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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란도 Dec 07. 2023

서울의 봄, 천만 가야 할 이유가 천 가지 될 것 같다

영화는 그대로 일상과 공부가 뒤섞여 있다


영화를 보는 내내 가슴에 뭔가 묵직한 게 걸린 것 같았다.


화장실에서 혼자서 꺽꺽 웃는 전두광을 보며, '빨간 망토 소녀'가 생각났다. 승냥이는 참 현실적이고 뻔뻔하다. 할머니 손이 아닌 털이 더부룩하게 난 손을 내밀고도 면전에서 너스레를 떤다.


12.12군사 반란 당시 고위급 군장성들은 이미 한 번의 군사 쿠데타를 겪었으면서도 지독하게도 군인스럽지 않았다. 하기사 유능한 인재가 그때 제자리를 있었겠는가. 여우 살쾡이 말미잘들만이 한 자리씩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지(동물 여우, 살쾡이 그리고 해산물 말미잘에게는 미안하다).


드라마 '고려거란전쟁'에서 강감찬은 "전쟁에서는 무조건 이겨야 한다"라고 했다. 광인이 되어야 전쟁에서 나라와 백성을 구할 수 있다는 강감찬의 전략과 전술은 어느 때에나 통용된다. 고래로 한반도에서는 명장이 배출된다. 그런데 사기꾼도 배출된다. 영화에서 보자면, 전두광은 사람의 심리에 베팅한 도박사였다. 그리고 어찌 되었든 전두광은 노태건이란 친구가 있었다. 그때 노태건이 없었다면 전두광은 그렇게까지 몰아붙이지 못했을 것이다. 한 사람이 지지해 주자 이미 패거리 형성으로 저울추가 기운 것이다. 나머지들은 그냥 줄을 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대한민국을 전리품으로 가져갔다. 그럼에도  승냥이들은 확실히 그들의 작전이 있었다. 집요하게 벽 하나를 공략해서 뚫은 것이다. 그때 직책은 이미 무용지물이다. 직급을 떠나서 패거리로 작당해서 몰려 있는 곳을 각개 직급으로 대처하니 하나씩 다 격파된 거다.


이제 군인정신은 강감찬 정신이다. 역사의 망각을 거치고 드라마로 부활한 강감찬, 대쪽은 바로 그런 대쪽이어야 한다. 현세의 영달을 가져가고 영원히 반역자가 된 전두광 노태건을 뒤로하고, 세의 영달을 멀리하고 영원히 되살아나는 강감찬의 현달한 대쪽 정신을 군인 정신으로 하면 어떨까! 노회함이란? "전쟁에서 이기는 장수"가 가진 전략과 전술이다. 그런데 거기엔 대의와 명분이 있어야 한다. 군인들의 판단력이 마비되고 현세 영달로 달려가 패거리를 짓는다면 그것은 이미 군인이 아니다.


무엇이 현세적인가? 현세적이란 실천적 실존이다. 예전에   영화 '안시성 전투'를 볼 때, 저토록 많은 비통함을 안고도 왜 우리나라는 실존주의가 태동하지 않았는가?를 생각하면서, "아예, 내재시켰구나!" 했었는데, 이번에 '강감찬'의 대사를 듣고서, '아 현세적이란 것은 바로 저런 것이구나!' 싶었다. 강감찬은 실천적 실존으로 살았다. 강감찬의 삶 그 자체가 실천적 실존이었다. 실존하는 삶을 산다는 것은 바로 현세인 차안인 이곳에서 그 자신의 삶을 사는 것이었다. 강감찬의 삶은 현재인 이곳에서 이기는 것이었다. 그토록 강렬하게 현세적일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북방민족과 겨루어서 이기려면 지독한 현세주의가 되어야 한다. 관념주의로는 이길 수 없다. 이순신의 삶도 그렇다. 저 넘어 피안의 도피가 아닌 차안의 이곳에서 고통을 감내하며 끝내는 이기는 것이다. 그렇게 사는 것이 영원히 사는 것이다. 역사는 바뀌지 않는다. 과거는 변화하지 않고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 그렇기에 영원히 산다.


그때의 김태신은 남아도 현실적인 영달을 꾀한 전두광은 역사의 시선에 두고두고 말라죽는다.


