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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란도 Aug 03. 2024

니체, '비제의 음악 예찬과 바그너 오페라 비판'

책<바그너의 경우>1~3장 옮겨 쓰기

#니체전집_제15권_바그너의경우_1에서3장 '비제의 음악 예찬과 바그너 오페라 비판'

* 니체의 비제 오페라 <카르멘>예찬 부분은 한 편의 시 같다. 가만히 천천히 읽고 있으면 그 결이 전해온다. 니체의 <카르멘> 철학리뷰라고 표현해도 될 듯하다. 리뷰를 시처럼 쓰는 니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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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제 비제의 걸작을 스무 번째 들었습니다. 사람들 자신이 이 작품과 더불어 걸작이 되는데요. 그리고 카르멘을 들을 때는 언제나 나 자신이 다른 때보다 더 철학자인 것 같고 더 나은 철학자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게 나는 느긋해졌고 행복해졌으며 인도적Indisch이 되었고 엉덩이가 무거워졌습니다. 다섯 시간을 앉아 있는다는 것, 성인다움의 첫 단계지요!


내가 생각하기에 비제 음악은 완전한 것 같습니다. 이 음악은 가볍고 탄력 있으며 정중하게 다가옵니다. 이것은 사랑할 만합니다 이것은 땀을 흘리지 않습니다.


"선한 것은 가볍고, 신적인 모든 것은 물결처럼 부드럽게 흘러간다"

내 미학의 첫 번째 명제입니다.


비제의 음악은 악하고, 세련되었으며, 숙명적입니다. 그래서 대중에게 친근합니다. 이 음악은 한 개인이 아닌 한 종족의 세련됨을 갖추고 있습니다.


이 음악은 풍부합니다. 이 음악은 간결합니다. 이 음악은 건축하고 조직하면서 완성이 되지요. 이렇게 하여 이 음악은 음악에서의 바다 괴물의 반대이자, "무한선율"의 반대가 됩니다.


무대 위에서 이것보다 더 고통스럽게 펼쳐지는 비극적인 악센트를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그리고 이 음악이 어떻게 성취되었던지요! 얼굴을 찡그리지 않고 위조 짖거리를 하지 않고서! 위대한 양식이라는 허위도 부리지 않고 성취되었습니다.


이 음악은 청자를 지성인으로 간주하고, 심지어는 음악가로 간주합니다. 세계에서 가장 무례한 천재였던 바그너에 반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바그너는 말하자면 우리를 모ㅇ무엇__처럼 다룹니다. 그는 사람들이 자포자기할 때까지 한 가지 것에 대해 자주 말을 합니다 사람들이 믿어버리게 될 때까지 말입니다.


비제가 나를 설복시키면 나는 더 나은 인간이 됩니다. 더 나은 악사가 되기도 하고, 더 나은 청취자가 되기도 합니다 이보다 더 잘 듣는 것이 도대체 가능할까요? 나는 내 귀를 이 음악의 밑에 묻고서 이 음악의 근원을 듣습니다.


나는 이 음악의 탄생을 체험하는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나는 이러저러한 모험이 동반하는 위험에 몸을 떨며, 비제 자신에게는 아무런 책임이 없는 우연한 행운들에 매료됩니다. 이 얼마나 기이한 일이란 말입니까! 사실 나는 그런 것들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았습니다 얼마만큼 내가 그것에 대해 생각하는지 나는 알지 못합니다.


그사이에도 완전히 다른 생각들이 내 머릿속을 스쳤기 때문입니다......  음악이 정신을 자유롭게 한다는 것을 사람들이 알까요? 사유에 날개를 달아준다는 것을? 사람들이 음악가가 되면 될수록 더욱더 철학자가 된다는 것을? 추상이라는 회색하늘에 번개가 번쩍이며 지나간 듯합니다. 사물의 온갖 금사 세공Filigran을 비추기에 그 빛은 충분히 강합니다. 큰 문제들이 거의 포착됩니다. 세계가 마치 산 위에서 내려다보듯 내려다보입니다.


내가 바로 철학적 파토스에 대한 정의를 내리고 있는 것 같네요. 그리고 돌연 해답들이, 힘들이지 않고도 저절로 내 손에 들어옵니다. 얼음과 지혜의 싸라기 우박이, 해결된 문제들의 싸라기 우박이......  내가 있는 곳은 어디입니까? 비제는 나를 비옥하게 합니다. 선한 모든 것은 나를 비옥하게 합니다. 나는 이것에만 감사해하며 또한 이것만을 선한 것의 증거로 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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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 역시 구원합니다. 바그너만이 유일한 고원자는 아니지요. 이 작품과 더불어 사람들은 축축한 북방에, 바그너적 이상이 만들어내는 온갖 수증기에 이별을 고합니다. 그 줄거리가 이미 그것들로부터 구원입니다.


