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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란도 May 09. 2024

철학자와 국가

니체낭독/반시대적 고찰 3부 8장 편집하여 옮긴 전문

#니체낭독_플레시몹낭독회_시즌4

#반시대적고찰_8장_자체편집하여_옮겨쓴_전문_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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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시대적 고찰 마지막 단락을 읽었다. 한 달 방학을 마치고 다시 모이는 풍경이 좋았다. 두 분은 페북을 안 하는 관계로, 낭독공지를 페북 그롭방에 올리고 단톡방에도 올린다. 니체 낭독은 처음에 하던 방식 그대로 공지 형태를 계속 유지하고 있다. 이번은 낭독 시즌 4를 맞았고 68회였다. 이러한 낭독 회차가 곧 우리가 보낸 시간의 축적이기 때문이다. 이미 낭독 공지가 다 입력이 되어 있기 때문에 사진 공지는 형식상이면서도 감상용이다. 사진의 느낌이 더 돌출되고 공지 내용은 그 느낌을 장식한다. 이러한 과정을 거친 이유는 낭독회에 임하는 마음과 심리와 신체를 고양시키는 과정이다. 아무런 정신적 준비 없이 낭독에 임하는 것보다는 훨씬 그 자신에게도 그룹에도 낭독에 집중하여 들어갈 수 있는 토대가 되어 준다. 어떤 모임이 형식을 유지하고 지속하는 것은 모두 이러한 신체적 준비에 도움을 준다. 서로 meet  줌에서 만나서 웃는 얼굴로 인사를 나누고 안부를 묻고 낭독회로 빠져드는 순간은 엔돌핀적 희열을 발산하게 된다. 그 자신 안이 잘 정돈될수록 이러한 순간은 그 자신에게 기쁨을 준다.


니체는 반시대적 고찰 3부에서 '교육자로서의 쇼펜하우어'에 대하여 고찰하였다. 주옥같은 내용들이 3부 앞부분에서 다루어지고 있었다. 한 달간 방학을 마치고 나니, 까마득하게 그 내용들이 멀어져 있었다. 그러나 책장을 펼치면 또 새록새록할 것이다.


우리(연수,미류,다경,현영,영배,아란도)가 오늘 읽었던 8장의 내용은, 앞 장을 정리하는 동시에 철학적 천재의 환경에 관한 것이었다. 여기서 철학적 천재는 쇼펜하우어릴 가리키는 것과 동시에 미래의 철학적 천재들의 환경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니체낭독/플레시몹 낭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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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가 본 쇼펜하우어의 철학적 천재의 환경 조성은 바로 이러한 것이었다.




_____<8장 편집한 전문>_____


자유로운 남성적 성격, 일찍 습득한 인간 지식, 학자적 교육을 받지 않고 애국적인 구속이 없으며, 생계를 위한 압박이 없고, 국가와의 관계가 없는 것이었다.


간단히 말해 자유 그리고 또 자유, 이 멋지고 위험한 요소 속에서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이 성장할 수 있었다. 니부어가 플라톤을 비난했듯이, 나쁜 시민이라고 그를 비난하려는 사람은 그렇게 해야 하고, 본인이 먼저 좋은 시민이어야 한다. 그러면 그는 정당할 것이고, 플라톤도 마찬가지로 정당할 것이다. 어떤 사람은 저 자유를 불손으로 해석할 것이다. 이 사람 역시 옳다. 그가 이 자유를 가지고 올바른 일을 시작하지 못하고, 그 자유를 탐한다면 이는 대단히 자만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저 저유는 정말 무거운 부채다. 단지 위대한 행위로 이 채무를 갚을 수 있다. 정말 평범한 지상의 자식이라면 그 정도로 혜택을 받은 사람을 원망의 눈으로 바라볼 것이다. 단지 그가 스스로를 너무 북돋우지 않기를, 다시 말해 너무 엄청나게 책임을 지우지 않도록 신의 가호가 있기를 바랄 뿐이다. 그럴 경우 그는 즉각 자유와 고독 때문에 고꾸라질 것이고, 지루함으로 바보, 악의에 찬 바보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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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가 이해하는 대로 철학의 장려조차 국가가 그것을 플라톤적으로 이해하고 있는지를 한번 검토해보아야 한다. 국가가 새로운 플라톤을 산출하는 것이 자신의 가장 고귀한 목적인 것처럼 이를 그렇게 진지하고 성실하게 이해하고 있는지 말이다.


