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can only be understood; backwards, but it must be lived forwards. -키에르케고르-
" 삶은 이해될 수 있을 뿐이다. 거꾸로 살아야 하지만 앞으로 나아가며 살아야 한다. "
삶은 이해될 수 있을 뿐이다. 삶은 반동의 힘에 의하여 뒤로 후퇴하지만, 삶은 앞으로 나아간다 : 삶은 과거의 축적에 의해서 시간이 느려진다. 그 느려진 시간만큼 과거의 크기는 크다. 그것은 크기를 가진 어떤 것이다. 그 크기를 가진 어떤 것을 해결할 때, 사람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러니 반동은 필연이며 완벽하게 해결할 수도 없다. 나머지는 필수불가결로 생겨난다. 그 나머지는 그 자체의 완결로써 새로운 형태로 되돌아올 것이다. 하여 그 자신이 꿈꾸는 미래는 언제나 모호하다. 그 자신이 가지고 온 것과 나머지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두 개인 곡선은 나선형을 이루며 회전한다. 알고 있는 것과 모르고 있는 것의 회전이 운명이 아닐까.
많은 철학자들과 시인들은 그들끼리 이심전심으로 통용되는 언어로 말을 하고 있다. 어쩌면 우리가 그들의 말을 알아듣고서 말한다 해도 그렇게 말할 수밖에는 없을지도 모른다. 그건 언어가 아니라 신체이기 때문일 것이다. 즉 감정이기 때문이다. 느낌에 대한 표현은 감성의 강요에 의해 지성이 답을 내놓는다. 철학자들과 시인들의 언어는 바로 그렇게 해서 세상에 나온 것이고 보면, 어쩌면 이 언어들 자체가 시간에 대한 표현인지도 모른다. 삶을 이야기하고 인간을 이야기하지만, 오히려 여기서 삶도 인간도 모두 은유적 표현이 될 뿐이다. 삶과 인간은 시간에 대한 은유적 표현이다. 자연은 시간에 대한 공간적 은유일 것이다. 은유로서 세상에 드러난 것은 모두 시간이다. 그러므로 나머지는 바로 나머지 시간 즉 우리가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시간이다. 두 개의 평행선은 바로 시간의 작용일 것이다. 따라서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모두 시간이다. 그 시간이 바로 우리 자신의 삶인 것이다. 이러한 표현을 어떻게 딱 부러지게 설명하거나 시로 표현이 되겠는가. 시적 표현이나 아포리즘 또는 어떤 철학적 문구는 모두 메커니즘을 가리키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바로 과학의 언어이다. 그러므로 시간은 과학으로 규명되어야 하지만, 우리는 철학적으로 시적으로 삶의 언어로만 표현할 수 있다. 우리는 수학자도 과학자도 아니지만 그것을 이해할 수는 있다. 우리 자신도 시간을 느끼고 그것 안에서 살며 체험하기 때문이다. 시간은 언제나 다의적이며 동일하지 않다. 그러나 사건은 크기가 어느 정도 확보되고 독립적이어야 한다. 그럴 때 사건은 두 개의 나선 곡선을 형성하여 복제를 하게 된다. 물론 이 과정이 우리 눈에 보이지는 않는다. 시간은 입자이기 때문이다.
두 개의 축
인생은 과거로부터만 이해될 수 있는 것이지만, 인생은 또한 미래로 나아가며 사는 것이다.
키에르케고르의 문장을 통하여 나만의 생각을 밀어붙여 보았다. 문장의 의미를 부각하려면 개념이 담겨야 하므로 명사형으로 이리 다시 써 보았다.
인생은 과거를 복기할 때 이해(수긍)가 될 수 있는 것이고, 동시에 인생이 미래를 직시할 때 현재를 긍정하게 된다.
생을 긍정하는 문장을 통하여 이 문장이 의미하는 바를 좀 더 나만의 방식으로 풀어 보았다. 과거를 통로로 하여 미래로 나아가는 인간의 모습은 어떤 형태인 것일까? 여기에는 두 개의 시간축이 현재에서 만나면서 하나의 방향성을 만들어 낸다.
