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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란도 Jun 27. 2024

감정의 기원은 오컬트적인 것

아침놀 제2권 142장 p163~166 요약정리에 대한, 내생각



아침놀 제2권 142장의 글에서 보자면 이러하다. 

결론적으로는, 도덕은 감정을 억압하기 위한 장치다. 역으로 도덕이 있는 이유는 감정이 불가해성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감정을 컨트롤하기 어렵다고 여겼기에 도덕으로 감정에 대한 안전장치를 만들어 놓고 싶었던 것이고, 칸트는 그 정언명법을 감정에 대한 안전장치로 생각했던 듯하다. 즉 이성으로 감정을 제어하여 조절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 그러나 칸트도 그것이 정말 쉬운 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는 것. 왜냐하면 칸트 역시 ‘qualitas occulta/퀄리타스 오컬타’ 즉 감정의 ‘숨겨진 특성’을 믿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니체는 말하고 있는 것 같다.      


공감에 대한 것은 이성으로 파악하기 어려운 것이기에 ‘불가해한 것’이라는 것. 인류가 오랜 시간 동안 자연의 공포로부터 습득한 것은, 자연의 표정을 관찰하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환경을 관찰하면서 그 환경변화에 대처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다시 인간의 표정에도 적용되었다. 공포에 대처하는 것에서 공감 능력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공감하지 않으면 상대를 파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공감 능력이 없으면 좋음과 나쁨을 구분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되면 자연 환경 변화나 인간사회의 생태계 환경을 파악할 수 없다.  

    

이 공감 능력에서 기쁨과 유쾌한 경이가 산출되었다는 것이며, 이 산출에서 다시 우스움(유머/해학)이 파생되었다. 유머는 가장 늦게 태어난 이들의 자매라는 것이다. 공포라는 자연 그 자체가 어머니가 되고, 여기에서 자연의 표정을 관찰하는 큰 딸(동정/공감)이 태어나고, 공감을 통해서 서로 이해하게 되는 동기 자매인, 기쁨과 유쾌한 경이라는 둘째 딸이 태어나고, 이들 안에서 천진하게 뛰어 놀 수 있는 우스움이라는 셋째 딸이 마지막에 태어났다. 그리고 이들을 통해서 많은 감정들이 새끼를 쳤을 것이다.


감정의 기원이 공포라면, 음악은 이러한 감정들을 모두 헤아리고 있으며, 그렇기에 감정은 출렁이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가장 근원까지 가 닿았을 때 인간은 엄청난 감정의 폭풍 안에 있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 상태는 선도 악도 아닌 상태다. 그리고 '힘'적인 상태 그 자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문화인은 이 감정이 무엇인지 알고 있어야 하고, 그 감정의 상태를 느끼지만 관조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칸트의 생각이 아니었을까? 반면, 니체는 이 관조의 상태에서 감정이 무분별하게 밖으로 튀어 나오는 것을 ‘충동’이라고 보았는데, 이 충동을 어떤 것을 창작하는 힘으로 돌리는 것이 “예술 충동”이라고 본 것. 이러한 감정의 분출이 예술적인 형태로 분출되어야 하는 것이 우리의 삶의 방식이어야 한다는 것이지 않을까.




금욕주의적인 관조와 예술충동을 통해서 삶을 더 생생하게 살아갈 수 있는 이유는, 감정의 풍부함이 살아 있기에 그럴 것이다. 금욕주의적인 관조는 고독을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예술적인 충동은 감정을 억압하지 않는 것이다. 바로 이 지점이 창작의 지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금욕적인 관조는 종교와 철학자, 학문과 학자에 해당할 것이다. 그리고 예술적인 충동은 예술적 영역과 예술가에 해당할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경계를 반드시 확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인간은 ‘감정’에 지배당하는 존재이고, 감정은 문화 현상으로 나타난다. 니체는 이 경계를 지우고 인간은 누구나 예술적 관점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하고자 함일 것이다. 금욕적인 관조를 반복적으로 수행하는 것 역시 그 방식은 어는 순간에 예술적인 특성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과정’에서 획득하는 어떤 것들에 의하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이 무엇인가를 지속하는 과정에서 그 자신의 삶을 ‘예술적인 관점’에 의거하여 만들어 가는 것은 그 자체에서 예술적인 쾌감을 얻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문화적인 오컬트적 현상은 아무리 배제하려고 해도 감정에서 기인한 것이므로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니체가 오컬트에 대해서 말할 때, 그것은 이 오컬트적인 것을 예술적인 관점으로 승화시킬 때만 정당화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니체는 왜 오컬트적인 것을 말했을까?에 대해서 의문이 있었는데, 아침놀의 이 글을 통하여 그 의문이 다소 해소된 것 같다. 나는 그래서 예전에 ‘오컬티즘’ 책을 사 놓았는데, 아직 읽지는 않았다. 그때 이 책이 절판되어서 중고서적으로 구입해 놓았었다. 그런데 서가에 보관만 하고 손을 대지는 못했다. 읽어 보고 알고 나서 무엇인가에 대해 판단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읽질 못했다. 읽어버려야 속이 시원할 텐데 말이다.   