보통 철학자가 자 시대에는 우연한 것처럼 보인다면, 국가는 정말 이 우연성을 의식적으로 필연으로 바꾸고 이 일을 하면서도 자연을 지원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생각하는가?


경험은 우리에게 유감스럽게도 더 좋은 것을 또는 더 나쁜 것을 가르쳐준다. 경험은 선천적으로 위대한 철학자들과 관련하여 그들의 산출과 번식에 가장 장애가 되는 것은 국가의 명령을 따르는 나쁜 철학자라고 말한다.


정말 괴로운 주제가 아닌가? 쇼펜하우어가 강단 철학에 관한 유명한 논문에서 가장 먼저 주목한 주제다. 나는 이 주제로 돌아오겠다. 왜냐하면 이 주제를 진지하게 생각하라고, 이 주제를 통해 행동을 결정하라고 사람들에게 강요해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행동에 대한 그런 요구를 배경에 깔고 있지 않은 말은 모두 불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국가가 철학을 위해 몇몇 사람들에게 베풀어 준 저 "자유"는 자유가 아니라 자기 사람을 기르기 외한 관직이다.


철학의 요구는 적어도 오늘날 몇 사람이라도 철학으로 살 수 있도록, 그들이 철학으로 밥벌이를 할 수 있도록 국가가 나서 달라는 것이다.


그 반면 그리스의 옛 헌인들은 국가로부터 급료를 받지 않고 기껏해야 한번, 제논처럼 황금으로 된 왕관과 케라메이코스의 묘비라는 명예를 받았을 뿐이다. 진리를 가지고 살 수 있다는 길을 보여줌으로써 진리에 봉사하는 것인지 나도 일반적으로 이에 대해 뭐라고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 길을 걸어간다고 말하는 개인들의 방식과 선의에 모든 것이 달려 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주변 사람들에게 "나는 좀 더 훌륭한 일, 즉 너희를 보살피는 일을 하기 때문에, 너희는 나를 보살펴다오"라고 말할 때, 그에게서 어느 정도의 자긍심과 자존심이 느껴질 것임을 나는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플라톤과 쇼펜하우어에게서 그런 신념의 위대성과 그것의 표현이 낯설지 않을 것이다. 그 때문에 바로 그들은 심지어 대학 철학자가 될 수 있었다. 플라톤이 철학의 존엄성을 격하시키지 않고도 일시적으로 궁정 철학자가 되었듯이.


그러나 칸트는 이미, 우리 학자들이 그렇듯이, 사려 깊고 복종적이며, 국가에 대한 태도에서 위대성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아무튼, 대학 철학이 한번 비난을 받아야 한다면, 그것을 정당화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쇼펜하우어나 플라톤처럼 그것을 정당화할 수 있는 인물들이 있다. 그런데 나는 단지 한 가지 점이 두려울 뿐이다. 국가는 감히 그런 사람들에게 혜택을 주고 그런 지위를 부여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그런 인물들은 정당화할 기회도 얻지 못할 것이라는 점을 나는 두려워한다.


왜 그런 것인가? 모든 국가가 그런 사람을 두려워하기 때문이고, 국가는 두렵지 않은 철학자들만 후원할 것이기 때문이다. 국가가 철학자를 겁내는 현상이 나타나고, 정말 그렇다면 국가는 철학이 자신들 편에 있다는 인상을 줄 수 있는 철학자들을 더욱더 자기 펀으로 끌어들이려 할 것이다. 국가는 명성은 있지만, 두려움을 불러일으키지 않는 사람들을 자기편으로 삼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리의 칼로 만둘에게, 따라서 국가에게도 덤비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국가는 특히 자신의 존재를 긍정하기 때문에, 정당하게 그런 사람을 배제하고 적으로 취급할 것이다. 이는 국가가 자기 위에 서서 심판자가 되려는 종교를 배척하고 적으로 취급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모든 것을 감수하고 국가를 위한 철학자가 되려는 사람은 자신이 모든 구석구석의 진리를 추적하는 일을 포기하는 듯한 사람으로 보이는 것도 감수해야만 한다.


