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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의 사유

자신과의 대결 2021, 몽테뉴의 괴물 같은 글에 대한 사유 2025

by 아란도


책을 읽을 때 문득문득 밀어닥친 공포가 있다. 그러다 그건 글쓰기에 대한 불안함으로 이어진다.

내가 생각한 것들이 세상에 과연 필요한 것일까?

마치 아버지 없는 아이를 세상에 내놓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미혼모가 아이를 뱃속에 품고 있을 때 이러한 심정일까?

아이를 낳아서 세상에 내놓고 잘 돌볼 수 있을까? 하는 심정... 은 바로 이러한 것일까?


이런 생각이 들자 바로 다른 생각 절차 필요 없이 마리아가 떠올랐다. 얼마나 가깝고도 편한 예시인가. 신적인 느낌이 주는 모든 것은 모든 것을 다 떠 넘겨도 부담 없는 존재가 있다는 것. 과거의 어느 시대라면 신성모독이다 뭐다 했을 것이지만, 지금은 그저 해석일 뿐이다.


인간은 자기 안에서는 모두 자웅동체적이다. 그러나 표면화되면 그것은 어떤 식으로든 어떤 분화를 거치게 된다. 어떤 형태로든 결정된다는 의미이다. 현실에서는 이 문제를 형상적으로 바로 접하기 때문에 토씨 하나에도 서로 감정이 뒤틀려 버리기 쉽다. 그러니 복희 씨를 떠올려도 좋으리라. 중성적인 것에 대하여.


이런 예시들이 있어서 나는 참말 좋다. 우리 안에서는 형상과 상관없이 정신적으로 모두 이러한 예시들에 대해서 이미 감각하고 있다.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겉으로 드러나는 것에서는 양상을 달리한다. 어떤 형태로든 결정되어 분화되기 때문이다. 구분의 특징은 역할적으로 고착화되기도 한다. 이러한 고착화는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기도 하지만 점차로 굳어서 허물어야 하는 성벽이 되기도 한다. 새로운 땅을 개간하도록.


자기가 처한 세상에 대한 역겨움, 구토증, 자기 환멸적 경험은 새로운 것을 갈망하게 만든다. 새로운 세상이 필요해졌다. 인간은 그 세상에 들기로 결정하고 나아간다. 새로운 세상을 만들도록.


내가 내 안에서 부딪히는 벽, 미혼모의 고통, 신(텅 빈 고독)의 부재, 불가능한 지점들의 혼돈, 결국 단독자로 맞서야 하기 때문에 고립감에 사무치게 되는 것. 허허벌판에 홀로 서 있는 느낌. 나아갈 수도 물러설 수도 없는 고립무원의 느낌이 바로 신의 부재함을 자각하는 지점인 거 같다. 이걸 감당하고 나아가는 것.


인간이 느끼는 자기 글쓰기의 시간에서 느끼는 막막함은 결코 붙잡히지 않는 언어들에 대한 갈증인지도 모르겠다.


다른 저자들이 표현한 것에 대해 나의 이해, 내 방식으로 몸에서 알게 될 때(경험하게 될 때), 그때 동시적인 전율이 온다. 같은 것이라는 일치성에서 오는 전율이 있다. 자기 생각이 타자의 표현과 일치된다는 자각을 얻으려고 우리는 공부한다. 책을 읽는다. 자기 확신과 자신감을 부여받아 나아가도록.


