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 안의 모든 근육과 신경이 욱신거리는, 말을 들을 수가 없어 음악을 듣는다. 말이 피부에 와닿으면 따끔거리며 아프다. 음악은 무리 없이 스며온다.
시시포스의 나날 같다. 한 고비 넘으면 또 한 고비.
무안 항공기 사고의 원인은 무엇일까?
모든 추측이 봉쇄당했다.
12·3 밤 11시 5분 무렵에 계엄령 뉴스를 접할 때, 순간 왼쪽 관자놀이에 두통이 왔고 신체의 왼쪽만 몸살이 걸리는 느낌을 받았다. 바로 남아 있던 감기약 한 포를 먹었다. 그렇게 괴롭게 잠복하던 그 감기가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 그 감기는 내 몸 안에서 마치 지옥에서 몸부림치는 것 같은 이미지로 나에게 온다. 어떤 지옥을 지나가고 있나 보다.
감기가 오기 전에는 내가 힘을 내야지, 기운을 차려야지, 정신 차려야지 했다. 누군가들이 진행하고 있는 방송을 듣다가 방송이 끝나면 '무'의 진공 상태만 남는 것 같았다. 그다음은 뭘 해야 하지? 도무지 모르겠는 그런 순간 멈춤이 있었다. 이내 다시 다른 방송을 찾아들어야만 안심이 되었다. 손에 잡히지 않는 일상에서도 청소를 하고 밥을 먹는다. 그다음은 도무지 깊게 들어가지 못한다. 생각해 보면 이런 증상은 계엄 이전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어떤 진공 상태에 있는 것처럼.
무안 비행기 사고를 뉴스로 접하며, 나는 공작이 아닐까? 하는 불안이 있었다. 그래서 뉴스 화면을 더 자세히 보았다. 왼쪽 엔진이 방귀 뀌는 그 모양은 그냥 불꽃을 포함한 연기였다. 비행기가 지난 후 동그란 연기만 남아 있었다. 내가 더 추측해 보았자 그것은 알음알이만 키우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어떤 압박이 있다. 나 안에서 느끼는 고강도의 압력.
언제 애도를 표해야 할까? 일주일 안에만 하면 될까? 이런 고민과 함께 감기가 왔다. 치과와 어깨 염증 치료도 미뤄졌다. 무엇보다 애도는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애도다운 모습이 될까? 애도해야 할 일상을 몇 년에 한 번 꼴로 당하는 사람들의 일상. 그리고 또 지금 이 시간에도 죽고 있는 사람들. 애도해야 하는 마음도 시간 안에서 연습이 되어 관습을 이행하거나 그 관습을 더 우리 안으로 바짝 밀착시킨다. 애도 앞에서 얼음처럼 굳어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어렵다고 느끼는 나에게, 자기의 감정을 넘어서서 한 자 한 자 써 내려간 인고의 말들은 애도의 태도에 대해 말해주고 있었다. 더 또박또박 쓰면 감정이 행간에서 머물며 이미지를 만든다.
고통과 고독과 아픔과 슬픔은 그렇게 새기듯 써 놓은 글에서 더 이미지화된다는 것을. 그 이미지가 나를 괴롭힌다는 것을. 막연하지 않고 구체적인 행동을 촉구하고 있다는 것을.
그래서 나는 예전 박근혜 탄핵 촛불집회 때처럼, 다른 사람들이 생산한 방송과 글에만 의존하지 않고, 내가 글을 생산하여 나의 의문과 맞서야지. 나를 회복해야지였다. 내가 기운을 내야지라고 하는 말의 의미는 바로 그것이었다. 그런데 감기가 지옥처럼 찾아왔고 나는 불안이 아니라 무기력의 원인들을 골골대며 찾아본다. 오히려 집중하여 글을 써 보는 것이다.