   

그런 책이 한 둘은 아니지만, 오컬트적인 것들에 대해서 덮고 억누른다고 해결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저 깊은 곳에서 계속 확장하며 번성하니까 말이다. 인간의 감정의 기원이 공포에 있고, 그 감정들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오컬트적인 것들도 같이 형성되었으니까 말이다. 이성보다 더 깊은 삶의 기원을 갖는 오컬트적인 것들이 예술적인 관점으로 걸러진 후 예술적인 영역으로 합류될 때, 문화는 더 풍부하게 우리 삶의 배경이 되어 줄 것이다.      


아침놀 2권에서 이 글이 계속 뇌리에 남아서 옮겨 보았다. 이렇게 옮겨 쓴 후 정리하고 보니, 오히려 이것은 나의 의문들과 맞닿아 있었고, 미뤄 두었던 어떤 묵은 의문들을 해소하는 기회가 된 것 같다. 감정에 대한 기원이 오컬트적인 것들을 생성해 내었다는 것의 의미는 바로 감정의 기원이 '공포'에 있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이러한 공포에 대한 막연한 감정은 형대인에게도 여전히 존속하는 것이며, 그것은 '불안'이라는 새끼를 낳아서 번성하는 중이다. 그런데 니체는 공포로부터 공감이 나왔고 거기서 기쁨과 경이로움과 유머가 나왔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모두 '웃음의 강도'와 관련이 있는 감정들이다. 이 감정들이 중요한 이유는 거기에 바로 예술적인 삶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그동안 낭독으로 읽었던 니체 철학책들의 모호한 지점들이 많이 상쇄되는 것 같다. 여전히 읽었던 내용들은 어떤 충돌들과 모순적인 상황으로 남아 있지만, 그것은 이렇게 정리를 하지 않는 상태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번역서를 낭독으로 읽는 동안은 그 문체들이 나의 문체는 아니기 때문에, 음악처럼 뇌리에 그저 스며드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그렇게 음악처럼 스며들어 나의 뇌리를 헤집는 그 자체가 에너지라고 생각한다. 헤집어지면 불편하고 괴롭다. 그 불편함을 해소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스며드는 것들을 나의 문체로 다시 정리를 해 보면, 어떤 것들에 대한 의문이 해소되곤 한다. 괴로움을 풀어내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것들은 언제나 현재의 지금과 맞닿아 있다고 여긴다. 철학의 힘이란 지금을 볼 수 있게 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      

그 시대에서 말한 것들이 이 시대에서도 여전히 관통하고 있다. 그 이유는 이러한 것들이야말로 인간의 근원을 건드리는 것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잠을 편안하게 자는 것은 바로 이러한 것들을 알았을 때가 아닐까? 그러니 니체의 책은 질 좋은 수면에 도움에 된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 과정을 제대로 지나와야 가능한 것이겠지만 말이다. 그 전에는 불면의 밤을 보내야 하는 것인지도! 나의 불면도 멀어져간다는 생각을 한다. 물론 이 불면과 날밤 새우면서 뭔가를 해야 할 때의 불면은 다른 종류의 것이다.           






             


***가수 안예은 음악을 전체적으로 평한다면 '오컬트적 음악' 장르라는 생각이 든다. 근원적인 흥이 있다는 생각. 오컬트가 걸러지면 이러한 형태의 예술이 되는 듯. 가수 김정호의 리듬과 멜로디가 생각 난다. 반면 안예은은 빠른 리듬감이 있다. 자기세계가 분명한 가수들.

https://youtu.be/rrP4BDIs8co?si=PXVUvLN-BIqRcXmI


오컬트적인 감성이 어떤 하나의 프리즘(그 자신의 관점)을 통과하면 정재(결이 드러나는)되어 나타나는 것 같다. 그렇게 그 자신의 세계를 드러내는가 보다. 그 세계가 움직이는 힘은 원초적인 힘과 더 직접적으로 연결하는 듯이 보이니, 그것이 그 자신의 신체도구로 감지하는 세계의 정서라고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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