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독 후에 영상 만들고 오타 수정하느라 듣고 읽고 하다 보니 거의 내용을 외울 정도인지라, 뇌가 활성화된 지라, 이참에 내공부하자!로 요약되었다. 그래서 이렇게 올리고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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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의 미화 - 로코코 정원 예술이, "자연은 추하고 야만적이며 지루한 것이다. 자! 우리는 그것을 아름답게 만들고 싶다"라는 감정에서 발생한 것처럼 "과학은 추하고 메마르고 위로를 주지 않으며 어렵고 지루하다. 자! 우리로 하여금 과학을 아름답게 만들게 하라"라는 감정에서 항상 철학이라 불리는 것이 거듭해서 발생한다. 철학은 모든 예술과 시가 의도하는 것을 의도하는 바 무엇보다도 '즐겁게 만들고자 한다'.
그러나 철학은 자신이 계승한 긍지에 따라 더욱 숭고하고 고상한 방식으로 선별된 정신들 앞에서 그것을 수행하고자 한다. 이러한 정신들을 위해 정원 예술을 제공하는 것, 그것의 주요 매력은 저 '보다 통속적인 정원 예술'과 마찬가지로 눈을 기만하는 것이다 [비유컨대 사원, 원경, 동굴, 미로, 폭포를 통해 과학을 솎아내고 모든 종류의 진기하고 돌발적인 조명과 함께 [과학]을 제시하고, 사람들이 그 [과학] 안을 '마치 야생의 자연 속처럼' 그러나 아무런 피로나 권태도 없이 배회할 수 있도록 많은 모호함 불합리 몽상을 거기에 섞는 것, 이와 같은 것들은 결코 작은 야심이 아니다.
이러한 야심을 가진 사람은 이전에 인간들에게 최고의 여흥을 제공했던 종교를 이러한 방식으로 불 필요하게 만드는 것 역시 꿈꾼다 이것은 현재 진행되고 있으며 언젠가는 최고조에 달하게 된다. 지금 이미 철학에 대한 반대의 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는데 이 소리는 이렇게 외치고 있다. "과학으로 되돌아가라! 자연과 과학의 자연스러움으로!" 아마 이와 함께 마치 우리가 루소 이후 높은 산맥과 사막의 아름다움에 대한 감각을 처음으로 발견한 것처럼 과학의 '야생적이고 추한' 부분에서 가장 강력한 아름다움을 발견할 시대가 시작될 것이다.
______내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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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도하는 것을 의도하는 바', 철학은 곧 '메타 의도'라는 말이겠다. 철학은 '즐겁게 만들고자 한다' 이 문장들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니체는 그 자신의 책을 읽을 후학들을 엄청나게 배려하고 있다. 마치 옆에 있는 것 같은 말투를 사용한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니체에게 '좋은 또는 나쁜' 교사(교사라 쓰고 스승이라 읽음)라고 말을 해주어야 한다.
책을 읽고 있는 사람들이 무엇을 해야 할지를 말해주고 어떻게 책을 읽고 활용할지를 알려주며, 또 훗날의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말해준다. 아침놀은 옛날이야기 들려주는 할아버지 같은 자상함도 전해온다.
무엇보다 '과학의 미화'에서는 나는 완전 감동했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이런 말을 들려주지 뭐야! 나는 그냥 현재 내 모습을 니체가 지지해 주는 것처럼 기뻤어. 그 시대에서 니체 역시 정원 예술이 하나의 창작임을 알았던 것이겠지.
아마도 현재의 어떤 조경이나 거리 역시 과학 더 엄밀히는 기술의 도움을 받고 있다. 현재의 기술은 세상을 더 아름답게 만드는 것이고, 더 자연스러워지는 것이지만, 그것은 단순성에 기초하고 있다.
그런데 정원 예술은 세계를 축약하여 표현할 수 있다. 이것은 우리도 익숙한 것이다. 조선시대부터 지금까지 이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정원의 의미가 조금은 더 현재에서 부각되어도 좋을 것이다.
나는 텃밭정원을 거닐거나 그림 감상하듯이 거리를 두고 바라볼 때, 세밀하게 들여다볼 때, 내가 그 세계에 속해 있고, '열의 안개'가 서려 있는(정말 이 표현은 마음에 든다) 어떤 의미를 느낀다. 그것은 아우라이기도 하지만, 일종의 영혼 같은 것이다. 즉 '의미가 텃밭정원에 침잠하여 주위를 감싸며 진동하고 있는 것'이다. 퐁티는 그의 책에 이렇게 적고 있으며 또한 인용하고 있다.
[ 화가가 세계의 광경에서 겨우 끌어낸 등가물의 체계를 캔버스 위에 색채와 준 공간으로 새롭게 옷을 입힌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즉 그림이 의미를 표현하기보다는 의미가 그림을 잉태하는 것이다. 그림에 의해 의미가 나타나기보다는 오히려 의미가 그림 속에 침잠해서 "열의 안개처럼" 그림 주위를 감싸며 진동하고 있는 것이다.
표현하지 못하게 하는 것을 표현하는 회화의 본질은 항상 하늘과 땅의 중간에서 멈춰버리고 마는, 엄청나지만 공허한 노력이다. 언어 전문가들에게도 이러한 현상은 불가피하게 나타난다. 그 이유는 그것이 우리의 언어가 아닌 데다가 우리가 그것을 세상과 관계하는 데 중요한 도구로 삼지 않기 때문이다.
회화를 통해 세상과 소통하지 않는 우리에게 있어서 그림의 의미는 유기된 채 남아 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회화 속에서 살기 시작한다면, 그림의 의미는 화가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캔버스 표면에서 일고 있는 '열의 안개' 이상이 된다. ]
로코코 시대에 자연을 다시 보고 자연의 아름다움을 재발견한 것처럼, 현시대에서도 과학을 재발견하는 것은 필요하다. 텃밭이 정원이 되는 것은 손이 많이 가는 작업이다. 정원 같은 텃밭은 일종의 귀족이다. 왜냐하면 어떤 형태가 흐트러지면 안 되기 때문이다. 바로 무너지지 않은 그 지점에 어떤 이야기가 서려 있는 것 같다. 계절이나 시간의 추이에 따라 변화하는 균형점 같은 것이 매 순간 생겨나기 때문이다. 살아 있기 때문이다. 손이 많이 가는 것은 귀한 것이다. 정원만큼 사람의 손길을 끊임없이 요구하는 것도 없으리라. 그런데 그 손길에서 의미가 길을 연다. 그리고 세계가 형성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