그동안 글을 쓰면 이 생각과 저 생각이 저녁노을 섞이듯이 섞였다. 하나의 글이 아니라 온통 혼돈의 도가니였다. 글을 써도 올리지를 못하고 혼자 자체 검열하며 망설이다, 미완성으로 멈춰 버리는 것이다. 도대체 누구를 의식하고 있는가? 바로 나다.
나는 오늘 12월 31일 저녁 무렵에 내과를 갔다. 주사를 엉덩이에 맞았고 처방전을 가지고 가서 약국에서 감기약 5일 치를 지었다. 지금은 쌍화탕과 가래제거제와 감기약을 먹었다. 나는 살아 있으니 아프고 지옥처럼 들끓으며 내뿜던 신경의 열이 잦아드는 것을 느낀다. 죽음이란 이 모든 것과 상관 없어지는 것일까? 죽음만큼 사람을 진공상태로 내모는 것은 또 없을 것이다. 생과 사의 경계가 한계에서 멈춰 버리면 죽음인 것일까? 죽음의 상태는 이쪽 아니면 저쪽처럼 극단적이다.
어떻게 말을 하고 인간의 감정이 가득한 눈빛이 순간에 무가 되어버릴 수 있단 말인가! 그 지독한 진공 상태를 우리는 얼마나 더 겪으면, 그런데 그것이 끝나지 않을 것이란 믿음에서 나는 편안히 이불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 내일 눈 뜨지 못할 거라는 그런 따위에 두려움은 애초에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잠들기 전 몇 차례 잠으로 이끌려 들어가는 그 밀물은 또 얼마나 공포스러운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달콤하고도 위험한 잠을 매일 잔다. 마음의 어수선함과 눈으로 보는 세상과 그 많은 불쾌한 소식과 아슬아슬한 곡예와 같은 일상의 뉴스들, 살아 있기에 오늘을 숨 쉬는 자들이 누리는 고통이다.
한 번도 짐작도, 생각해보지 않았을 방식으로 2024년 12월 29일 무안 공항 제주 항공기 사고 당일에 그분들은 얼마나 공포와 싸우고 있었을까. 그렇게 어떠한 시도도, 조난 당해 구조를 바랄 기회도 주어지지 않은 채로, 왜 그렇게 죽음으로 직행해야 했을까? 왜 신체훼손된 죽음은 인간 정신에 비수를 내리꽂는 충격을 동반하는 것일까? 그들은 아무 잘못이 없다. 지금 여기서 나만의 의문과 신체 무기력과 싸우는 나도 아무 잘못이 없다. 모두 아무 잘못이 없다. 그렇다면 도대체 누가 잘못인가? 모두 관계로 엮여 있는 이상 그 관계의 강도만큼, 얽힘만큼의 그 두께만큼 책임이 있다.
12월은 깊은 달이다. 이미 그 깊은 밑바닥에 나는 내던져져 있다. 그렇기에 더는 깊이를 느끼지 못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더 깊어질 수 없는 깊이의 밑바닥 한복판에 있다. 더 깊게 응시하려 해도 신경의 곤두섬만 남아 있다. 그렇다면 섞이는 그것을 넓게 보고 이것과 저것이 세포증식처럼 기이하게 확장되어도 그런가 보다 해야 할지도. 그것은 이미 중심이 없이 중심을 만든다. 나의 애도는 내가 세상을 눈으로 보는 것보다 나의 신체가 먼저 반응한다. 그가 베란다 바닥을 맨발로 걸을 때, 내 종아리에 그 타일의 차가움이 먼저 전해져 내가 먼저 움찔하듯이. 신체에 관해 정말 잘 모른다. 그런데 항상 먼저 가 있다.
2025년 1월 1일에 31일 글 올리고 있다. 결코 익숙해질 수 없는 참사, 이 무거움에 순응하게 만드는 참사, 벗어나려 해 보았자 갈 곳이 없다. 이 무겁고 엄중한 시간을 각자의 방식으로 견뎌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