적어도 그가 후원을 얻고 고용되는 한, 그는 진리 위에 더 높은 것, 즉 국가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국가뿐만 아니라, 동시에 국가가 자신의 복지를 위해 요구하는 모든 것, 예컨대 특정한 형태의 종교, 사회 질서, 군사 제도 등을 인정해야 한다. 이런 것들 위에는 나에게 손대지 말라는 단서가 붙어 있다. 그런데 이제까지 자신의 의무와 제한의 범위를 분명하게 인지한 대학 교수가 있었을까? 나는 모르겠다. 어떤 사람이 그런 일을 하고 공무원으로 남아 있다면, 그는 어쨌든 진리의 나쁜 친구다. 그가 그런 일을 하지 않았다면, 그래도 내가 생각하기에 그는 진리의 친구가 아니다.


이것이 가장 일반적인 우려다. 그 자체만 놓고 보면 그것은 사람들에게 약하고, 아무래도 상관이 없는 우려일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깨를 들썩이고 이렇게 말하면 충분할 것이다. "마치 이제까지 위대하고 순수한 것이 인간의 비천함에 양보하지 않고 이 지상에 머물면서 발을 붙일 수 있었다는 듯한 말이군. 그러면 너희는 국가가 철학자에게 급료를 지불하고, 고용하지 않고 차라리 박해하기를 바라는가?" 이 마지막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우선 나는 국기에 대해 철학이 현재 너무 많이 양보하고 있다는 말을 덧붙이고자 한다.


첫째, 국가는 자신의 철학적 하인을 직접, 자기 기관에 필요한 만큼 선발한다. 국가는 좋은 철학자와 나쁜 철학자를 구분할 수 있다는 인상을 준다. 또 대학의 학과를 모두 채울 수 있을 만큼 좋은 철학자가 항상 반드시 있을 거라고 전제한다. 좋은 자질과 관련해서뿐만 아니라 좋은 철학자가 필요한 수와 관련해서도 국가가 이제 권위자가 되었다.


둘째, 국가는 자신이 선발한 사람들이 어느 특정한 활동을 할 것을 강요한다. 그들은 의욕 있는 모든 대학생들에게 수업을 해야 하는데, 그것도 정해진 시간에 매일 강의를 해야 한다. 정말 철학자가 매일 가르칠 무엇인가를 가져야 할 의무를 양심의 가책 없이 질 수 있는가라고 물어보자. 그것도 듣고 싶어 하는 모든 사람들 앞에서 가르칠 의무를?  그는 실제 아는 것보다 더 많이 안다는 듯한 인상을 주어야 하지 않는가? 그가 가까운 친구들에게만 위험 없이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을 미지의 청중 앞에서 이야기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


그리고 일반적으로 자신의 수호신이 부르면 언제 어디로든 그를 따라가는 자신의 멋진 자유를 빼앗기는 것은 아닌가? 즉 그가 정해진 시간에 공개적으로 이미 미리 규정된 것에 관해 사유해야 할 의무를 짐으로써 말이다. 그리고 그것도 젊은 청년들 앞에서. 그런 생각은 처음부터, 거세당한 것이나 같지 않은가? 그가 어느 날 "오늘 나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어, 제대로 된 생각이 떠오르지 않아"라고 느낀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앞에 나가 생각하는 것처럼 보여야 한다면 어떻게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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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은 자연과학에 대해 이런 의의를 제기한다. 어떤 것도 내게 가장 단순한 생성조차 완벽하게 설명하지 못하는데, 그것 모두가 내게 무슨 상관이 있는가? 다른 이는 역사에 관해 이렇게 말한다. "이념을 가진 자에게 역사는 새로운 것을 말하지 않는다." 간단히 말해, 무언가를  배우는 것보다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 더 철학적이라는 이유는 그들에게 항상 마련되어 있다.


