 되는 질문들이 영업 팀장으로부터 쏟아지기 시작했다. 고객사는 이미 우리 회사 제품을 사용해서 프로젝트를 구축해 놓은 상태라서 되돌릴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우리가 원하는 기능을 구현을 해달라, 이런 기능은 언제까지 제공해 줄 수 있나 등등 말도 안 되는 문의가 쏟아졌다. 영업 팀장은 매번 급하다며 답변을 채근했고 나는 어처구니없는 문의를 본사에 전달했다. 본사의 엔지니어들이 고객의 질문들을 이해하는 데에만 수일이 걸렸고 고객사가 원하는 답변을 받는 데는 일주일 이상 소요되었다. 이렇게 한 달을 질질 끌고 있는데 고객사에서 또 전화가 온 것이다.

평소 같았으면 아파서 휴가를 냈더라도 고객사 전화는 받았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 나는 고객사 전화도 받지 않았다. 내게 이메일을 보낸 영업 팀장이 괘씸해서 고객의 전화까지 받지 않았다.


그런데 평소 하지 않던 행동을 했더니 하루 종일 마음이 불편했다. 급한 것이었으면 어쩌나, 고객사 전화는 받을 걸 그랬다는 후회가 밀려왔다. 그러나 잘했다고 생각하고 나를 위해서 월요일에도 휴가를 내려고 한다.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어서 이제 그만 쉬어야 한다는 것을 알려야 할 것 같다.


도무지 이해를 해 보려 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참 못된 사람들이다.

왜 내 주변에는 이런 사람들밖에 없는지 모르겠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더 이상 열 내고 열받지 말아야 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