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선화는 종류가 많고 비슷비슷한 종은 정말 헛갈린다. 수선화에 검색해 본 후 수선화의 세계가 정말 방대하다는 것을 알았다. 새로운 품종이 계속 만들어지기 때문이었다. 수선화도 튤립처럼 구근 번식이어서, 교배하고 품종 개량하는 방식은 비슷한 거 같았다.
겨울을 베란다에서 밀어내느라, 작은 화분 전체를 분갈이하느라고 미처 화분에 꽃 이름 딱지가 붙어 있는 것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래서 검색을 해서 서로 대조를 해본 후 내심 헛갈리기도 하다가 품종 이름을 찾아내었다. 그 후 모종 화분에 꽃 이름 딱지가 붙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수선화에 대해 잘 모르니 주문하기 전엔 수선화는 나에게 혼돈이었다. 익숙하지 않은 세계는 사람에게 언제나 혼돈으로 온다. 그러나 혼돈은 그 자신만의 혼돈일 뿐, 언제나 이미 정렬하여 있는 상태로 잘 정돈되어 있었다. 모르니까 혼돈으로 다가오는 것뿐이다. 하나의 세계를 접하고 그 세계로 들어가는 모든 모양새가 그런 것 같다. 하물며 인간이 자연과 우주를 바라보는 심정도 그러하였으리라. 어쩌면 정렬은 처음부터 정렬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간은 인간 기준으로 그것을 다시 정돈한다. 그리고 이미 정돈된 세계를 모르는 인간은 혼돈을 느끼며 그 자신 안에서 그 세계를 또다시 정돈한다.
하나의 꽃의 세계도 그렇다. 이제 두 종류의 수선화를 직접 대면하고 보니, 수선화가 실재적으로 다가왔다. 두 종류의 꽃을 내 안으로 가져오도록 이 두 종류 이외의 많은 수선화에 대한 검색을 필요로 하였다. 이 두 종류를 알기 위해 더 많은 종류의 수성화를 알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기서 안다는 것은 각각 수선화 종류를 모두 알았다는 뜻은 물론 아니다. 어떻게 단 시간에 그 많은 종류의 수선화를 알겠는가. 이름 하나도 잘 각인이 안 되어 벅찬데 말이다. 그것은 많은 종류의 수선화를 보고 서로 조금씩 차이가 나는 것을 대조해 보았다는 의미이다. 각각의 수선화가 자기 이름이 있다는 것과 향기가 제각각 다르다는 것, 모양이 조금씩 차이가 있다는 것, 하나의 개성 있는 독립체로서의 한 품종에 대해 새롭게 인식했다는 뜻이다.
비로소 하나의 개체인 수선화를 수선화라는 군락 전체에서 떼내어 독립된 존재로 내가 인식했다는 것은, 내 집에 핀 수선화가 나에게 의미로 다가왔다는 의미다. 이렇게 볼 때 어떤 하나의 기준점이 실제적으로 생긴다는 것은 막연한 혼돈을 잠재우는 것 같다. 막상 안 키워 본 꽃을 키우겠다고 맘먹은 상태에서 마저도 마음 한쪽은 약간은 귀찮고 무력한 마음과 능동성을 밀어내는 알 수 없는 권태감이 있었다. 그런 심리 상태는 수선화에 대해 내가 잘 몰랐기 때문이다. 바깥 화단에서 본 수선화는 나의 책임 안에 있지 않지만, 집 안에 있는 식물은 나의 책임 안에 있다. 잘 모르는 데 키워야 하는 것에 대한 어떤 무력감이 먼저 도사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 감정은 아주 미세하지만 깊숙한 곳에서는 귀찮음을 빙자한 공포감 비슷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참으로 이상도 하지! 개별적으로 접촉하지 않을 때엔 수선화라는 덩어리 상태로 모호하였다. 하나의 사물을 직접 대면한 후 나에게 들어온 그 개별적 느낌은, 덩어리 진 감정 자체에서 어떤 하나가 쑥 빠져나와 전혀 다른 새로운 감정이 생성되는 바로 그런 느낌이었다. 하나의 과정을 처음부터 직접 해보는 그 과정에서 그리고 꽃이 피고 향기를 맡고 꽃잎을 만져보는 그 사이에 그리고 같은 공간에서 같이 존재한다는 그 느낌이 정서적 유대감을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꽃이 내 안으로 들어온다는 그 느낌은 낯설으면서도 새로운 활력이었다.
러브데이
또 한편으론 어떤 기억이 그전에 있었다. 집 안에 뭔가 너무 많으면 그 물건들에 대한 압박감이 생긴다. 감당할 수 있을 정도의 혼돈과 어수선함이어야 집안 관리에 수월하다. 그러다 보면 가장 먼저 안 쓰는 물건부터 치우게 된다. 그 대상의 순위 안에 들어 있는 것 역시 안 쓰는 화분들이다. 심플리즘에 요즘 사람들은 어느 정도 강박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자기도 모르게 어떤 생각들을 주고받는다. 그리고 그것은 자기 안에 내재된다. 나로부터 시작인지 또는 타인으로부터가 먼저였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날마다 보고 듣는 모든 것은 자기 안에 일단 들어와 있다. 그리고 그것을 자신이 통제하고 경계도 정한다. 그 누구라도 심플리즘을 추구한다고 하여서 그 자신에게 아직 쓸만한 것들을 막 버리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사람은 어느 정도의 수집벽도 유지하고 있다.