그리고 이내 자기 언어를 만들어 가는 것. 그것은 비현존하는 것이어야 한다. 즉 다른 통로를 개척하는 것이고 다른 방식으로 보는 것이다. 자기가 본 바를 의지하며 그것을 구실 삼아서 실타래를 풀어나가는 것이다. 이것이 차이이다. 같은 것을 다르게 보는 것에서 문제인식이 시작된다. 그리고 그 문제인식하는 방식에서 접근하는 방식이 달라진다. 그러나 표현의 방식은 시대마다 다를 수 있다. 현존하는 사회에 영향받기 때문이다. 그 시대의 현재성과 같이 가기 때문이다. 차이라는 것은 바로 그 차이이다. 같은 것의 다른 버전, 더 세밀하게 풀어내거나 더 다른 표현을 찾거나. 인간 각자의 경험치는 다르고 사유하는 방식의 언어도 다르다. 그러므로 자기표현의 언어가 다른 것뿐이다. 그 언어를 차이 나게 하는 것이 차이다. 그러나 우리 머릿속은 언제라도 일치성을 좇고 있고 일치성을 찾아낼 지름길을 원한다. 시간의 효율성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로 진행되는 것은 언제라도 돌아가는 방향을 취한다. 머릿속을 표현하려면 많은 전제들을 거쳐야 한다. 하나를 이해하고 표현하고

설명하려면, 머릿속의 앎과는 다르게 부차적인 것들을 거친 후에야 가능하다. 연역의 머릿속과 인식의 표현은 그 차이가 있다. 연역은 한 줄이면 될 것을 인식은 책 한 권도 부족하다. 그리고 그것마저 완결은 아니다. 미완의 완성이다.


내 머릿속의 미혼모는 마리아로 치환된다. 남편 없이 아이가 생기는 것은 곧 사유의 출처가 광범위하다는 것이다. 마리아의 고통은 곧 완성물에 대한 불확실성이다. 예수는 그 불확실성을 증명할 필요가 있었고, 그는 끝까지 갔다. 자신을 증명하는 길. 결국 사건을 키울 수밖에 없었다. 세상일이란 것이 그렇다. 무엇인가의 부재와 결핍을 보충하려면 증명해야 하고 벗어나야 하고 커짐으로써 가능하다. 그건 사건의 단위를 키우는 것이다. 세상에서의 예시는 드러나 있다. 현존하는 것의 실존은 피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 역시 내가 생각하는 이러한 사유의 결과물에 대한 불확실성에서 보자면, 결국 사건을 키우는 쪽으로 가게 될 수밖에 없는 거 같다. 그 사건은 나에게 내 생각을 정돈해 내는 것이다.


한편으론 이리 써놓고 보니, 사람은 태어나면 각자의 운명을 긍정하는 형태로 진행된다. 선택적 긍정이 아닐 수 없다. 책도 그러하지 않을까?

내가 고민한 문제들, 내가 살면서 세상에서 보고 당면했던 문제들, 그것들에 대해서 비판하고 대답을 해보는 과정에서 나는 이러한 문제 직면이 우리 삶의 근본 문제라고 여겨졌다.


나는 그래서 서양책을 읽는다. 언어를 이해하고 내 언어화로 변성시키기 위해서다. 그런데도 언어는 내 언어로 잘 들어오지 않아서 고통스럽고, 또 내 표현을 내가 잘하고 있는지도 의문이어서 고통스러웠다. 읽어도 내 것 화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언어는 다른 방식으로 내게로 돌아온다. 문득문득 직관에 의해서 다른 언어로 내게 온다. 읽은 책의 언어가 아니라 내가 이해할 언어로 온다. 그것은 나의 전이해이자 내가 몸으로 체험한 내 경험에 의해서 정신적으로 온다. 그것을 붙잡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붙잡아서 내 표현화 시켜야 한다고 여긴다. 그러나 그 작업에서 나는 망설이게 된다. 왜 망설이게 되는 것일까.


현학적 표현들에 대한 내 안의 거부가 있다. 익숙하지 않은 것을 사용하면서 아는 체하거나 먹고 체할까 봐 겁이 난다. 비난받기 두려운 회피도 있다. 그리고 현학적 표현들에 대하여 연결 어미들의 부자연스러움이 내 안에 도사리고 있다. 그래도 사용한다. 언어는 자꾸 사용해야 자기화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일상에서 사용하려고 읽기 때문이다.