한번 배움에 종사하면, 그들은 과학에서 도망가고, 과학의 틈새와 밝혀지지 않은 것 속에 어두운 제국을 건설하려는 은밀한 충동이 거기 작용한다.


맹수가 자기를 추적하는 사냥꾼 앞에 달려간다는 의미에서만 철학은 과학보다 앞서 간다.


최근 들어 그들은 자신들이 단지 과학의 국경 파수꾼이고 감독자라는 주장으로 우쭐대고 있다. 거기에 이용되는 것은 칸트의 학설인데, 그들은 이 학설로 한가한 회의주의를 만들어내는 데 열심이다. 그런데 얼마 안 가 어느 누구도 이 회의주의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것이다.


이따금 여기저기 그들 중 한 명이 작은 형이상학을 비약하면서 현기증, 두통이나 코피 같은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안개와 구름 속으로의 여행이 실패한 후, 진정한 학문에 뜻을 둔 어떤 거칠고 고집 센 청년이 어느 순간 그들의 머리채를 잡아 밑으로 끌고 내려오면, 그들의 얼굴은 거짓말을 해서 벌 받을 때처럼  엄살스러운 표정을 습관적으로 짓는다.


그들은 즐거운 확신을 상실했고 그래서 이제 아무도 더 이상 그의 철학을 위해 살려고 하지 않는다. 과거 한때 그들 중 몇 사람은 새로운 종교를 고안하거나 옛것을 새 시스템으로  대체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제 그런 오만은 그들에게서 사라졌다. 그들은 대개 경건하고 수줍고 불분명한 사람들이 되어 루크레티우스처럼 용감하지 않고 인간을 누르는 압력에 통분을 느끼지 않는다. 그들에게서는 논리적 사고도 배울 수 없고, 그 외에 흔히 했던 토론 연습도 자기 역량을 있는 그대로 평가해 보고는 중단했다.


사람들이 이제 개별 과학의 편에 서면서 더 논리적이고 더 신중하고 더 겸손하고 더독창적이 되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철학자들에게서보다 개별 과학에서 사태는 더 철학적으로 전개된다.


그러면 그들은 다시 자신들의 불확실성과 어찌할 바를 모르는 혼란 속으로 비틀거리며 돌아온다. 그런데 그들은 헤르바르트 학파처럼 실증심리학으로서 양손에 약간의 자연과학을 쥐고 싶고 약간의 역사학도  가지고 싶은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비록 내심으로는 모든 철학과 모든 과학을 지옥으로 보내고 싶지만, 공적으로는 학문에 종사하는 것처럼 행동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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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한 무리의 나쁜 철학자들이 가소롭다고 치자. 누가 그것을 부인하겠는가? 그런데 그들은 어느 정도로 유해한가? 그들이 철학을 우스꽝스러운 것으로 만듦으로써 그러하다. 국가가 공인한 사이비 사상가 단체가 존속하는 한, 진정한 철학의 위대한 영향은 무효가 되거나, 적어도 억제된다. 그렇게 된 유일한 원인은 저 위대한 사업의 대표자들이 스스로 자초했지만, 문제 자체에는 딱 들어맞는 저주, 웃음거리가 된 저주다. 그러므로 철학으로부터 국가적이고 학술적인 모든 인정을 거두어들이고 그들이 해결할 수 없는 과제, 즉 진정한 철학과 가짜 철학을 구분하는 과제를 면제해 주는 것을 나는 문화의 요구라고 부른다.


