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밤늦은 시간에 세일즈 팀장으로부터 내일 오전 9시에 미팅을 할 수 있냐는 이메일을 받을 때부터 찜찜했다. 이 사람은 꼭 이런 식이다. 항상 일요일 밤 10시쯤 이메일을 보내고 월요일이나 화요일까지 제안서를 완성해 달라고 요구한다. 마치 나는 놀고 있어서 그의 요청이 오기만을 기다리는 것처럼 다른 사람의 일정이나 업무 부하는 고려하지 않고 지원 요청을 하면서 기한도 같이 통보한다. 그는 내 매니저가 아니고 그저 같이 일하는 영업 팀의 팀장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나에게 명령을 한다. 그래서 나는 그가 보낸 이메일을 받을 때마다 기분이 상한다.
미팅도 매번 ad-hoc으로 요청한다. 아무리 재택근무 중이지만 다들 일정이 있는데 한 시간 후에 미팅을 하자는 invitation도 불쑥불쑥 보내고 다른 미팅을 하고 있는 중에도 전화를 하기도 한다. (우리 회사는 원격근무를 위해 도입한 소프트웨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동료가 현재 미팅 중인지 확인할 수 있다.) 오늘 오전 미팅도 어젯밤에 갑자기 요청한 것이니 거절했어야 하는데 괜히 수락을 해서 결국 열을 내고 언성을 높이고 말았다.
미팅의 요지는 프리세일즈 팀이 바쁜 것은 알지만 자신이 요청한 것이 중요하니 빨리 해달라는 것이 것이었다. 30분 내내 이번 주와 다음 주에 내가 해야 할 일들에 대해 설명했는데 그런 일들은 우선순위가 낮고 중요하지 않으니 자신이 요청한 일을 먼저 해달라고 주장했다. 결국 나는 너무 화가 나서 언성을 높이고 말았다.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의 우선순위를 왜 세일즈 팀장이 판단해야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소귀에 경 읽기"라더니 30분 내내 설명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자신이 요청한 일을 먼저 해달라니 대체 이미 꽉 차 있는 업무에서 무엇을 빼고 무슨 우선순위를 정하라는 것일까? 주말이나 야근으로 해야 될 일의 우선순위를 정하라는 것인가? 왜 항상 자신이 요청한 일만 중요하고 다 긴급한 것일까? 그리고 나의 상사도 아닌 그가 왜 시도 때도 없이 나에게 명령을 하는 것일까?
서로 맞지 않는 사람과 일을 해야 하는 것은 정말 힘들다. 프리세일즈와 세일즈는 항상 같이 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서로 성향이 맞지 않으면 같이 일하기가 힘들다. 이 사람은 올해 초에 세일즈 팀장으로 승진하였다. 승진한 이후에 의욕이 넘쳐서 모든 사람을 다그치고 다른 팀까지 제어하려는 것이 눈에 보인다. 그러나 그가 나를 제어할 권리는 없다. 나는 엄연히 그와 다른 팀이고 프리 세일즈 팀에서는 세일즈 지원 이외에도 많은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세일즈 지원을 제외한 나의 모든 업무를 무시한다.내가 화를 낸 결정적 이유는 내가 하는 일 중에 본사와 추진하고 있는 국내 솔루션과의 연동 프로젝트가 있는데 그것이 중요하지 않으니 안 해도 된다고 했기 때문이다. 내가 2분기 넘게 장기적으로 추진해 온 일을 무시하고 회사에서 결정한 것을 제 맘대로 폄하하는데 화가 치밀어서 사장님하고 이야기해서 그 프로젝트를 중단시키면 당신이 원하는 제안서를 써주겠다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전화를 끊은 후 나는 한참을 부들부들 떨었다. 나는 남에게 화를 잘 내지 못하고 싫은 것을 싫다고도 잘 말하지 못하는 성격이다. 백화점에서 옷을 사고 마음에 안 들어도 취소해달라고 하는 것이 미안해서 그냥 입을 정도로 소심한 성격이다. 그래서 회사에서의 대부분의 갈등 상황을 피하고 항상 내가 조금 손해 보는 쪽으로 타협하곤 했다. 이런 성격 때문에 이렇게 다른 사람에게 화를 내고 나면 훨씬 더 괴롭다. 화도 내어 본 사람이 낸다고 나 같은 사람은 화를 내고 나서도 속이 시원하지 않다. 괜히 화를 냈다고 후회를 하고 끙끙 앓다가 나 자신을 더 괴롭히곤한다. 그래서 25여 년 간의 회사 생활 내내 언성을 높여본 경우가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힌다. 정말 화가 나는 일이 많았지만 화를 내도 내가 더 힘드니 그저 꾹 참았다. 그런데 어제는 화를 내고 언성을 높였다.
옆에서 지켜보던 남편이 잘했다며 앞으로 퇴직할 때까지는 참지 말고 할 말을 다 하고 살라고 했다.
이제는 화를 내는 연습을 해야겠다.
더 이상 열 내지 않고 열받지 않으려고 이전보다 더 참고 이전보다 더 양보했더니 돌아오는 것은 이런 대접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