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니체전집 제15권 <바그너의 경우> 1~3장에 대한, 내 생각과 파리 하계 올림픽에 관한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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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가 비제의 오페라 <카르멘>에서 다루는 "사랑"에 관하여 "철학자들에게 어울리는 유일한 사랑에 대한 이해"라고 말한 이유는 이러할 것이다.
바그너가 '헌신' , '충실' , '순수'라는 낭만주의적 사랑의 주제들을 다룰 때, 비제는 인간의 근원을 다루었다. 이것은 모두 '구원'이라는 공통된 테마를 가진다. 그런데 그것을 다루는 방식에서 보자면, 니체는 비제가 바그너보다 더 세련되고 인간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또한 바그너가 도덕과 신에 대해 다룰 때, 비제는 인간의 욕망을 다루었다는 것이다. 바그너적인 로맨틱 러브는 모두 신화와 민담을 차용하고 각색한 것이다. 그러니까 니체는 바그너를 음악가가 아닌 연출가라고 보고 있고 오히려 사상가에 가깝다고 본 것이다. 그 자신의 미학적 이념을 음악극에 투사하여 바그너적 이상 세계를 구현한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바그너적 오페라와 무대와 극장은 근현대의 극장산업과 영화산업에 영향을 지대하게 주었다. 어떤 면에서 보자면 바그너가 현대의 문화산업과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포문을 열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니체가 바그너의 오페라를 비판하는 이유는, 낭만주의가 인간을 본능을 약화시킨다고 보았기에 비판한 것일 것이다. 낭만주의를 보급시키고 낭만주의의 중심에 있었던 바그너이니까 말이다. 이 낭만주의야말로 허무적염세주의라고 니체는 생각한다.
이에 반해 니체는 구원의 문제에서 바그너와는 다른 관점을 가지고 접근한다. 니체가 "철학자들에게 어울리는 유일한 사랑에 대한 이해"라고 말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보인다.
비제는 도덕과 신이 아닌 인간의 정념을 다루었고, 인간이 사랑하는 방식 그 자체를 다루었다. 그러니까, 비제는 바그너적인 구원, 백마 탄 기사가 구원해 주는 환상의 수동적 사랑이 아니라, 능동적인 의지를 가진 인간의 사랑을 다룬 것이다.
인간은 이타적으로 사랑하지 않고 이기적으로 사랑을 한다. 즉 본능적 질투에 대해 다루었고, 그 끝은 파국이다. 비제가 다룬 것은 신적인 구원도, 백마 탄 왕자의 구원도 아니다. 비제는 비극을 다루었다. 비제는 사랑의 본질이 비극에 있음을 밝힌 것이다. 바그너적 신의 하강의 구원이 아니라, 인간의 몰락을 다루었다. 몰락한 인간만이 구원받는다. 돈 호세는 몰락한 인간이다. 그만큼 그 자신을 잘 볼 수 있는 자는 없다. 그는 바로 몰락에 의해 구원받는다. 비로소 멈출 수 있었기 때문이다. 길이 끊어졌기 때문이다. 멈추어야 방향전환이 가능하다. 그것이 바로 니체가 말한 '우회로'의 의미일 것이다.
그럴 때 길이 보이기 때문이다. 몰락한 인간을 보며 관객은 안도의 한숨을 쉰다. 안전한 거리에서. 이것이 비극의 효과다. 그 자신을 보게 하는 것. 그런데 바그너는 인간에게 환상을 심어준다.
니체는 비제가 사랑의 본질을 다루었기에 "철학자들에게 어울리는 유일한 사랑에 대한 이해"라고 말한 것이다. 왜냐하면 철학자는 본질을 보는 자이고 이면을 보는 자이기 때문이다.
비제의 음악은 이러한 비극에 대한 것을 잘 느끼게 해 준다. 그렇게 사람은 더 깊은 곳까지 도달할 수 있게 된다. 가 보지 않았고 도달하지 못한 곳에 이르게 한다. 니체는 비제의 <카르멘>에서 사랑의 본질을 파악한 것이다.
"큰 문제들이 거의 포착됩니다. 세계가 마치 산 위에서 내려다보듯 내려다보입니다. 그리고 돌연 해답들이, 힘들이지 않고도 저절로 내 손에 들어옵니다"
이 문장을 보면, 이것은 정상위에서 세상을 볼 수 있는 전방위적 관점이 생겼다는 의미로 보인다. 사랑의 본질, 인간의 본질이 그 자신의 피부처럼 가슴에서 생생하게 느껴졌던 것이 아닐까. 또한 니체는 비제의 오페라를 보고 들으면서, 어떤 직관의 상태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라고 보인다. 그리고 니체는 마침내 그 모든 것들의 이면을 깨달아 버렸던 것이지 않을까.