그 줄거리는 '메리메 P. Merimee'에 의해 열정의 논리, 가장 짧은 선, 엄격한 필연성까지도 갖추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열대지방에 속하는 것, 공기의 건조함 대기의 투명함을 갖추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모든 면에서 기후가 바뀌어 있습니다. 여기서는 다른 감성, 다른 감수성, 다른 명랑함이 입을 엽니다.


이 음악은 명랑합니다. 그렇지만 프랑스나 독일의 명랑함은 아닙니다. 그 명랑함은 아프리카적입니다. 그것은 숙명을 이고 있으며, 그 행복은 짧고 갑작스럽고 가차없습니다.


유럽의 교양있는 음악에서 지금까지 표현되지 않았던 이러한 감수성에 대해, 더욱 남방적이고 더욱 갈색이며 더욱 그을린 감수성에 대해 비제가 용기를 내었다는 점 때문에 나는 그를 부러워합니다. 그 행복의 노란 오후는 우리에게 얼마나 유익한지요! 이때 우리는 멀리 내다보게 됩니다. 언제 우리가 대양을 이보다 더 잔잔한 것으로 보았단 말입니까?


그리고 무어족의 춤은 얼마나 우리를 안심하라고 설득하는지요! 만족할 줄 모르는 우리도 그 춤이 지닌 관능적 우울에서는 만족을 배우고야 많은군요! 결국에는 사랑을 자연으로 다시 옮겨진 사랑을! '고결한 처녀'의 사랑이 아니고, 센타Senta의 감상도 아닌! 오히려 운명으로서의 사랑을, 숙명으로서의 사랑을, 냉소적이고 무고하며 잔인한 사랑을 배우는지요. 바로 그래서 그 사랑에는 자연이 깃들어 있는 겁니다.


그 사랑의 수단 가운데는 싸움이 있고, 그 밑바닥에는 성性에 대한 철저한 증오가 놓여 있는 겁니다. 나는 사랑의 본질을 이루고 있는 비극적 장난이 그 작품의 끝을 장식하는 '돈 호세 Don Jose'의 외침에서처럼 그토록 강렬하게 표현되어 있으며, 그토록 끔찍하게 공식화되어 있는 다른 경우를 알지 못합니다.


"그래 내가 그녀를 죽였다.

 내가 ㅡ 내 사모하는 카르멘을!"


 사랑을 이런 식으로 이해하는 것은 (철학자에게 어울리는 유일한 사랑에 대한 이해) 드문 일입니다. 이런 이해는 수천 개의 예술 작품 중에서 하나의 작품을 돋보이게 합니다. 왜냐하면 평균적으로 예술가들은 전 세계가 하는 것과 똑같이 작품을 만들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더 고약하게도. 그들은 사랑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바그너 역시 사랑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사랑을 이기적이지 않다고 믿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다른 사람의 이익을 바라고 또 곧잘 자신의 이익에는 배치되는 것을 바라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그 대신에 그들은 다른 사람을 소유하기를 원합니다......  신마저도 예외는 아닙니다.


신은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라는 식으로 생각하는 것과는 거리가 멉니다......  사람들이 그에게 사랑으로 응답하지 않으면 그는 무시무시해집니다. 사랑은, 이 격언으로 신과 인간 사이에서 옳은 판단을 내릴 수 있습니다.


"사랑은 그 무엇보다도 가장 이기적인 감정이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상처받게 되면 가장 관대하지 못하다.   콩스탕 B.Constant의 말입니다.


이 음악이 나를 얼마나 개선시켰는지 당신은 벌써 아셨을 테지요? "음악은 지중해처럼 되어야만 한다" 이 정리를 말할 만한 몇 가지 이유들이 있습니다<선악의 저편> p220(276~277). 자연과 건강한 명랑과 젊음과  덕으로의 회귀!가 그것들입니다. 그런데 나는 부패할 대로 부패한 바그너주의자 중 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나는 바그너를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아아! 그 늙은 마술사 그가 우리를 속여가며 보여준 것은 전부 다 무엇이었단 말입니까! 그의 예술이 우리에게 제공한 첫 번째 것은 확대경이었습니다. 그 안을 들여다보면 사람들은 자신의 눈을 믿지 못합니다.


모든 것이 거대해지고 바그너마저도 거대해집니다...... 이 어떤 교활한 방울뱀이란 말입니까! 이 뱀은 우리 앞에서 '헌신' , '충실' , '순수'를 먼저 딸랑거리며 삶 전체를 위장시켜 버렸고, 순결을 찬양하면서 부패한 세계에서 자신의 몸을 빼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뱀의 이런 점을 믿었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당신은 내 말을 듣지 않겠다고요? 바그너의 문제가 비제의 문제보다 더 마음에 든다고요? 나 역시 바그너의 문제를 폄하하지는 않습니다. 그것도 나름대로의 마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구원이라는 문제는 그 자체로 존경할 만한 문제이며, 이것만큼 바그너가 심사숙고한 것은 없습니다. 그의 오페라는 구원의 오페라이며, 언제든 누군가가 그의 곁에서 구원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때로는 어느 젊은 청년이 때로는 어느 젊은 처자가 말입니다. 이것이 바그너의 문제인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의 '주도동기Leitmotiv'를 얼마나 다양하게 변모시키는지! 얼마나 진기하고도 얼마나 심오한 조바꿈들인지! 바그너가 아니라면 누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겠습니까?


