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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란도 Jul 15. 2024

아침놀_426장에_대해, 내생각

'수레국화 블루의 색감과 그리스적 색맹에 대하여'

#아침놀_426장에_대해 '수레국화 블루의 색감과 그리스적 색맹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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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__원문___

사상가들의 색맹 -  우리가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처럼 그리스인들이 파란색과 녹색을 구분할 수 없는 색맹이고  파란색 대신에 짙은 갈색을, 녹색 대신에 노란색을 보았을 때 (그러니까 예를 들어 그들이 머리카락의 검은색과 수레국화의 색과 남쪽 바다의 색을 동일한 단어로 지칭하고 또한 가장 긴 짙은 녹색 식물의 색과 인간의 피부색, 꿀과 노란 수지의 색조차 동일한 단어로 지칭했을 때, 그리하여 그들의 가장 위대한 화가들조차 세계를 오직 검은색과 하얀색, 빨간색, 노란색만으로 그렸을 때 그리스인들은 얼마나 다르게 자연을 보았던가. 그들의 눈에 인간의 색은 자연에서도 우세를 점하고 자연이 말하자면 인류의 색의 에테르 안에서 부유했기 때문에 자연은 그들과 너무나 다르고 인간에게 너무 가까운 것으로 나타났을 것임에 틀림없다. [다른 어떤 색보다 파란색과 녹색은 자연을 탈 인간화한다. ]


그리스인들을 특징짓는 저 유희하는 가벼움, 즉 자연 현상을 신들과 반신들,  즉 인간과 유사한 형태로 보는 것은 위와 같은 결함에서 성장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다음과 같은 또 다른 추측에 대한 비유일 뿐이다. 모든 사상가는 자연 세계와 모든 사물을 존재하는 것보다 더 적은 수의 색깔로 그리며 또한 몇 가지 색을 서로 구분할 수 없는 색맹이다. 이것은 결함만이 아니다. 그들은 이러한 접근과 단순화를 통해 색들의 조화를 사물들 안으로 투입한다. 이러한 조화는 큰 매력을 가질 수 있으며 자연을 풍부하게 만들 수 있다.


아마 이것을 통해 인류는 존재를 보는 데서 처음으로 즐거움을 배웠을 것이다. 즉 이러한 존재는 우선 하나 또는 두 가지 색조로 그리고 이를 통해 조화된 형태로 인류에게 제시되었다.  인류는 여러 가지 다양한 색조로 이행하기 전에 이러한 소수의 색들을 연습했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부분적인 색맹의 상태에서 보다 구별하는 상태로 나아간다.


그러나 이 경우 그들은 새로운 즐거움을 발견할 뿐만 아니라 언제나 이전에 누렸던 약간의 즐거움을 포기하고 상실하지 않을 수 없다.





______내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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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레국화 블루를 작년에 심어서 꽃 색깔을 보고 또 보았다. 차도 만들어 보았다. 꽃 양이 적어서 다른 꽃과 섞었지만 말이다. 수레국화꽃 색감은 정말 판타지적인 파랑이었다. 파랑 꽃이 신비로운 이유는 니체의 말처럼 단박에 주변과 분리되기 때문이었다. 어떤 구분을 준다는 의미이다. 니체도 바로 그래서 '녹색과 파란색은 단박에 자연을 탈 인간화'한다고 말한 것일 것이다. 이 색들은 자연의 색인데도 불구하고 그리스의 자연은 인간의 색의 에테르 안에 붙잡혀 있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파란색을 보기만 하면 바로 분리되는 것을 알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자연에 속한 색이지 인간에 속한 색이 아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기에 '수태고지'에서 파란색 안료가 성모마리아 의상에 사용된 이유라고 한다.


그런데 이 파란색의 역사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파랑과 초록의 중간쯤 되는 색을 표현해야 한다면 비취색일 것이다. 청화백자에 사용된 코발트 안료는 비교적 늦게 조선 초에 우리나라에 들어왔다.


그리스에서는 뒤늦게 파란색을 인식했다. 그전까지 그들에게는 파란색에 대한 인식은 없었다고 보아야 한다. 니체의 이 글을 읽으려면 약간의 자료조사가 필요했다. 검색을 해서 알아낸 정보를 바탕으로 이 글을 쓰고 있는 중이다.


니체와 동시대에 살았던,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 총리 출신인 '글래드 스턴'은 <오디세이아>를 연구하던 중, 파란색이 한 번도 등장하지 않은 것에 주목해, 그 당시 그리스인들이 색맹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이에 니체는 글래드 스턴의 의견을 받아들였던 듯하다. 이러한 주장은 글래드 스턴이 했다고 하고 니체가 먼저 말했다는 이야기는 없기 때문이다. 니체도 부연 설명 없이 사용하고 있으니, 그 당시에 이러한 사실을 니체 역시 수용하였고, 그 사실에 비추어 그 자신의 글을 쓴 것일 것이다.


"그리스인들을 특징짓는 저 유희하는 가벼움, 즉 자연 현상을 신들과 반신들,  즉 인간과 유사한 형태로 보는 것은 위와 같은 결함에서 성장한 것이다." 이 말은, 아마도 자연의 색감을 그리스인들은 그 자신들이 보고 싶은 대로(보이는 그대로, 색맹의 상태 그대로에서 보이는 대로) 보았기 때문에, 자연과 신들을 친숙하게 또 인간적으로 느꼈다는 의미일 것이다. 또한 이것은 '색맹'이라는 결함에 의한 것이지만, 오히려 그리스인들에게 이 결함이 있었기에 그리스인들은 다를 수 있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모든 사상가는 자연 세계와 모든 사물을 존재하는 것보다 더 적은 수의 색깔로 그리며 또한 몇 가지 색을 서로 구분할 수 없는 색맹이다. 이것은 결함만이 아니다. 그들은 이러한 접근과 단순화를 통해 색들의 조화를 사물들 안으로 투입한다. 이러한 조화는 큰 매력을 가질 수 있으며 자연을 풍부하게 만들 수 있다.


이 문장을 내식대로 풀어보면 이러하다.

모든 사상가는 그 자신의 세계를 통하여, 즉 단순화된 세계의 모형을 통하여 세상을 인식한다. 이 모형을 프리즘에 비추면 다양한 색이 펼쳐진다. 사상가는 그 자신의 세계에 갇혀 있는 사람들이다. 복잡성을 배제시키면 단순성이 드러난다. 그 단순성이 만유에 복제되고 다시 중첩되면 자연은 풍부해진다.


여기서 '블루' 색감은 '메를로 퐁띠'를 생각나게 한다. 나는 늘 그 대목이 뇌리에 남아 있다. 그런데 정작 오늘은 바다의 푸른색보다는, 이 문장이 눈에 들어온다.


 "자신을 넘어서서 존재에 대해 말하는 방법을 가르쳐주기 때문이다"


이 문장은 니체의


"모든 사상가는 자연 세계와 모든 사물을 존재하는 것보다 더 적은 수의 색깔로 그리며 또한 몇 가지 색을 서로 구분할 수 없는 색맹이다."라고 말하는 부분과도 맥락이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서로 맥락이 통하기 때문이다. 퐁티가 그의 책에서 전하고자 하는 '말로'의 사상과 부합하다고 여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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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2023년 텃밭정원의 수레국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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