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신체사유

전환이 삶을 만든다

다경이 보낸 한 장의 사진과 되돌아온 시간

by 아란도


문득, 때로는 어떤 생각을 한다. '나'가 '너'에게 고통을 느껴 본 적이 없는 사람을 "나"가 끝까지 사랑할 수 있을 것인가. 사람이 끝까지 간다는 것은 나에게 고통을 준 사람들에 의해서이지 않을까. 이쯤에서 보자면, 사람들은 '고통'을 조금은 다르게 해석하는 것 같다. 고통은 '사랑' 그 자체에서 비롯된 것일 테니 말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초극'이기도 할 것이다. 쉽게 말하면 다시 돌고 돌아서 '내 집 마당에 핀 매화'를 본 그 느낌처럼, 영혼이 표백된 상태라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자기에게 해코지 하는 사람(또는 것)도 고통은 고통이지만, 그것은 넘어서는 것이 아니라 '적'이라고 규정해야 하는 문제일 것이다. 그 적을 '고통'이라고 여긴다면 크게 잘못된 생각이다. 그것은 '적'이지 고통이 아니다. 잘라내야 할 '종기'인 것이다. 다 썩을 수는 없으니까 말이다. 사과나 귤이 한 개만 썩어도 전부 번지듯이.


고통은 내가 마음에 담았기 때문에 고통스러운 것이다. 그러니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날까'를 생각하게 되는 것이며, 그것은 인생의 회전에서 그 자신이 무엇을 극기했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사랑하기에 견디는 것, 그것이 '고통'이다.


자기 자신을 연마하는 것은 다시 만났을 때, 기쁨이 되고자 하는 그 열망! 그것이 모든 인간의 열망 아니겠는가!


라이브 하는 것에는 이유가 있다.


어디에서도 당신에게 이런 것을 들려줄 사람은 없다.


기분이 몹시 볼쾌하다면 당신은 바로 그것을 결여하고 있다. 그러니 바로 그 부분을 당신은 파헤치고 들어가야 한다.


이것은 어제의 나의 즉흥적인 감정이자 생각이다. 괜히 아래 글을 쓰기 전에 사족으로 붙여 본 것이다.


그럼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겠다.


#플래시_몹_낭독회는_우리가_거의_이십여년이란_시간을_뒤로_하고_새롭게_만나서_형성된_것이다


* 독일에서 '다경이 올린 한 장의 사진'은 내가 오늘 우리의 미션을 수행하면서, 우리 집에서 소래 포구까지 걸으면서, 그리고 다시 되돌아오면서의 생각을 '다시' 살핀 후에 이미 쓴 글을 다시 부분적으로 수정한 글임을 밝힌다. 지금 이 시각, 왠지 눈물이 나오는 것도 숨기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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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진이 많은 얘기를 품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휘발될까 싶어서 여기에 올린다.


니체 시대와 그 당시의 우리의 조선 상황(어쩌면 내가 차문화를 접하고서 그때 느꼈던 어떤 막막함에서 이런 감정은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현재


그 사이에 있었던___________ 무수한 사건들


격세지감...


그리고 다경이 독일에서___________ 살아온 시간


그리고 현재


그리고 연수가____________ 살아온 시간


그리고 현재


그리고 미류가____________ 살아온 시간


그리고 현재


그리고 플로라가____________ 살아온 시간


그리고 현재


그리고 내가_____________ 살아온 시간


그리고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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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 보면, 우리(우리나라 포함/ 그 안에 포함된 모든 이들)에게 필요했던 것은

바로 '격세유전'적인 그런 것들만이 우리를 추동했어야만 하고 어떤 변화를 가능하도록 추동했던 시간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참으로 지난한 시간의 기억을 우리는 깊이 껴안고 살아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 시간의 중첩 그 자체가 주는 고통이 있다. 이것은 시간에 대해 이해하는 사람은 공통적으로 알 수 있는 감정일 것이다. 시간은 그 자체로 '상실'이기 때문이다.