그 당시에 수도방위사령관에게 실질적인 권한을 몰아주었더라면 역사를 지킬 수도 있었을 텐데, 다들 자신들 직급의 권한을 개인적으로 남용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역사의 반역자들 같으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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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니체의 문맥으로 영화 '서울의 봄'을 이야기해 보았다. 승냥이를 사냥하는 방법을 우리도 이제 배워야 하지 않을까. 나는 한편으론 계엄사령관이 전두광과 노태건을 좌천시키는 것을 그리 광고하듯이 진행하면, 제2의 박정희 사태가 재현된다는 것을 감안하고서 포석을 두어야 했던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여 영화를 보는 동안 가슴이 답답하였다. 앞에서는 웃고 복종하는 듯한 승냥이가 뒤로는 굴을 파고 있다는 것을 파악해야 되는 것은 아니었을까? 하면서도, 사람이니까 그렇지, 어디 사람이 말 안 하면 뭘 하고 있는지 어떻게 알겠어하는 생각이 들었다. 24시간 감시를 하지 않는 바에야. 그렇게 믿지 않으면서도 믿어버린 거. 그런데 술수를 쓰라는 것이 아니라, 어떤 중요한 자리에 있으면 그 정도의 정보 망은 확보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하나회'는 아마도 '우리는 하나다', '원팀'이다가 강령이었지 않을까? 결국 '우리가 남이가'이다. 군대 내의 사조직이 오히려 군대 내의 정규조직을 와해시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사조직이 정규조직보다 더 잘 돌아갔고, 같이 모여 있다 보니 바로바로 의견일치(회유와 윽박, 하소연과 읍소에 더 가까웠겠지만)를 볼 수 있어서 기동력을 빠르게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이고, 밀리면 다 죽는다는 불안감이 '미쳐 보자'에 베팅을 할 수 있게 했던 것 같다.


안 보이는 어둠 속에서 이렇게 승냥이들은 움직이고 있었고, 보이는 쪽에는 정규조직이 느리고도 손발 안 맞는 불협화음을 내고 있었다. 비상사태에서 정규직 장성들은 비상사태에 맞지 않게 군기가 빠져 있었다. 아니면 머릿속에서 계산기 두들기고 있었거나. 결국 의사결정하지 못하고 미적댄 모두가 결과적으로 승냥이들에게 협조한 셈이었다. 이러거나 저러거나 그 자신들에게는 별 피해만 없으면 그뿐이었겠지만. 그러나 그 결과 무수한 시민들이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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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시입니다


#서울의봄이

#안시성전투의_양만춘도 부르고

#고려거란전쟁도 부르고

#임진왜란_이순신도 부르고

#니체의 #반시대적고찰도 부르고

#서올의봄은 거대한 역사의 흐름이 맞다

다 불러서 소환시키네

아이가 엄마 아빠 다 불러 내듯이

'서울의 봄'은 역사적 부모들은 모두 소환시키네

다 불러보자


하나가 일어서면 동시에 일어서는 것





#인간적인_너무나_인간적인2  p177/307


자신의 과거에 대한 배려 ━ 사람들은 흔히 오래전에 규정된 것, 서서히 된 것을 존중하기 때문에, 사후에도 계속 살기를 바라는 사람은 후세를 위해서가 아니라 과거를 더 많이 배려해야 한다. 이 때문에 역사에서 모든 종류의 폭군들(폭군적인 예술가와 정치가)은 역사가 자신들을 향해 올라오기 위한 준비이며, 사다리로 보이게 하기 위해서 기꺼이 폭력을 행사하게 된다.


________

 *내생각/ 이 글은 앞뒤의 설명이 없고, 짤막하게 이 글로만 된 아포리즘 형태이다. 니체의 다른 책들과 연계해서 해석되어야 더 명확한 의미가 파악되겠지만, 이렇게 생각해 보았다.


사람은 보통 어떤 것에 대하여 후세를 생각해서 판단하지 자신의 과거를 배려해서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역사는 과거이지만 곧 미래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사람이 어떤 판단을 할 때 앞을 보고 하지 뒤를 보고 현재에서 어떤 판단을 내리지는 않는다. 그리고 이러한 판단은 역사로부터 미래까지 연장선에 있다. 그러니까 앞을 보고 결정하는 것이 곧 역사의 방향성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여기서 ‘폭군들’이라고 표현한 그 자체를 그대로 해석하는 것이 맞을 듯하다. 폭군들은 역사를 자신들 중심으로 해석하기 때문에, 현재에서 폭력을 행사하게 된다는 것. 다시 말해서 그 자신의 신성(기념비)을 쌓는 것으로서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 자신의 과거를 희석시키고 정당화하기 위한 절차다. 그런데 그것은 현실의 그 자신을 견고하게 보이도록 할 수는 있으나, 오히려 역사에서는 오물일 뿐이다. 살아있는 자신들의 동상을 세우는 것이라는 것. 그 동상이 오래가는 것을 본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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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 생각해 보아야 하겠지만, 지금은 이렇게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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