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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독회, 책거리하다

니체_즐거운 학문 & 메디나에서의 전원시_유고

by 아란도


ㄴㅣ체의 책은 모두 같은 내용의 다양한 변주다. 이 책들은 이란성쌍둥이 혹은 여와 복희씨와 같은 샴쌍둥이다. 아메바적인 유기체다.


여와 복희씨/ 사진 출처 : 나무위키에서


니체의 유고는 니체가 사유한 흔적들이다. 그 자신의 사유를 쌓아 올린 흔적들이다. 긴 글과 짧은 글 그리고 시와 아포리즘은 니체가 그 자신의 생각을 끝까지 밀어붙인 흔적이다.


어떤 장의 절은 어떤 사유에 대하여 짧고 또 어떤 장은 비교적 구체적이며 길다. 어떤 절은 아포리즘으로만 표현했다. 아포리즘은 그때의 그 순간의 니체의 상태를 알려준다. 아포리즘이 나온 순간은 니체가 몰입해 있을 때 직관적으로 번득 깨달은 것이다. 그러므로 니체는 아포리즘을 직관적으로 건져 올린 한 소식인 것이다.


니체가 더 오래 살았다면 그는 이 생각의 씨앗들을 더 가다듬었거나 정리했을 것이다. 니체가 죽은 후 니체의 글들을 탈탈 털어 모두 책으로 나왔다. 살아 있는 니체라면 공개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글들. 어쨌든 그 자신의 흔적의 글들은 그가 없애지 않았다면 모두 남는다. 남겼다는 것은 공개해도 좋다는 암묵적인 동의일 것이다. 후대인에게 남긴 생각의 씨앗들이니까.


나는 간헐적으로 또는 자주 직관적 사유를 통하여 어떤 문제를 해결한다. 내가 스스로 문제시화한 것에 대해서. 그러면 그 방향이 맞다는 확신은 몸이 알려준다. 직관적인 그 순간은 뇌가 환희감에 차있기 때문이다.


니체의 유고는 니체의 메모라고 볼 수 있다. 일어나는 순간들의 생각을 그때마다 적어 놓은 것이다.


유고의 조각글들은 내가 메모장에 메모한 방식과 흡사하다. 아마도 내가 메모한 내용들을 정리하면 니체의 유고 같은 형태가 되지 않을까.


물론 메모는 글의 씨앗이면서 동시에 때로는 이미 완성된 글이기도 하므로, 글의 씨앗으로 더 다듬어진 새로운 글로 탄생하기 전 그 상태 그대로에서, 오타와 문맥 정도만 수정한 채로 책으로 엮은다면 아마도 유고 형태가 될 것이다. 메모도 글쓰기다. 다만 메모를 어디에 하는가에 대한 것뿐이다. 메모장에 하는가? 폰에 하는가? 노트북에 하는가? SNS에 하는가? 인터넷 안에 하는가? 정도의 차이다. 다 메모에 해당하지만 공개인가? 비공개인가? 하는 정도의 차이.


<유고>는 니체의 생각을 더 세밀하게 보게 한다.


니체 책 낭독은 니체의 언어를 습득하는 시간이다. 어떤 한 권의 철학책이 자기에게로 올 때 이해로 오는 것은, 아마도 그 자신의 전의식의 전이해와 함께일 것이다.


지금 낯선 이 언어가 읽어감에 따라 이해로 다가온다면 그것은 이미 전이해가 있었기 때문이다. 즉 그만큼의 축적이 있었다는 의미이다. 반면에 읽어감에 따라 혼돈이라면 전이해의 축적도가 약하다는 반증이 된다.


그렇다면 더 읽어야 한다. 한 권의 철학책을 읽으면 그 내용에 대한 자기 해석적 이해로 전해올 때까지. 읽는 것이 공부이며, 이해로 온다고 하여서 그 내용 자체가 금방 숙지가 되는 것은 아니다. 바로 그때 반복적 읽기가 필요하다. 이해와 그것에 대해 말하는 것은 다르니까 말이다.


한 권의 철학책에 대한 이해 없이 반복적으로 읽는 것은 의미 없다. 문장을 외운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때는 부피를 키워야 한다. 넓이를 확보해야 하며 축적을 시도해야 한다.


니체의 언어를 익히는 시간이 축적되어야 하며 니체 방식의 사유에 젖어들어야 한다. 보통은 이러한 상태를 나는 '몰아지경沒我之境'적이라고 표현을 하지만 받아들이기에 따라서 그 상태를 종교적 환각 상태로 인식하기 쉽다. 하지만 몰아지경 상태는 그것과 내가 구분이 없어져서 내가 그것인지 그것이 나인지를 구분하지 않는 상태인 것이다. 어떤 세계 또는 어떤 사물과의 경계가 없어진 것이어서 그 세계 또는 그 사물이 그 자신에게 들어온 것인지, 그 자신이 그 사물에게로 들어간 것인지는 모호하지만, 어쨌든 하나의 또 다른 막이 생겨나서 그것을 두른다.


어떤 사유에 대하여 혹은 방식에 대하여, 어떤 글에 대하여, 어떤 글쓰기 방식에 대하여, 그것에 내가 몰입해 있다면, 그것과 그 자신의 상태가 겹쳐진다. 즉 그 자신이 그것에게로 이입되거나 그것이 자신에게 이입되거나 이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사람은 그것/사물에 대하여 이해를 갖게 된다. 복제다. 정신적인 복제이며 동시에 신체적인 복제다.