그 상실을 떨구고 다시 상실에서 피어난 것들에 의해 가볍게 비상해야 하는 시간을 만들어 가는 우리가, 서로에게 현재 낯설지 않다고 과연 말할 수 있겠는가? 서로의 그 켜켜이 쌓인 시간을 우리는 모르는 데 말이다. "당신은 무엇을 알고 있다고 과연 말할 수 있는가?"


*이것은 웩스쿨이 말한 '움벨트 Umwelt'적인 상황에 해당될 것이다. 에스더 하딩은 '움벨트'를 물리적 환경뿐만 아니라 인간의 심리적 환경에도 해당된다고 하였다. 그 각각이 가진 세계는 닫힌 세계이고 그 세계는 쉽사리 들어갈 수도 볼 수도 없는 세계이다. 다만 그 자신의 초극에 의해 바깥과 연결될 수 있을 뿐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그러므로 '모른다' 이것이야말로 우리에게 새로운 경각심과 적정 거리의 '예의'를 차리는 인간으로 거듭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새롭게 신선하게 만나기가 가능했던 것은 '바로 지금'이었기에 가능했던 거라는 것을 나는 의심하지 않는다. '만남'에는 누구나 다 때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 자신에게 중요하게 여기며, 서로 접근하며 만나는 이들이 몇이나 되겠는가, 당신은 '누구'에게 그러고 싶은가? 이것이야말로 우리 모두에게 던져진 질문 아닐까?


책 한 권 읽은 시간들이 이 모든 것을 다 품을 수 있다니! 정말 놀라운 일이다. *이런 생각들이 일시에 한 번에 온 생각이고, 그리고 그 생각을 간추리고 표현하는 것은 다만 시간이 걸린다. 그러다 보면 이런 느낌을 확인해 보기 위해 검색하면 어김없이 그런 책들이 나오고 누군가는 그것을 소개해 놓고 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그러니 또 읽고 싶은 책은 늘어간다. 그러나 일단은 '인용'하는 선에서 만족해야 한다.


어떤 그 자신들의 에너지가 만나서 꿈틀거리며 연결되며 용솟음치는 경험들만이 그 자신의 어떤 미래를 연다. 그것이야말로 바로 패러다임적 전환이기에 그러하다.


이 전환이 삶을 만든다.




* 사진 설명 : 니체의 책이 번역되어 다시 독일로 가서 다경에 의해 사진 찍히니, 이런 감성의 어떤 충동을 느끼게 한다. 니체가 말한 '충동'은 바로 이와 같은 감정 형태일 것이다.

독일에서 사는 다경에게 책 보내는 일을 맡아준 나유타가 정말 큰일 했다고 생각한다. 뭔가... 이렇게 서로 하나의 동그라미가 그려진 후 한 초점으로 모아지자, 저 사진이 나타나게 된 것이니, 이것 역시 '기적' 아니겠는지! 저 사진이 찍히도록 얼마나 많은 이들이 미리 준비하고 있었던가!


니체가 그 시대에서 그 자신의 고통을 극복하며 쓰고... 번역자가 니체를 공부하고 독일어를 배우고... 책세상이 출간하고... 미리 철학공부를 한 이들이 준비되고... 철학을 말하고 이야기할 토대를 닦은 이들이 형성되고... 그리고 우리가 다시 철학에 관심 갖고... 모임이 만들어지고... 책을 읽고... 나유타가 독일에서 사는 다경에게 책 택배로 보내고... 다경이 책을 받아서... 문득 그 자신의 감성으로 사진 찍고... 그 사진이 다시 우리 모임방에 올라오고..../


이 일련의 과정은 엄청난 '대사건 événement'과 같은 것. 이것을 '사건적 시각(발생적 시각)'으로 바라보아야만 우리가 니체를 어느 정도 이해해 갈 수 있는 것. 그 안에 각자의 생에 얼마나 많은 이야기들이 숨어 있는지는, 이렇게 대략적인 역사 형태에서는 결코 알 수 없다는 것. 거시적인 세계와 미시세계의 충돌은 '사건'적이다.


