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란도 Oct 18. 2023

우아한 일상

감자탕과 나



감자탕 먹고 혼미하게 졸린 탓에 소파에 누워서 동영상 보다가 서서히 잠에 끌려들어 가다.


____

저녁 무렵 추운데 택배가 예전 집으로 발송되어 캐리어 끌고 터벅터벅이 아니고 허리 펴고 걸었어. 남의 집 문 앞에 놓인 세제 한 박스 캐리어에 올리고 달달달 끌고 왔지. 보도블록에서는 바퀴가 구르면 절로 달달달 소리를 내지. 좀 시끄러워도 어느 정도 해가 덜 떨어질 무렵에는 캐리어 끌고 달달달 터벅터벅 걷는 것도 재미있어. 등 뒤의 하늘은 불타오르고 있었지.


나는 올가을 처음으로 아이보리 바탕에 기하학적 검은 줄무늬가 섞인 세타를 입었어. 세타라는 말이 좋아서 세타라고 하는 거야. 작년에 떴던 회색 뿌띠도 목에 둘렀지. 발목까지 오는 검은 양말을 신었지, 흰 캐주얼화에 말이야. 하얀 마스크와 깔맞춤이었지. 그럼 양말은 바지와 깔맞춤인 것이냐?


그래도 붉은 노을이 점령한 저녁 무렵의 바람은 매서웠어. 어떡하냐 벌써 이리 날이 추워지면, 가을옷 한번 못 입어보고 가을이 다 가겠네. 하긴 봄옷이라고 입어본 것도 아니다. 나 저 세타 인터넷에서 동네 산책할 때 입으려고 산 건데, 춥다, 저거 하나론. 아니다 며칠 춥다 말겠지. 아닐까? 이제 깊어지는 가을이니까 계속 추울지도. 고마해! 한 달 지나 보면 알야!




다행히 끓이고 있던 돼지등뼈는 이제 끓기 시작하고 있었어. 돼지등뼈만 보면 사람의 척추가 생각나. 자기 척추로서야 한다고 나는 어느 무렵의 어떤 글에 쓰곤 했었지. 그런데 이제 연식이 돼 가나, 내 척추도 연골이 약해지나 봐. 쯧쯧 에구에구.


남은 얼갈이로 겉절이를 하려는데 젓갈이 없었어. 그래서 간장과 식초와 매실, 마늘과 고춧가루로 양념장을 만들어 겉절이를 했어.

재료 손질하고 이러다 보니 등뼈를 너무 푹 고아버려서 흐물흐물해졌. 아마도 감자를 늦게 넣는 바람에 너무 오랜 시간 끓였나 . 역시 음식은 재료를 다 준비해 놓고 만드는 것이 좋은 듯해.



그는 소주를 나는 와인을, 큰 유리잔과 작은 찻잔이 건배했지.  하얀 소주잔 두 개가 어디로 갔단 말인가? 찾아도 없기에.


상 차리는데 밥솥을 열어보니 정작 밥이 없었. 세 숟가락 정도 있었. 우째서 요만큼이 남았을까? 부랴부랴 쌀을 안치고 쾌속으로 맞췄. 그런데 구황작물인 감자가 있어서 그다지 밥이 필요하지 않았. 이미 배가 불렀고, 왠지 몸이 좀 피곤했.


바깥 날씨가 갑자기 추워졌고, 와인도 들어가고 배도 부르니까 피곤하고 졸린 거야. 그리고 돼지등뼈가 너무 흐물 해져서 고기들이 모두 국물에 섞여버렸지. 두 번째 등뼈를 퍼오다가 냄비 안을 보고 급 기분이 다운되었. 그래서 급 입맛이 떨어졌. 본래의 모양이 안 나오니 의욕 상실. 갑자기 입맛이 없어졌.


그런데 이미 배는 부르니 더 안 먹어도 아무 문제가 없었어. 이건 그만 먹게 하려는 나의 뇌의 작전일까? 이미 퍼온 것이니 이걸 어쩐다! 그는 이제 배부르다고 했어. 그럼 다른 냄비에 담아두자고 했. 내가 그러고 있는 사이에 그는 마저 등뼈를 발라 먹었어. 등뼈에 살이 별로 없었지. 나 때문에 이제 숨쉬기도 힘들다며 이따 치우고 좀 쉬자고



각자 누워서 폰 들고 요기조기 구경하다 잠깐 스르륵 잠이 들었. 눈 뜨니 소주 먹은 그는 나보다 더 피곤한 표정을 짓더니, "이제 자도 되냐?"라고 물어 왔지. "허 하노라~".  '유튜브 보다 잠들어라'라는 뜻이었지. 그만한 수면제도 없으니까.


 나는 다시 와인 한잔 마시고 차 한잔 마시고. 아마도 그가 마트에서 감자와 얼갈이 사면서 대충 집어 온 와인이라고 생각했어. 단맛과 과일향이 풍부했어. 컨디션 탓일까? 감자탕과는 어울리지 않았다고 생각. 치즈 정도면 괜찮을 듯.


감자탕과 와인이 만나면 어떤 맛일까가 궁금해서 함 마셔 보았. 소주가 나았을지도. 어쨌든 이건 내 감자탕에 대해 내가 의욕 상실되어서 그럴지도 몰라.


밥을 많이 했으니, 내일은 김밥 싸서 남은 감자탕이랑 먹어야지. 내일은 맛있을 꼬야~. 설거지 한 무더기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지. 새벽에 설거지나 신나게 해야 했어. 설거지를 언제 하든 내 시간에 맞춰 사는 거지.


저녁이 온통 내 시간인 것이 좋. 휴일이라는 것이 그냥 좋았어. 왜 그럴까? 괜히 나도 쉬어야 할 것 같은 그런 기분. 덜거덕덜거덕 거리는 소리가 집 안에 자장가처럼 울려 퍼질 예정이었지. 귀에 이어폰 꽂고 설거지해야지, 그럼 금세 지나가니까.

2021/10/17


매거진의 이전글 밤바다와 사각 오두막집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