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누구도 그 자신의 세계로 뛰어들지 않은 이상, 그 자신의 비현실적인 세계를 마주치지 못하지.
그 누구도 타인이라는 그 경계에서는 한 사람의 비현실이 자기 세계로 전이되지 않지.
초현실적 공간에서 비현실은 실존이 되지. 누군가의 가상공간이 누군가의 현실이 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초현실적 공간은 그저 하나의 공간일 뿐이지 시간은 아니다. 그 자신의 분수령이 되는 테스트 공간. 운명의 특이점이 발아하는 한 점. 하나의 작품이 드러나는 시점. 바닥 에너지가 분기점을 지나는 순간.
'르네 마크리트'적인 초현실적 색채 대비와 '마우리츠 에셔'적인 기하학적 공간 구성에서 오는 초현실적인 게임 공간은 니체적인 운명의 주사위들이 흩뿌려진다. 어릴 적 놀이들은 모두 규칙이 있었다. 규칙이 지켜져야 더 신나게 놀이에 몰입할 수가 있었다. 하지만 운명의 놀이에서 던져진 주사위는 반복됨으로 인해서 일의성을 지난다. 직선을 만드는 것이다.
여기에서 '니체'적 놀이와 한국적인 유년의 놀이들의 차이들이 발견된다. 니체의 놀이는 운명의 주사위이고 유년의 놀이들은 그 놀이의 규칙에서 오는 쾌감이다. 규칙은 그때그때 다시 정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둘의 공통점은 몰입이다. 모두 어린아이적인 순수의 감성 그 자체의 신명에 의한 것이다. 비현실적 세계로 뛰어듦이다.
어른들이 놀이에 몰입하려면, 죽음과 돈이 걸렸을 때이다. 아이들이 놀이에 몰입하려면 삶과 야단을 잊어버렸을 때이다.
지켜보는 자와 게임에 뛰어든 자와의 사이에는 기실 아무 연관 관계가 없다. 개입, 누군가의 개입이 필요하다. 게임은 개입이 있어야만 진행될 수 있다.
세상의 공중에는 임자 없는 돈이 돌아다닌다. 그건 모두가 혹은 누군가들의 움직임에 의해 생겨난 것이다. 그리고 모두 공중에 돌아다니는 돈을 자기에게로 향하도록 발버둥을 친다. 돌아다니는 돈의 방향을 자기에게로 향하도록 사람들의 세계에서는 다양한 발명들이 있었다. 그 발명들 자체가 한 사회를 이루고 구성하는 카르텔로 고착화되기도 한다.
규칙은 임자 없는 돈의 생성에 대한 그 원초적인 공정성을 확보하려는 노력일지도 모른다. 누군가 반칙을 하면 '공중에 떠돈다'라는 그 원초적인 공정성 그 자체가 훼손되니까.
어릴 적 땅바닥에 그림 그려 놀이에 전념하던 그들은 어느새 노인이 되거나 장년이 되었다. 그 시대에 또 세계의 어느 한 편에서는 지켜보는 자의 시선을 가지고 오징어 게임의 관전자들처럼 말을 움직이는 힘들이 있었다.
유년의 놀이가 아트가 되어 실제의 공간으로 입체화되어 현실화된 공간에서도 말을 움직이는 자들은 여전히 존재한다. 돈의 신이 된 모상들의 세계는 초현실적 공간이 아니라 비현실적인 세계를 모티브로 한다.
대비되는 공간들의 구성은 현실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게임하는 자의 세계와 관전자의 세계, 현실과 게임 속의 현실, 어느 곳이 더 비현실적인가. 그린 애로우의 훈련장이던 섬처럼 오징어 게임의 공간도 섬이다. 빠삐용의 섬처럼 그들은 죄수인가, 참가자인가. 자유는 어떻게 생성되는가.
초입 부라서 진지한 흐름과 개연성을 유지하고 있다. 그렇다면 더 진행하겠다는 것일 것이다. 돈을 장악한 주최 측이 관장하는 게임에 참가자인 시뮬라크르들의 기어오름은 하나의 권력의지를 더 확장하게 될 것인가 또는 전복일 것인가는 두고 볼 일이지만, 대체로 역사적으로 보면 확장하는 것에 가깝다고 생각된다. 게임은 그 게임에 걸린 것을 얻으면 그뿐이지만, 운명의 주사위로 접근한다면, 영화적인 세계에서는 감각적인 것이니까 재미에 더 중점이 있을 것이다.
"그 비행기를 그냥 타시오"
돌아서는 주인공은 또다시 주사위를 던진 것인가.
그냥 탔다면? 여기서 인간은 또 한 번의 유혹과 맞닥뜨려야 한다. 게임에 참가하기 전, 극단에 몰리는 주인공들의 상황은 이미 수순대로였기 때문에 참가하지 않을 수 없는 지경에 몰린 것이지만, 이번에는 그대로 비행기 타고 떠나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되돌아선다면, 주인공은 어쨌든 주최 측과 연결되어 있는 하나의 사다리를 붙잡고 있는 셈이다. 게임의 우승과는 별개로 또 다른 미션을 스스로 부여하는 것일 수도 있다. 어쨌든, 다시 새로운 게임이다.
문득, 코로나 시절에, 인간의 관점에서 보면, 감각적인 부분들이 가장 타격을 받았다고 여긴다. 인간이 즐기는 측면에서 보자면 그렇다. 그렇다면 인간이 즐기는 것의 강도와 깊이를 더 파고들면 어떨까.
그것은 바로 연결적 사고일 것이나 그 연결의 난이도에 있어서 질적인 향상이 필요했을 것이다. 오징어 게임은 인간의 생각을 비교적 매끄럽게 연결하였다고 여긴다. 디테일에 신경 쓴 것이다.
현진건의 단편 소설 '운수 좋은 날'의 제목과 같은 부제에서 어떤 불안함이 내 가슴에서 미세하게 파르르 떨며 지나간다. 소설의 결말이 복선의 역할을 할 것이라는 예감 때문일 것이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라는 것을 증명하듯이 또 하나의 '운수 좋은 날'이던 경마장에서와는 다르게, 그러나 마치 자리 바꾸듯이 맞바꿈이 일어난다. 비극이 주는 어떤 것들의 울림들은 그때 종소리가 땡그렁 땡그렁 요동치듯이 퍼지게 된다. 아무도 모르고, 주인공만 아는 세계에 대한 침묵을 관객도 한동안 함께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