철학자들이 계속 거칠게 자라도록 내버려 두면, 취직의 전망과 시민적 직업 종목으로의 편입을 거부하면, 급료로 그들을 유혹하지 말고, 더 나아가 그들을 박해하고  가혹하게 감시하면, 그대들은 기적 같은 일을 체험할 것이다. 그러면 그 불쌍한 겉치레 인간들은 뿔뿔이 흩어져 도망갈 것이고, 여기저기서 잠잘 만한 지붕을 구할 것이다. 여기서 목사 자리가 열리고, 저기서 선생 자리가 주어진다. 어떤 이는 신문의 편집부로 기어 들어가고, 다른 사람은 고등 여학교를 위한 교과서를 쓸 것이며, 그들 중  가장 이성적인 사람은 쟁기를 들고, 가장 허영심 많은 인간은 궁정으로 갈 것이다. 갑자기 모든 것이 텅 비고 둥지에서 날아가버렸다. 왜냐하면 나쁜 철학자들을 떼버리는 일은 쉽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혜택을 주지 않으면 된다. 어쨌든 이런 일은, 어떤 종류의 철학이든 철학을 공적으로 국가 때문에 비호하는 것보다는 더 권할 만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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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에게 중요한 것은 진리가 아니라 항상 국가에게 유익한 진리, 좀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그것이 진리든, 반쪽 진리든 또는 오류든 국가에게 소용이 되는 진리다. 국가와 철학의 연대는, 철학이 국가에게 반드시 소용이 되겠다고, 국가의 이익을 진리보다 더 높이 설정하겠다고 약속을 할 경우에만 의미가 있다.


물론 진리를 고용하고 급료를 지불한다면, 그것은 국가에게 더할 수 없이 멋진 일이다. 단지 결코 봉사하지 않고 결코 녹을 먹지 않는 것이 진리의 본질에 속한다는 것을 국가는 잘 알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국가가 가진 것 속에는 단지 거짓 "진리"만 있고, 가면 쓴 인물만 있다. 그런데 이런 것은 국가가 참된 진리로부터 그토록 갈망하는 것을 해줄 수가 없다. 즉 국가가 정당하고 신성하다는 선언을 해줄 수가 없다. 어떤 중세 군주가 교황으로부터 왕권을 인정받고 싶었지만 얻을 수 없었을 때, 그는 그에게 이런 봉사를 해줄 대립 교황을 임명했다. 이런 일은 어느 정도까지 가능했다.


그러나 근대 국가가 대립 철학을 임명하고, 이 철학으로 하여금 자신을 정당화하게 하는 일은 가능하지 않다. 국가는 예나 지금이나 자신을 반대하는, 과거보다 더 반대하는 철학을 보아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전혀 철학을 상대하지 않고 그것에게 바라지도 말고 가능한 한 오래 무관심한 것으로 내버려 두는 것이 국가에게 더 유익하다고 나는 진지하게 믿는다. 무관심하지 않을 경우, 국가가 아무리 철학을 박해해도, 철학은 국가에게 위험한 존재가 되고  공격적이 된다.


국가는 오로지 철학을 순종적이고 유용한 국가 시민을 교육하는 것 외에 대학에 대해서는 다른 관심이 없기 때문에, 이런 복종심, 이런 유용성을 젊은이들에게 철학 시험을 요구함으로써 문제시하는 데에는 주저할 수밖에 없다. 물론 나태하고 무능한 두뇌들의 경우, 그들을 시험 유령으로 만듦으로써 철학 공부를 겁내서 그만두게 하는 데에 시험은 적합한 수단이다.


그러나 이 이익은 이 강제 작업이 무모하고 불안정한 청년들에게서 야기하는 손실을 메우지 못한다. 청년들은 금미 서적들을 알게 되고, 자기 선생을 비판하기 시작하며 마침내 대학 철학과 그 시험의 목표를 알아차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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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이제 권력을 손에 쥐고 있다. 당시 헤겔의 시대에는 사람들이 권력을 갖고자 했다. 그것은 커다란 차이다. 국가는 철학의 비준이 이제 필요 없고, 그로 인해 철학은 국가에게 쓸모없게 되었다. 국가가 철학 교수들을 더 이상 부양하지 않든지 또는, 내가 가까운 장래에 일어나리라 예상하는 것처럼, 단지 형식적으로 그저 되는 대로 부양한다 해도, 국가는 이익을 얻는다.