어쩌면 이 경계에서 갈등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심플리즘과 수집벽의 그 사이에서 화분을 더 늘리면 안 돼! 하는 나만의 다짐이 있었던 것이다. 마당이 있는 것도 아닌데, 지나치게 많은 식물을 키울 수는 없는 일이었다. 수선화를 키워볼까? 하고 생각한 것은 몇 년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실행은 하지 않았다. 생각만 하는 것과 맘먹고 실행을 직접 하는 것은 차이가 있다. 생각을 얼마든지 하더라도 실제로 화분이 늘어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생각은 언젠가는 실현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구근을 사버리고 만 것이다. 화분이 너무 많아진다는 피곤함을 아직 해결하지도 못한 채로 말이다. 알뿌리 식물을 키워보지 않았다는 관리의 막연함은 덤으로 찾아왔다. 구근을 한 덩이로 심어도 되었는데, 괜히 나눠서 일을 키웠다. 쪼갠 개수대로 심으려 하니 화분이 턱없이 부족해진 것이다. 그때부터 괜히 화분을 버렸다는 후회감이 또 찾아왔다. 찾아오지 않아도 될 감정들이 찾아오기에 그만 더 피곤해진 것이다.
그러니까 마음 안에는 해결된 사안과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동시에 존재하고 있었다. 먼저 공원 화단 주변에 흐드러지게 핀 수선화와 튤립을 자주 보게 되었고 점차로 이 꽃들과 친해졌다. 그리고 어느 순간 수선화를 키우자고 맘먹게 된 것이다. 수선화를 인터넷 쇼핑몰에서 고르는 일도 너무 종류가 많으니 일단 대략 적정선에서 알맞게 별 수고로움 없이 골랐다. 여기까지는 어느 정도 해결된 사안이었다. 수선화와 친해졌다고 생각했으니까 실행을 한 것이다. 수선화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그 열망이 그때는 우위에 선 것이다.
그런데 구근이 도착한 후부터 마음속에 불편함이 생기기 시작했다. 개별적으로 화분에 심는 작업을 할 때까지도, 그 후로 화분을 더 구입하여 심을 때에도, 어떤 불편함은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아마도 여기 까지는 아직 분화되지 못한 혼돈이 있었다고 여긴다. 사실 이 갈등의 시간은 그리 긴 시간은 아니다. 수선화를 구입하기로 맘먹기까지가 길었지, 지금 내가 글로 쓰고 있는 이 갈등은 단 이틀에 불과한 기간이었다. 어쨌든 이 기간 동안 나는 불편한 마음이 있어서 수선화가 눈에 그다지 들어오지 않았던 것이다. 그냥 샀으니까 피곤해하면서 의무적으로 심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심어 놓고 이틀이 지나고부터는 이 뒤섞인 혼돈은 이내 차츰 가라앉았다. 수선화 꽃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이상했다. 분명 수선화 구근을 나누어 심을 때에도 이미 싹이 나 있었고, 꽃도 한 두 개 정도 피어 있었는데, 나는 별 감흥을 느끼지 못했었다. 그런데 베란다에서 실내로 옮겨온 화분(그것도 식품 포장 용기 화분)은 나에게 다른 느낌을 주었다. 그것은 약간 충격 같은 것이었다. 이 느낌은 뭐지? 왜 이렇게 다른 느낌인 것일까? 수선화에 가까이 다가가게 되었다. 수선화의 모양이 나를 부르고 있었다. 마음 안에 무엇인가가 꿈틀거렸다. 비로소 나는 수선화에게 관심이 생긴 것일까? 그 후로 나는 수선화를 귀찮게 하였다. 킁킁거리며 향기를 맡고 꽃잎을 만져 보고, 쓰다듬어 주기도 하였다. 문득 이 수선화 이름이 궁금하였다. 그 순간 나는 마음 안에서 앗! 하는 느낌을 받았다.
나의 인식에서 덩어리로(단순한 사물로)만 느껴지던 수선화가 덩어리에서 분화되어 개별화되는 그 순간을 포착하는 순간이었다. 존재의 재인식이었다. 수선화에 대한 종류는 여전히 혼돈이지만 그 개체성에 대해서는 안정화된 감정이라고나 할까! 개별화된 수선화를 인식하고 나서야 비로소 그 수선화라는 존재에 관심이 갔다고 해야 할까. 수선화라는 전체의 모호함은 '그 수선화'라는 개별화된 특별한 접촉에서만 개별적인 이름이 필요해진 것일 거다. 전체 수선화에서 '러브데이'라는 이름을 가진 수선화로 나에게 인식되기까지의 과정은 나에게 의미심장함을 남겼다. 나에게 다가오라고 웃던 그 수선화는 이름이 '러브데이'였다. 그래 그렇구나! 하는 생각을 하였다. 사랑스러운 하루였다.
아마도 각각의 사물에 대하여 개별적 명명까지는 얼마간의 혼돈은 필수불가결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문득, 전체의 수선화가 개별화로서의 의미가 되기까지는, 그렇게 언어에서 의미까지는 '시간'이란 것이 필요하였구나... 그때는 정오를 향하는 정오 그 사이 시간이었을 것이다. 어찌 보면 인류의 시간에서 역사 이전의 시간이 그리 길었던 이유는 그 모든 사물들을 개별적으로 체험하고 자기와의 교감 후 그리고 또 서로와의 교감 후 서로와의 소통 방식을 만들고, 이름을 짓고 그러느라 시간이 그리 오래 걸렸던 것이지 않을까. 사람이 뭔가 하나를 인식한다는 것은 정말이지 보통 일은 아닌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