미래를 생각하며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자기 자신의 욕망과 탐욕을 위해서 현실을 희생하며 산다는 의미일까? 그렇다면 그건 너무 진부해서 굳이 문장으로 만들어질 필요도 없는 것일 테니까, 그것은 아닐 것이다.
각자가 짐작하는 것, 그러나 그다지 썩 내키지는 않아서 구태여 입 밖으로 꺼내고 싶지는 않은 것, 안에서의 자기의 의지를 막아서는 듯한 것에 막혀서 밖으로 표출되지 못한 것, 바로 그것일 것이다.
미래를 산다는 것은 현재에서 자기 자존심을 지키며 사는 일이다. 자존심이란 무엇일까? 사람은 지속성에서 그 사람의 존재방식이 드러낸다. 그러므로 자존심은 그 사람의 존재방식을 의미하는 것일 것이다.
존재방식은 일의성을 따라가려고 한다. 왜 그러는 것일까? 끊어짐에서 오는 고립은 그 자신에게 환멸과 권태, 부조리를 느끼게 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혼자 사는 것이 아니다. 세대와 세대가 중첩되어 산다. 미래의 자기가 현재에서 보다 또는 현재의 자기를 유지하고 사려면, 미래세대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는 말이다. 미래세대는 그 자신에게 시간의 역할을 한다.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자기 안에도 과거의 자기와 미래의 자기가 공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무엇일까? 그 자신이 과거를 복기할 때, 현재의 자기가 과거의 자신에게 어떤 메시지를 수신하여 놓았다면, 바로 지금 그 메시지를 받게 된다. 그리고 과거의 자신이 미래를 긍정하여 보낸 메시지는 바로 지금 이 순간에 도달하여 있다.
그 수신의 결과는 과거의 자신이 현재보다 더 못할 것이 없었다는 데 있다. 언제나 매 순간의 현존재는 미래로부터 어떤 메시지를 원하는 데, 그 메시지는 매 순간 미래로부터 긍정된다. 그러므로 현재에 과거로부터 전달된 메시지는 현재의 존재를 넘어서고 있다.
과거로부터의 메시지를 통하여 현존재가 자신의 과거의 존재를 추적할 때, 그 존재는 위대하다. 지금 바로 이 순간에 만약 그 어느 때의 과거의 자신에게 메시지를 보낸다고 하더라도, 사실 보낼 메시지는 없다. 왜냐하면 현존재가 바로 지금 느끼는 것은 경이로움이기 때문이다. 그보다 더 잘할 수는 없고, 그보다 더 나은 실존적 메시지는 생성될 수 없기 때문이다.
보라! 과거의 자신이 살아온 시간의 흔적들마다 위대한 여정이 숨겨져 있다. 지금의 그 자신이 과거로 되돌아간다 해도 그보다 더 잘 해낼 수는 없다. 모든 현존재는 과거보다 노쇠하다. 그때의 그 순간의 그 자신들은 언제나 현존재보다 젊다. 그 존재의 여정이 어떠하던지 간에 현존재보다 더 그 시간을 견뎌낼 존재는 그때의 그 존재밖에 없다. 아무리 현재에서 과거로 바로 지금 메시지를 보낸다고 해도 그 시간에 맞는 적절한 문구는 없다. 그 경이로움에 대한 찬사 외에는 별다른 말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과거로부터 전달된 메시지는 현재에서 오히려 수신된다.
현존재는 미래로부터 어떤 메시지를 받기를 원하지만, 정작 메시지는 언제나 과거로부터 어느 순간에 받게 된다. 바로 그때, 그 메시지를 수신할 수 있다면 일의성은 그 순간 발견 된다. 지속성으로 연결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기와 자기의 연결성은 그 자신에게 바로 미래를 긍정하게 만든다. 에너지가 생기기 때문이다.