더욱 중요한 것은 대학 역시 거기서 자기 이익을 본다는 데 있는 것 같다. 반쪽 학문이나 4분의 1 학문 공동체로부터 해방됨으로써 적어도 진정한 학문의 공간이 발전하리라는 것은 생각할 수 있다. 게다가 대학의 학자들로부터도 경시되는 학과의 배제를 원칙적으로 원치 않는다면 대학의 존엄이란 극히 기이한 일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대학에 속하지 않는 사람들은 대학을 일반적으로 경멸할 만한 충분한 이유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대학이 비겁하고 작은 대학은 큰 대학을, 큰 대학은 여론을 두려워한다고 대학을 비난한다. 또 대학은 고차적인 문화의 사안에서 앞서 가지 못하고 천천히 느릿느릿 절뚝거리며 뒤를 따라갈 뿐이라는 것이다. 저명한 학문의 진정한 기본 방향이 지켜지지 못하고 있다고 비난한다. 예를 들면 언어 연구는 옛날보다 더 열심히 수행하고 있지만, 글쓰기와 말하기에서 스스로 더 엄격한 교육을 받아야 할 필요성은 전혀 느끼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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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의 고대는 문을 열었도, 인도인의 최고 불멸의 작품들, 그들의 철학과 그 전문가들의 관계는 현악기 리라와 동물의 관계와 같다. 쇼펜하우어는 인도 철학이 알려지는 것을 금세기가 다른 세기보다 우월할 수 있었던 큰 장점 중 하나라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현실은 그렇다.


고전적 고대는 임의의 고대가 되었고 전혀 고전적이고 모범적인 작용을 하지도 않는다. 진실로 모범적 인물들이 아닌 고대 학파기 이를 증명하고 있다.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볼프의 정신은 어디로 날아갔는가? 프란츠 파소가 한 대륙을 들끓게 하고 화염에 불태울 수 있는 힘을 가졌던, 진정 애국적이고 진정 인간적인 정신이라 말할 수 있었던 그의 정신은 어디로 갔는가?


이와 반대로 지금은 저널리스트의 정신이 대학으로, 그것도 드물지 않게 철학의 이름으로 밀려 들어오고 있다. 파우스트와 현자 나탄을 입에 올리는, 매끄럽게 꾸민 강의, 우리의 구역질 나는 문학 신문의 말과 견해, 최근에는 우리의 신성한 독일 음악에 대한 요설에다 실러와 괴테를 위한 학과에 대한 요구까지.


이런 징후는 대학 정신이 시대 정신과 혼동되기 시작한다는 것을 입증한다. 대학이 장려하는 교양과 관련하여 이 기관을 감시하고 재판하는 최고 법원이 대학 밖에 설립되는 것은 가장 중요한 일처럼 생각된다. 철학이 대학에서 물러나서 품위 없는 고려와 은폐로부터 정화되자마자, 철학은 그런 법원밖에는 될 수 없을 것이다. 국가 권력 없이, 급료도 명예도 없이 철학은 시대정신으로부터도 자유롭게, 또 이 정신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도 자유롭게 봉사할 줄 알 것이다. 간단히 말해 쇼펜하우어가 자신을 둘러싼 이른바 문화의 재판관으로 살았듯이 그렇게 봉사할 것이다. 철학자가 대학과 얽히지 않고 오히려 품위를 지킬 수 있는 일정 거리를 두고 대학을 조망한다면, 대학에도 유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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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무엇보다 이 지상에서 철학자의 실존이 문제가 된다면 또는 어떤 철학자가 지상에 나타나는 것이 국가나 대학의 존속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면, 국가의 실존과 대학의 진흥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있는가. 여론의 노예가 되고 자유의 위험이 증가하는 정도만큼 철학의 위엄은 높아질 수 있다.


철학의 위엄이 가장 높았던 때는 몰락하는 로마 공화국에 지진이 일어났을 때, 그리고 철학과 역사의 이름이 은혜를 저버린 수령들의 이름이 되었던 황제 시대였다. 플라톤보다 브루투스가 철학의 위엄을 더 많이 증명한다. 그것은 윤리학이 상투어를 가지기를 중단했던 때였다.