하지만 *분자생물학에서 볼 때는 '검사 되는 물체는 거시적이어야 한다고 한다. 센티미터 단위로 잴 수 있는 정도의 크기여야 한다고'. 이렇게 볼 때 역사와 개인에서 보자면 개인은 미시적인 세계이지만, 거시 세계를 측정하는 단위로 보자면, 개인 역시 하나의 거시 세계라고 볼 수 있을 듯하다. *이 역시 읽고 싶은 중에 하나일 뿐, 현재는 여기서 자족한다.


하나의 일이 완성되기까지는 처음에는 더디고 긴 시간이 걸리지만, 점차로 그 시간의 간격이 단축된다는 것. 자연사도 인류사도 마찬가지 과정을 거쳤다는 것. 앞으로는 더 동시대적인 상황이 순간적으로 진행될지도. 그러나 그럼에도 어떤 것들은 일정 궤도에 오르면, 그 속도를 유지하듯이, 일정한 그 시간의 범위를 넘어서지는 않는다는 것, 바로 그것이 안정화 상태인 듯. 아마도!


* 토마스 쿤은 패러다임의 혁명을 말하였는데, 이 상태에 도달하면 무너지지 않는 패러다임 상태가 되는가? 아니면 그때가 또 다른 혁명의 상태 즉 도약으로 새로운 패러다임 상태로 전환의 시점이 되는가? 는 불분명하지만, 모든 다수가 혁명을 원할 때는 오히려 뒤집을 만큼 '두꺼운 판'이 형성되지 않고, 기존 시스템에 충실한 채로 판을 키우는 사람들의 형태가 혁명의 싹을 키우게 된다고 한다.

이 내용을 살펴보면, 니체의 <선악의 저편>을 회 돌고 있는 문장들의 사이에서 느껴지는 어떤 예지를 함축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많은 설명들 사이로 휘도는 것들이 한 줄에 꿰어져야 하는 데, 아직 그러지를 못하고 있어서, 이렇게 이 글을 쓰면서 이런 생각들을 대입하여 보는 것이다. 나는 공부 중이다. *토마스 쿤의 말은 유튜브에서 귀동냥했다. 또 읽어야 할 책이 늘어나지만, 지금은 이렇게 만족한다.


#한 장의 사진은 많은 이야기를 함축하고 있다


#한 장의 사진은 우리가 만날 시간을 예비하고 있다


#만남이기다려진다는 것은 얼마나 설레는 일인가


#이런 말이 있다_사찰에서 발우공양할때이음식이자기에게 오는 과정을 상기하며_그 인연의 실타래를 상기하며_공양을 시작한다


#이런 말이 있다_한잔의 차를 마실 때_이 한 잎의 찻잎에 의해 차가 만들어져_내 앞에 오기까지의 수고스러움을_상기하며 한잔의 차를 마신다


#모두_어느_시작의_시점을_상기하며_자기와 의_상관관계를_알아차리는 일들_바로_그것이야말로_격세유전적_사고_아니겠는가_정신의 유전




#난_글쓰기로_지금_공부하는_것임 #니체_선악의 저편 #야콘폰웩스쿨_움벨트 Umwelt #에스더하딩_움벨트이론 #대사건événement_발생적 #토마스쿤_과학혁명의 구조_패러다임과 혁명


*차 한잔 마시듯이, 밥을 먹을 때처럼, 사진에 의미 부여, 그 연결고리들을 상기하며..., 비록 그럴 의도가 없었다고 하더라도,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자, 과연 다들 그럴 의도가 없었겠는가? 니체가, 번역가가, 출판사가, 철학자가, 철학을 공부하는 이들이, 또는 철학을 만드는 이들이, 그리고 우리가 철학 책을 읽으면서, 과연 어떤 의도가 없겠는가...? 그건 힘에의 의지가 없다는 말과도 같은데, 그것은 분명 아닐 것이다. 모두 어떤 연결을 원하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나는 바로 그것을 말하고자 함이다. 그리고 공부 중이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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