사람이 가장 강하게 의식하는 것은 시간이다. 시간에 대한 의식만이 인간을 억압할 수 있다. 이 억압에 의해 사람은 이끌리듯이 움직이게 된다.
시간을 의식하는 것에서 사람은 그 자신의 변화를 추동할 수 있다. 시간이 흐르면 어떠한 형태라도 균형은 깨지기 마련이다.
예컨대 어느 한 특정 분야가 있다고 친다면, 더 깊게 들어가야 하는 순간이 찾아온다. 그 시간에서 미래를 보는 훈련이 필요하다. 깊은 것은 중첩을 경험하게 한다. 중첩은 연결성을 보게 한다. 중첩이 어느 순간 풀리면 사람은 그 사이에 대해 감각할 수 있다. 비어 있는 공간성을 인식하게 된다.
공간성이 인식되면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게 된다. 연결할 그 무엇인가가 보이기 때문이다. 미래세대에게 줄 것이 있어야 한다. 미래세대는 받는 것이 있어야 당연하게 받아야 할 세대에게 우호적이 된다.
그 자신에게도 마찬가지다. 가장 젊은 자신인 자신의 과거가 지나온 시간과 가장 노쇠한 현재의 자신이 가장 젊은 시간에게로 기투하는 순간은 언제나 지금이다.
시간에서 인간은 언제나 가장 젊은 순간을 지나가고 있다. 반면에 자기 시간에서 가장 노쇠한 육신을 가지고 있다. 시간은 가장 젊은 시간으로 향하고 육신은 노쇠하였다.
인간에게 미래는 언제나 젊다. 그것은 그 자신의 기억 속에 각인된 그 모습과 같다. 그러므로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이다. 그 자신 안에서도 과거로부터 이어진 그 자신에게 현재에서 과거로 전달할 메시지는 없고, 오직 과거로부터, 젊은 자신으로부터 온 메시지만 수신하게 된다.
세상이 변하고 균형점은 이동하고 어느 순간 무게중심은 바뀐다. 그때 그 자신이 의식했던 미래와 그 자신의 밸런스가 깨지지 않도록 인간은 현재에서 과거로부터의 메시지를 수신받은 후 미래를 긍정하는 것이다.
미래는 언제나 지금보다 젊다. 다만 인간 자신만이 늙었을 뿐이다. 그러니 미래는 자기 자신보다 언제나 젊다. 지금보다 더 새로운 세대가 밀려오기 때문이다. 인간 자신 안에서는 역추적이고, 인간 자신 밖에서는 역설이다. 이로써 우리는 방향성을 판단할 수 있다. 역으로 가는 것, 시간이 흐른다고 여기니 나이를 먹어 가는 쪽으로 미래가 긍정되고 있다고 착시를 일으키지만, 미래는 언제나 그 반대다. 미래는 자신의 나이와 반대를 보아야 미래가 보인다. 그것이 바로 미래세대와 자신과 교감하는 길이다.
뒷 너울이 앞 너울을 밀어내듯이. 인간이 늘 이 의식을 염두에 둘 때, 현재의 자기로부터 미래를 보게 된다. 교육은 이럴 때 가치가 생겨난다. 그러니 나이가 들수록 하심 하는 것이다. 깊어지는 것이다.
인간이 이때 할 수 있는 것의 가장 기본은 태도이다. 삶에 임하는 태도. 그 자신이 자신의 삶과 타인의 삶에 임하는 태도, 관계적 관계의 웜홀을 연결하는 것. 그것이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 자신에게도.
그 자신이 현재를 유지하고 또한 도약하는 것은 그 자신의 퀄리티를 유지하며 살아가는 길이기도 하다.
인간이 미래를 의식하며 사는 일은 자기 때문이 아니다.
존재방식이 계속 연결된다는 것은 자존심대로 살고 있는 것이다. 거기에서 그 자신의 퀄리티(질. 특성. 품질. 소양. 재능. 특질)가 생성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