철학이 지금 존경을 받지 못한다면, 왜 지금 위대한 장군과 정치가가 철학을 신봉하지 않는지를 물어보면 된다. 그것은 그들이 철학을 찾았을 때, 철학의 이름으로, 허약한 환상이, 저 학자적 강단 지혜와 강단 - 신중함이 그들을 맞이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철학은 그에게 무서운 것이 되어야 한다. 권력을 추구할 사명이 있는 사람들은 어떤 원천의 영웅주의가 철학 속에 흐르고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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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미국인은 지상에 온 위대한 사상가는 엄청난 힘들의 새로운 중심으로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그에게 말해줄 수도 있다.


에머슨은 이렇게 말한다.


"위대한 신이 우리의 행성 위에 사상가를 보낼 때는 조심하라. 그러면 모든 것이 위험에 처하게 된다. 이는 마치 대도시에 큰 화재가 발생했지만, 어디가 안전한지 어디에서  화재가 끝날지 아무도 모르는 것과 같다. 내일이라도 학문에서는 급선회하지 않을 것이 없고, 거기서는 문학적 명망도 유효하지 않으며 이른바 영원한 명성도 없다. 인간에게 지금 이 순간 소중하고 가치 있는 모든 것들이 그렇게 소중하고 가치 있는 것은 그들의 정신적 지평 위에 솟아올라 나무에 사과가 달리듯이 사물의 현 질서를 초래하는 이념이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수준의 문화는 순간적으로 인간의 노력의 전체 체계를 전복시킬 것이다."


자, 이런 사상가가 위험하다면, 왜 대학에 있는 우리의 사상가가 위험하지 않은지 그 까닭이 분명해진다. 그들의 사상은 나무에 사과가 열리듯이 그렇게 평화롭게 전통적인 것 속에서 자라나기 때문이다. 그들은 놀라게 만들지도 않고 온통 뒤바꾸지도 않는다.


그들의 모든 노력과 시도에 관해서는, 사람들이 어떤 철학자를 칭찬하자, 디오게네스가 제기했던 이의를 그대로 말할 수 있다. "그가 그렇게 오랫동안 철학을 하면서도 아직 아무도 슬프게 하지 않았는데, 그가 무슨 위대한 일을 보여줄 수 있는가?" 그렇다. 대학 철학의 묘비명에는 그렇게 적혀 있어야 한다. "그것은 아무도 슬프게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것은 진리의 여신의 칭찬이라기보다 늙은 여자의 칭찬이다. 또 저 여신을 단지 늙은 여인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은 거의 남성들이 아니며 그래서 당연히 권력을 가진 남성들로부터 고려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우리 시대의 상황이 이렇다면, 철학의 존엄은 더럽혀질 것이다. 철학 자체가 우스꽝스럽거나 아무래도 상관이 없는 것이 되어버린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철학의 진정한 친구들은 이 혼동에 반대 증언을 하고 적어도 철학의 저 거짓 하인과 위엄을 깎는 사람들만이 우스꽝스럽거나 아무래도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라는 점을 자주 보여주어야 한다. 그들 자신이 행동을 통해 진리에의 사랑은 두려운 것이고 대단한 것임을 증명하면 더 좋을 것이다. 이런 것을 쇼펜하우어는 증명한다. 그리고 날마다 더 많이 증명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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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저번에 비극의 탄생 연재를 허면서 이것저것 많이도 메모가 덕지덕지 붙어 있다. 그래서 책이 정말..., 누구를 보여줄 수가 없다 ㅋㅋ



* 8장을 요약할 문장을 찾아야 한다면, 아마도 이 문장일 것이다. 철학의 정신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맹수가 자기를 추적하는 사냥꾼 앞에 달려간다는 의미에서만 철학은 과학보다 앞서 간다."


8장에 제목을 단다면, '철학자와 국가'일 것이다. 주제는 '철학의 존엄성을 회복시키는 행동력과 실천'일 것이다. 그것은 무엇을 통하여야 할까? 아마도 '삶으로부터'일 것이다.





좋은 시절이고 좋은 기억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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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시대적고찰_두번_낭독_완료

#니체전집낭독_플레시몹낭독회

#매주_수요일_저녁_9시_30분

#다음_낭독책_니체의_아침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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