편애하는 순진한 처녀가 자기가 각별히 관심을 갖는 죄인을 구원한다는 것을 <탄후이저의 경우>. 또는 영원한 유대인도 결혼하면 정착하게 되어 구원받게 된다는 것을 <방랑하는 네덜란드 사람의 경우>.  또는 낡고 찌든 여인의 방은 순결한 젊은이에게 구원받기를 선호한다는 것을 <쿤드리의 경우>.


또는 아름다운 소년은 바그너주의자 기사에게 구원받는 것을 가장 좋아한다는 것을 <마이스터징어의 경우>. 또는 결혼한 여인 역시 기사에 의해 구원을 기꺼워한다는 것을 <이졸데의 경우>.  또는 '늙은 신'이 모든 면에서 도덕적인 타협을 하고 난 다음에 결국에는 자유정신과 비도덕주의자들에 의해 구원받는다는 것을 <반지의 경우>.


당신은 특히 이 마지막 것이 품고 있는 깊은 의미의 경탄한다는 말이지요! 그 의미를 이해한다구요? 나는 그 의미를 이해하지 않으려 조심하고 있습니다...... 나는 앞서 언급한 작품들로부터 다른 설교들이 도출될 수 있다는 점을 반박하기보다는 차라리 그 점을 증명하고 싶습니다.


 바그너의 발레는 사람들을 절망에 이르게 할 수 있다는 점을 그리고 덕에 이르게 할 수 있다는 점을! 또 한번 <탄호이저의 경우>.  그것이 제시간에 잠자리에 들지 않아서 생기는 가장 나쁜 결과들 중 하나일 수 있다는 점을 다시 한번 <로엔그린의 경우>.  정말 누구와 결혼했는지를 결코 정확히 알아서는 안된다는 점을 세 번째로 <로엔그린의 경우>.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완벽한 남편을 찬양합니다 그 남편은 어떤 경우에라도 단 하나의 물음을 가질 뿐입니다.

"그런데 왜 당신은 미리 내게 말하지 않았는가? 그것이 제일 간단한 것인데!"

대답 :

"나는 그것을 당신에게 말할 수도 없어요. 그리고 당신이 물어보았을 그것을 당신은 절대 경험할 수 없을 거예요."


<로엔그린>은 탐구와 물음에 대한 엄숙한 금지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바그너는 "너는 믿어야 하며 믿지 않으면 안 된다" 라는 그리스도교적 관념을 대변하는 것입니다. 학적이라는 것은 지고의 것과 가장 거룩한 것에 대한 범죄 행위이지요......


< 방랑하는 네덜란드 사람>은 여자가 가장 불안정한 자도 안주시킨다는 바그너적으로 말하자면 '구원한다'는 숭고한 가르침을 설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실례를 무릅쓰고 질문을 하나 던질 수 있습니다.


즉 그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렇다고 그것이 이미 바랄 만하다는 것입니까? 라고요. 한 여자가 숭배하며 안주시키는 '영원한 유대인'은 어떻게 됩니까? 그는 단지 영원하기를 멈추었을 따름입니다. 그는 결혼을 한 것이고 우리와는 더 이상 아무 상관도 없게 됩니다.


현실적으로 바꿔 말하자면 예술가들의 위험이자, 천재들의 위험은 (그리고 이들이야말로 '영원한 유대인'입니다) 여자이지요. 숭배하는 여자들은 그들에게는 불운인 법입니다. 자기 자신이 신으로 대우받는다고 느끼면서도 영락하지 않는, 구원당하지 않는 강한 성격은 거의 한 사람도 갖고 있지 못합니다.


그들은 즉각 여자의 뜻대로 해주고 맙니다. 남자는 '영원한 - 여성'에게 약하기 마련입니다. 이 점을 여자들은 알고 있습니다.


여자의 사랑의 많은 경우가, 그리고 다름 아닌 가장 가장 유명한 사랑에서 사랑은 좀 더 섬세한 기생parasitismus에 불과합니다. 즉 한 낯선 영혼에 눌러 앉는 것, 때로는 한 낯선 육체에 눌러앉는 것일뿐입니다. 아아! 그 숙주는 항상 얼마나 많은 부담을 지는 것인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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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에서 3장 낭독하여 영상으로 만들었다. #플래시몹_낭독회는 8월과 9월 두 달 동안 방학을 하기로 했다. 어쨌든 방학이라는 말만 들어도 마음이  여유로워진다. 살면서 이런 기분, 설레는 느낌을 느낄 수 있어서 좋다. 벙학을 샤량해~! #형이상학_낭독 도 덩달아 같이 방학이다. 그래서 또, 방학을 샤량해~~!! 이다. 즐거운 방학을 보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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