직관적 깨달음의 방식은 연결을 통하며, 몰아지경의 방식은 복제를 통한다. 모두 정신작용이다. 직관적이며 몰아지경적인 이 두 방식은 혼재되어 있다. 서로 동시적이기도 하다.


직관은 순간을 사용하며, 몰아지경은 그 상태를 오래 유지하며 그것에 머무는 것이다. 즉 머금는 것이다. 몰아지경은 어떤 장 속으로 스스로 들어가서 하나의 세계(공간/막)를 형성하여 그 안에서 복제하는 것이다. 일종의 가상의 훈련장과 같다.


몰아지경은 복제로 그 자신의 신체에 체득되는 것이며, 직관은 순간에 낚아채는 것이다. 몰아일여는 전체에 대한 감각이며, 직관은 아이디어이자 하나의 실마리이다. 그 실마리 하나를 건드리면 전체가 출렁인다. 그것은 낚아챈 것이다. 하나를 건드리면 전체가 출렁이는 그 범위가 하나의 범주다. 체계다. 그리고 그 체계들 역시 복제 방식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방식이 직관이다. 직관은 범주의 스위치다.


몰아지경은 사물 자체에 대하여 알아내는 방식이다. 이 방식으로 나 아닌 다른 것에 대해 안다. 합일하는 것이다.

이 사물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직관은 차원을 넘나든다.


사람은 모두 이 방식을 쓰고 있다. 무의식적인 이 방식들이 얼마나 그 자신이 의식적으로 사용하고 발달해 있는가의 차이일 뿐이다. 종교의 방식은 모두 이러한 방식의 기초에 기반하고 있다.


나는 몰아지경과 일여를 혼합하여 '몰아일여'라고 이름을 붙이고 싶다. 몰아일여는 나와 그것의 경계가 사라지고 그 주위에 새로운 막이 생겨나서 하나의 장을 형성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것이야말로 자기만의 '방'일 것이다. 그러니 이러한 상태는 하나의 장소적 의미도 있다. 그 장소는 그 자신 안에서만 생성된다.


"우리"친구들(니체식 표현"

니체는 유고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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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는 개인적 진리란 존재하지 않는다. 온통 개인적인 오류들만 존재할 뿐이다. 개인 그 자체가 하나의 오류이다. 우리들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은 그 자체로는 우리가 모르는 다른 어떤 것이다. 우리가 비로소 의도와 기만과 도덕을 자연 안에 집어넣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개체로 믿고 있는 것들과 우리 각자가 그 중의 하나인 진정한 "삶의 체계들"을 분명히 구별한다.


사람들은 이 두 가지를 같은 것으로 취급하지만,


개체라는 것은 의식된 지각과 판단과 오류들의 총합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의 믿음이, 진정한 삶의 체계의 한 부분이거나 아니면 허구의 생각들로 조립된 여러 조각들, 즉 오래되지 않을 "단일체"이다.


우리는 한 그루 나무에 달린 꽃봉오리이다.


우리가 나무에게 무엇이 될 수 있을지 우리가 어떻게 알 것인가!


그러나 우리는 마치 우리 자신이 모든 것이기를 바라고, 또 그래야만 할 것 같은 어떤 의식을 가지고 있다. "나"와 모든 "나 아닌 것"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다.


더 이상 스스로를 가공의 자아로 여기지 말 것! 소위 개체로 생각되는 것으로부터 벗어나는 법을 단계적으로 배울 것! '나'라는 오류를 깨달아야 할 것! 이기주의가 오류임을 인식할 것! 또 이타주의를 그 반대로 이해하지도 말 것! 이타주의가 마치 개체로 보이는 타인들에 대한 사랑이라는 듯이 말이다. 그렇지 않다! "나"와 "너"를 넘어서라! 우주적으로 느껴라! _11[7]에서 발췌_


집단에서 상반되는 것으로 느끼는 자아(자기 - 집단) 그리고 자신을 집단의 이해와 구별하지 못하는 집단적 덩어리의 감정, 혼동하지 말 것! _12[213]에서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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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너를 넘어서는 몰아지경의 상태는 읽기와 쓰기에도 해당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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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자신의 생각에 믿음을 가질 것. 마음속 가장 갚은 곳에서 너 자신에게 참인 것이 모든 인간에게도 참이라는 것을 믿을 것. 그것이 재능이다. __17[20]에서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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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아일여와 순간의 직관은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솟아 올라와 하나의 장을 형성하는 것이니 참이라 믿는다.


니체의 저 문구에 힘 받아서 글 올린다. 이 글은 월요일 낭독 후에 쓴 글이지만, 올리지 않았었다. 이것을 계속 검증해 온 내 시간에 대해 생각했기 때문이다. 니체의 <즐거운 학문/ 메시나에서의 전원시/ 유고> 책거리 기념 글로 올리니 이 역시 나에게는 의미가 깊다. * 책 본문 인용은 어제 수요일 낭독 후에 써놓은 글과 맥락이 통한다 여겨서 인용했다.




* 두꺼운 책이 양장이 아니라 "못"생겼지만(양장본과 같이 놓아두면 나는 혼자서 "이기 뭐얌..." 한다), 내용은 너무도 아름다운 이 두꺼운 책을 읽어내느라 협력한 플래시몹 낭독 "우리" 친구들(니체식 표현)! 고생 많았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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