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력마귀는 무엇일까?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다시 읽으면서 '중력의 정령' 편을 읽다가, 지난 글을 찾아보게 되었다. 2021년에 썼던 이 글은 '기오 브란데스'가 쓴 <니체, 급진적 귀족주의>를 읽은 후 썼다.
차라투스트라에는' 중력 정령'으로 되어 있고, 더 오래된 번역본은 '중력 악령'이라고 번역되어 있었다. 낭독회에서 서로 읽고 있는 책을 비교해 본 것이다.
중력이 있어서 그 힘에 맞게 우리는 존재하고 살아가지만, 이 중력의 파생이 인간의 정신에 파고들어 뿌리를 박으면 인간의 삶은 낙타가 온갖 무거운 짐을 지듯이, 차라투스트라가 난쟁이를 업고 산정에 오르듯이, 중력마귀의 노예가 된다. 시시포스가 무거운 바위를 끊임없이 산 정상까지 밀어 올리는 행위를 무한 반복하고 있는 것처럼.
'차라투스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을 그 당시에 나는 중력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니체가 차라투스트라에서 '중력의 정령'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그 후에 기오 브란테의 책에서는 '중력마귀'라고 써 놓았다. 중력마귀라는 표현이 나는 더 재밌는 표현이라고 생각되었고 느낌 전달도 더 탁월하다고 생각되었다. 아마도 기오 브란테는 니체가 중력마귀라고 표현했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쓴 것일까? 단지 번역의 차이일 뿐일까?
사람이 그 중력을 느낄 때는 몸도 마음도 무겁다. 그리고 그 자신을 짓누르는 중력의 무게에서 벗어나려 몸부림치는 것인지도 모른다. 지금은 어떤가? 그때에 비해서 가벼워졌음을 느낀다. 나는 2017년 그때의 나의, 내 생의 역할을 피하지 않고 충실하게 도맡아서 실행해 준 그때의 나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내 생에서 보자면 너무나도 무거운 짐을 지워준 셈이 되었다. 그때의 내가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은 후에 글을 남기지 않았다면, 지금의 나는 비교해 볼 근거를 상실한 셈이 된다. 그래서 그때의 나에게 지금의 나는 감사함을 표하는 것이다.
맨 아래에 링크한 세 개의 글은 2017년 1월에 쓴 글들이다. 미루다가 오늘에야 링크를 정리해서 올려본다. 이리 따지고 보면, 시간은 되돌아오는 게 맞는 것인지도.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생성의 거대한 해年'가 되돌아온다(p.364)'라고 말하고 있다. 매년 오는 거대한 '해年'는 말하자면 '크로노스의 시간'에 속한다. "이들 해年 하나하나는 더없이 큰 것에서나 더없이 작은 것에서나 같고, 우리 또한 거대한 해年
를 맞이할 때마다 더없이 큰 것에서나 더없이 작은 것에서 같다는 것이지." 나는 이 지점에서 생각해 보아야 할 것들이 있다고 생각한다. 해年 앞에서는 모두가 동등하다는 느낌도 준다. 또한 각 해年들은 구별 없이 그 각각의 시간에서 보자면, 대등하다는 의미도 될 것이다. 매년마다 구분된 해는 하나의 시간 단위이기도 하다. 그 시간에 대해서 니체는 균등하다는 의미로 말한 것일까.
니체가 중력에 '마귀'라는 말을 붙여 놓은 것을 생각하니, 순간 웃음이 나왔다. 근데 그 웃음은 '내가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야'라는 자조적인 웃음이기도 하였다.
우리는 살다 보면 얼마나 많은 중력마귀적인 상황에 놓일 때가 많던가. 멀리 가지 않아도 매 순간이 중력마귀적인 상황인지도 모르겠다.
그럴 때 나는 가장 먼 곳을 생각한다. 예시도 그러하다. 지구에서 우주선을 쏘아 올린 바로 그 상황이 떠오르는 것이다. 인간이 자기 중력을 떨치고 솟구치는 것, 바로 그런 초월적인 상황이 연상되는 것이다.
중력을 벗어나는 로켓이란 추진체를 계발해 낸 인간의 기술은 중력이란 존재를 몰랐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대기를 벗어난다는 것은 곧 인간 자신에게는 죽음이겠으나 그 열기를 이겨낼 우주선이라는 갑옷이 있다면 가능하다.
우주로 나가서 무엇을 하겠다는 목적성은 그 이후에 대해서를 상정하게 한다. 그러나 목적성은 우주로 나갔다는 그것에서 이미 이루어졌다. 그리고 다시 무목적성이다. 목적을 이룬 목적성은 금세 허무해진다. 그 이후에 대한 계획이 없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 짙은 허무를 딛고 인간은 다시 우주로 나가려고 한다. 또 다른 목적의식을 가졌기 때문일 것이다. 다만 그것이 지구 안에서의 우위를 점하기 위해서일지도 모르는 피상적인 행위일지라도 말이다. 하지만 피상적인 것은 늘 불가능성을 향한 도전 역시 포함하고 있다. 그러니까 피상적인 것에 어떤 무엇인가를 가려 놓은 것이다. 거창하게 말하기는 다소 아직은 무리인 어떤 것. 겸연쩍어 지구 안에서의 우위를 점하려는 것이라는 알아듣기 좋은 말로 포장해 놓는 것. 그런데 모든 노력은 그 이면을 향하고 있다. 그 자신이 도달하지 못할지도 모르는 어떤 세계를 향하고 있다는 것. 세상에서는 아직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는 것을 살짝 숨겨 놓고 세상이 원하는 것으로 포장해 내는 것. 어찌 보면 무모한 바로 그런 것.