그리고 니체는 그 자신이 바그너와의 대척점에 서게 된 원인을 더 명징하게 파악했을 것이고, 자기 자신을 보게 된 것이며, 바그너와 비제의 확연한 대비를 통하여 그 자신이 가는 방향성 또한 더 또렷해졌을 것이다. 니체는 몰락한 자였다. 그렇게 그는 인간이 되었고 막다른 길에서 방향전환이 가능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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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하계 올림픽 '개막식'은 어쩌면, 니체의 <바그너의 경우>를 그대로 구현한 공연이 아닌가 싶다. 또한 바그너의 음악극의 재현이 아닌가 싶다.
나는 개막식을 보면서, 니체의 <바그너의 경우>를 그대로 모사해 놓은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또한 니체 철학과 바그너 음악극을 구현시킨 개막식이라고 생각했다. 파리 하계올릭픽 개막식 철학은 니체의 <바그너의 경우> 1~2장의 언어들을 그대로 각색하여 무대 위에 풀어놓은 것이고, 파리 올림픽 개막식 공연 무대 구성 형태는 바그너의 음악극 형태를 구현한 것이 아닐까 싶다. 이를테면 '환상'을 구현한 바그너적인 음악극의 형태에서. 파리에 대한 환상을 불러일으킬 만한 그런 모티브를 차용한 것이 아닌가 싶다.
실존과 환상은 우리 삶에 겹쳐져 있다. 파리 하계 올림픽 개막식은 니체철학과 바그너의 연출을 결합한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 공연이라고 생각한다. 이 두 요소가 결합될 때, 고대 그리스의 '디오니소스 제전'이 생명력을 얻게 되는 것이니까 말이다.
그러니까 니체의 <바그너의 경우> 1장과 2장이 파리 하계 올림픽 개막식 대본인 셈이다. 아마도 백마를 타고 오륜기를 전달 임무를 맡은 이는 '위버맨쉬적 초인'을 상징하는 것일 것이다. 다음 인간이며 미래다.
파리 올림픽 개막식은 '디오니소스 제전' 방식을 모티브로 했다고 여겨졌다. 바그너 역시 자신의 음악극 공연에 '디오니소스 제전'을 참고했다. 그리스 비극이 모티브 이기도 하였다. 그랬기에 니체가 초반에는 바그너주의자가 된 것이다. 하지만 점차로 바그너가 비극과는 거리가 멀어진 대본과 음악으로 공연을 했기에, 니체는 바그너와 척을 지게 되었고, 끝내 결별하게 된 것이다.
니체는 <카르멘>에서 '성性'에 대한 증오를 드러내었다고 보았다. 책에서는 '성性'이라고만 쓰여 있기에 더 자세한 설명은 포함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카르멘>을 참고할 때,
'성性'은 'sexuality'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단순히 남녀라는 구별 개념이 아닌, 사회학적 젠더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고 보인다. 물론 그 당시에는 '젠더'라는 개념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고대 그리스를 참고하면, Homosexuality와 queer는 본질에서는 같지만, 양상은 다르다. 전자가 도덕적이고 소유적이라면, 후자는 성 정체성 해방에 가깝다고 보인다. 여기서 'Homosexuality'를 그리스적 동성애로 국한했을 때, 도덕은 그리스적 시대의 도덕을 가리킨다. 그리스적 동성애는 그 시대에 통용되는 도덕에 포함되어 있다.
[오늘날 동성애를 칭하는 용어인 Homosexuality는 어원적으로 그리스어 접두사 ομο-(homo-)와 라틴어 sexualis에 접미사가 붙어 변형된 것이며 "같음"을 뜻하는 접두사 Homo-와 "성"을 뜻하는 "Sexuality"가 결합됐다. _나무위키_]
파리 하계 올림픽 개막식에서 'queer'문제를 전면화시킨 것은, 파리 패션산업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문화예술의 심장을 자처하고(세계도 인정하는...) 있는 파리로서는 가장 합당한 방식의 개막식 형태였다고 보인다.
파리 올림픽 개막식을 간단하게 표현하자면,
니체 철학을 실현한 파리 올림픽 개막식
자연을 아름답게 하라 ->
과학을 아름답게 하라 ->
문화문명을 아름답게 하라! ->
인간을 자유롭게 하라!
라고 말한, 니체철학을 이행한 것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나는 파리 올림픽 개막식 공연을 이렇게 보았다.
반면에 올림픽은 선수들이 기량을 최대한으로 발회할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고 보며, 또한 스포츠와 경기장의 신기술과 디자인 역시 선보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해서, 문화예술 축체를 올림픽처럼 돌아가며 치르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해봤다.
한 나라의 모든 문화예술의 역량이 집결된 세계인의 축제를 고대 그리스처럼 치러보면 어떨까? 엄청난 시너지 효과가 생기지 않을까? 파리 올림픽 개막식이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었다면? 그것으로 충분히 훌륭하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