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 1> 12장, 의연함에 관하여
*본문 단락을 재구성하였다. 내가 이해하기 좋도록.
몽테뉴는 과감함과 의연함에 대해서 말하는데, 플라톤의 대화편 『라케스』를 인용한다. 소크라테스는 라케스와의 대화에서 ‘호메로스’적 관점에 입각하여 말한다. 소크라테스는 ‘용기란 적들과 맞서 자기 열을 굳게 지키는 것’이라고 정의한 라케스를 놀리며 말했다. “적들에게 자리를 내어 줌으로써 쳐부순다면 그것이 비굴한 일인가?” 그러고는 아이네이스의 도주 기술을 찬양했던 호메로스에 대해 말하였다.
라케스는 생각을 바꿔 스키타이인들이 흔히 그렇게 도망친다고 말하며, 결국 기병들에게는 그것이 일반적인 행동임을 인정하였다.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그 어느 나라보다 굳게 버티며 싸우도록 훈련시켰던 스파르타의 보병을 예로 들었다.
스파르타 보병은 ‘플라타이아이 전투’ 때 페르시아의 보병 밀집 부대를 돌파할 수 없자, 흩어져 퇴각하는 전술적 꾀를 냈다. 도망치는 줄 알고 적이 따라오게 만들어 밀집된 덩어리를 흩트리기 위함이었다. 그렇게 스파르타 보병은 승리를 얻었다.
몽테뉴는 전쟁에서 흔한 상황인 포격전 중에 적의 포대가 이쪽을 향해 이미 조준한 뒤에는, 적의 포탄을 맞을까 봐 자리에서 움직이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포격의 강력함과 빠르기로 볼 때 피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럴 때 손을 쳐들거나 고개를 숙이는 행동들은 공연히 동료들에게 웃음거리가 된다고 말한다.
몽테뉴는 이에 상반된 예시를 또 하나 든다.
“카를 5세가 프로방스로 우리(프랑스)를 치러 왔을 때, 아를을 정탐하러 온 ‘구아스트 후작’은 마을에 접근할수록 몸을 가려 주었던 풍차의 엄호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그때 원형 경기장 위를 거닐고 있던 본발의 영주들과 아주누아의 판관들에게 들키고 말았다.
그들은 포병대장인 빌리에 영주에게 ‘구아스트 후작’의 위치를 알렸다. 포병대장이 어찌나 정통으로 장포를 후작을 향하여 조준했던지, 대포에 불을 댕기는 것을 본 후작이 한쪽으로 몸을 던지지 않았다면 필경 포탄이 후작의 몸에 명중했을 것이라고 한다.”
몽테뉴의 이렇게 두 예시를 살핀 후 이렇게 말한다.
“사실 나는 그런 행동들이 의식적인 것이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게 갑작스러운 상황에서 포의 조준이 높은지 낮은지 어떻게 판단할 수 있단 말인가? 운수가 그들의 공포에 유리하게 작용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고 한편으로 다른 경우에는 같은 동작이 포격을 피하기는커녕 오히려 그 안으로 뛰어드는 짓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게 더 쉽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화승총 터지는 소리가 귀를 후려쳐도 나는 떨지 않을 거라고 자신할 수 없다. 나보다 훨씬 용감한 사람들조차 떠는 것을 보았으니 말이다.”
몽테뉴는 이어서 그 자신의 생각을 피력한다.
스토아학파도 그들 현자의 영혼이 불시에 그를 덮친 광경이나 상황에 처음부터 저항할 수 있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자연의 속박에는 굴복할 수밖에 없듯 현자도 하늘이나 무너지는 건물이 내는 굉음에는 지고 만다. 그들 역시 그런 상황에서는 핏기가 가시거나 손발이 오그라든다고 인정한다.
다만 그들은 정념에 대해서도 그렇고 마찬가지로 그의 판단력이 건전하고도 완전하게 유지되는 것이며 이성의 토대가 눈곱만큼도 영향을 받거나 변질되지 않을 뿐이다. 단지 자신의 공포와 고통에 전혀 동의하지 않을 뿐이다.
현자가 아닌 사람은 공포에 동요하지만, 그다음에는 정념의 작용이 표면에만 머무르지 않고 이성의 자리 잡고 있는 곳까지 파고든다. 그리고 이성을 오염시키고 부패시킨다. 그리고 그 정념에 따라 판단하고 정념에 순응하게 된다.
몽테뉴는 스토아학파의 ‘베르길리우스’ 글을 인용한다.
“아무리 눈물이 흘러도, 그의 영혼에는 흔들림이 없다” (베르길리우스)
아리스토텔레스 학파의 현자도 마음의 동요를 면치 못한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다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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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테뉴는 그 누구라도 긴급하고 급작스러운 위험과 공포 앞에서는 마음에 동요가 일지 않은 사람은 없다고 말한다. 다만 그 이후의 그 자신의 대처에서 현자와 현자 아닌 사람의 차이가 있다고 말한다. 누구나 똑같이 당하는 문제에서는 첫 신체와 정신 반응은 같을지라도 그에 연동되어 일어나는 마음의 동요를 다스릴 수 있는가? 없는가? 의 차이에 따라서 그 이후를 대처하는 태도가 바뀌기 때문일 것이다. 요동치며 출렁이는 정념을 따르지 말고 침착하게 그 자신의 이성적인 판단력에 의하여 공포에 질리고 고통스러워하는 마음을 통제해야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전쟁이나 재난 또는 누군가의 죽음 그리고 하물며 사소한 일상에서도 마음의 동요는 쉽사리 일어나게 된다. 서로 간의 의견 차이에 의해서도 마음은 금세 동요한다. 그때에는 한 호흡 숨을 들이마시고 내시며 자신의 호흡을 조절하며 정념이 가라앉도록 해야 한다.
또 한편으로는 정념이 솟구치는 그 상황을 의도적으로 사용할 수도 있다. 아마도 <에세> 10장에 등장하는 1세기 로마의 웅변가이며 작가였던 ‘카시우스 세베루스’ 같은 경우일 것이다. 그는 그때 그 자신이 연설을 할 시에 상대방의 공격이나 또는 반론 및 질문이 들어오면, 그 순간에 ‘충동’적으로 솟구치는 정념의 힘을 활용했을 것이다. 그 충동적으로 올라오는 정념의 힘과 함께 직관도 활발하게 작동하였을 것이라고 추론해 본다.
카시우스 세베루스는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크레타 섬에 유배되었다고 하는데, 아마도 필시 그의 말 때문이었을 것이다. 충동을 잘 사용하면 창작의 에너지 또는 상대의 힘을 역이용할 수도 있지만, 잘못 사용하면 정념에 의해 과격해질 수 있다. 그러나 황제에게 유배되었다면 아마도 바른말 또는 숙이지 않는 기개에 의한 것일 수도 있다. 바른 말과 기개는 돌격하는 용맹에 필요한 덕목이지만 우회로적인 유연함이 없다면 그 자신을 해칠 수도 있다. 적과의 싸움에서는 일단 이기면 되지만, 그 자신을 포괄하고 있는 자신보다 더 큰 힘과의 부딪힘에서는 쉽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