중력마귀는 바로 그런 무모한 꿈들을 땅으로 끌어내리는 불가사의한 인간 내면에서의 공모체들이다. 이 내면 공모체는 밖으로 투사되어 도덕이나 어떤 사회의 억압적인 표상이 된다. 니체는 그것에 대해 마귀를 붙여 중력마귀라 칭하였다고 생각된다.
사람은 누구나 중력마귀 상황에 놓여 있다. 반면에 그 중력마귀적인 상황을 뚫고 인간은 또 무거운 한 걸음을 내디딘다. 한 물체에 대해서 지구와 다른 값의 중력을 갖는 달에서는 일부러 지구와 같은 무게를 부여해야 걸을 수 있을 것이다. 걷고 뛰고 달리고 날고 솟구쳐 오르고 등등의 움직임은 모두 중력과 공모하거나 혹은 중력을 벗어나려는 행위이다.
중력이 있어서 모든 만물은 각각의 그 자체의 움직임과 형태를 유지하지만, 중력마귀적인 것에서는 움직임이 무력해진다. 사람은 무력해지는 것과 맞설 때 비로소 강해진다. 사회도 무력해지는 사회는 그 사회의 중력마귀적인 상황과 맞서서 극복할 때 유력한 움직임이 생겨난다.
니체가 중력마귀를 상정하였을 때의 심정적 측면은 어느 한 가지라기보다는 복합적 측면에서 상정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니체에게서 어느 특정한 상황에서 발견된 중력마귀적인 것은, 그 구조가 복제되어 다방면에 걸쳐 지기에 현실에서 구조화되고 고착화된다는 것이므로, 그러한 상황에 적용하여 보면 중력마귀적인 상황은 곧 현실의 문제임을 알 수 있다. 니체는 현실을 중력마귀로써 비판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현실에 대한 비판은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또한 오히려 그러하므로 니체는 미래를 예시적으로 끌어온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한편으론 인간 내면의 중력마귀적인 상황을 벗어나서 중력 자체만을 놓고 본다면, 중력을 모든 것을 붙잡고 있는 한 점이다. 타원의 힘이 전방위적으로 동일하게 서로를 향하여 안으로 밀고 있는 것에서 중력은 발생되는 것일 것이다.
1. 차라투스트라 3부/ 곡두와 수수께끼에 대하여 1 <심연>
* (첨언) 생을 들여다보면 고뇌까지도 들여다보게 된다. 그 고뇌 안에 있는 것 모두가 중력이다. 그 중력의 무게만큼의 크기를 보게 되는 것. 그 중력의 무게를 가늠할 때 그만큼 사람은 솟구쳐 오를 수 있다. 작용과 반작용에 의하여 그 중력을 자기 동력으로 취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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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차라투스트라 3부/ 곡두와 수수께끼에 대하여 2 <산정> *(첨언) 시간에 대한 설명과 이해는 좀 더 생각해 보아야 한다. "시간은 얼어붙은 강이다"라고 누가 말해 놓았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시간은 흐르는 게 아니라, 있는 시간 안에 존재가 그냥 지나가는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 저 아래에서는 모든 이야기가 무익하다! 거기에서는 잊는 것과 그냥 지나가는 것이 최선의 지혜다."라고 '귀향(p.305)'편에서 말했다. 여기에 대입해 보면, 시간에서 어느 시간 대에 우리가 투입되고 싶어 하는지는 자명하다. 그것이 미래다. 사람은 현재에서 미래로 기투하는 존재다. 그러므로 나아갈 수만 있는 것이고 나아가는 것만으로서 선택지가 있게 된다. 그것 외에 다른 방법은 본질적으로 차단되어 있다. 제 자리에만 있는 것은 굳어 있는 것이다.
사람은 어찌 되었든지 그 자신의 '활동'에서 생성을 일으킨다. 그 활동만이 현재의 자기다. 그리고 그 활동이 현재에서, 현재를 구성하는 '순간'이 그 순간 과거와 미래를 분할한다. 그리고 그 분할이 원인의 매듭이 된다. 시간의 이런 분할/압축/펌핑 메커니즘에 의해 존재는 매 순간 생성되며, 그 자신을 유지한다. 이것에게는 죽음이란 없다. 시간은 죽지 않는다. 그러므로 순간이 곧 영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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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차라투스트라 3부/ 곡두와 수수께끼에 대하여 3 <수수께끼 - 자기에게로>
*(첨언) 3편은 책 차라투스라 전체를 아울러서 정리를 해보려 했던 것 같다. 약간은 더 생각해봐야 하는 부분도 보이지만, 전체적으로 보자면 이보다 더 나을 수 있게 정리할지는 미지수라서, 링크로 대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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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플래시몹_낭독_21회 알림 콜라주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