이야기의 전개가 뚝뚝 끊어져 있다. 그것을 연결해야 하는 내 언어 생성에 대한 시간 소여도 있다. 시작하지 않아서 인지도 모르겠다. 시작하면 연결될지도 모른다. 내 안에 도사린 어려운 글과 쉬운 글의 충돌이 있다. 쉬운 글은 무엇인가? 다 생략한 글이 쉬운 글인가. 어려운 말을 쓰지 않는 것이 쉬운 글인가. 그것은 아마도 문장의 형태에 있는 것은 아닐까. 뇌 훈련이 되지 않는 글이 과연 좋은 글인가. 이런 의문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메모된 생각들이 산재해 있다. 나는 내 머릿속을 정리해 낼 수 있을까? 두려운 마음이 앞선다. 그러나 이걸 하지 않으면 나는 평생 후회할 것이다. 그래서 한다. 쓰는 것과 쓰고 싶은 것을 써야 한다는 것은 다르다는 것을 알겠다. 나는 쓰고 싶은 것이 있어서 쓴다. 그것이 내 인생의 임무처럼 다가오기 때문이다. 오랜 내 짐을 이제 내려놓고 싶기 때문이다. 알음알이 되던 것들을 나만의 지식화로 변성시키는 것만이 내 머릿속을 해방시키는 일이 될 것이다.


들뢰즈는 자기 철학을 익살의 철학이라고 하였다. 선불교적인 동양의 사상을 그는 거부하지 않았다. 그래서 익살이라 표현한 것일 것이다. 만남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자웅동체적인 정신세계를 가지지만, 현실에서 만나지 않고 홀로 무엇인가가 생성되는 것은 없다.


들뢰즈는 자기 철학을 enculage라고 표현했다. 뒤를 파고들어 가 자기 것 같을 뿐 아니라 기이하고 색다른 '새끼'를 낳는다는 의미라고 한다.


이 표현은 얼핏 들으면, 그 자신의 철학이 기이한 것이라는 인상을 준다. 그만큼 정상적으로 전달되는 표현은 아니다. 그런데 굳이 그렇게 표현한 이유는 무엇일까? 동시대에서 눈에 보이는 방식으로는 접근할 수 없었던 방식이라는 의미이지 않을까. 들뢰즈가 추구한 선험성을 생각해 본다면 그건 모두 눈에 드러나지 않는 것에 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미혼모(마리아)에 빗대어 말한 내 심정적인 절망에서 나는 벗어나는 중이다. 인간은 모두 이 심정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무엇이든, 인간의 실존 자체가 그렇게 규정지어져 있기 때문이다. 세상과의 연결은 그 자신이 먼저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해야 되는 것인지는 모두 어느 정도는 막막하다. 길을 보려면 투시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현시대에서 사유한다는 것은 들뢰즈와 대결을 의미한다고 하는데, 나는 나와의 대결에서 이기는 중이다. _2021/03/14_




___________ 2025/03/14


오늘은 이 글에 이러한 첨가를 한다. <에세 1>를 읽으며, 28장 '우정에 관하여'에서 몽테뉴는 이렇게 써놓고 있다.


"내가 데리고 있는 화가가 작업하는 것을 유심히 보다가 그를 따라 해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는 벽면마다 그 한가운데 가장 좋은 자리를 골라 자기 재주를 다 쏟아부어 공들여 그린 그림을 배치한 다음, 다채롭고 기이하다는 것 외에는 아무 매력이 없는 환상적인 그림들로 주변의 빈 공간을 채운다.


사실 여기 있는 이 글들도 기괴하고 괴물 같은 것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우연 말고는 아무 질서도 연결도 조화도 없이, 확실한 형태도 없이 제각각인 사지를 기워 붙인 기괴하고 괴물 같은 몸뚱이들 아닌가?


몸은 아름다운 여인인데, 물고기 꼬리로 끝난다. - 호라티우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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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가가 그 자신이 주되게 공들여 그린 외의 그 주변을 환상적인 비현실적 그림들로 채우거나, 또는 추상적으로 채우거나 또는 무의 공간으로 여백 처리하거나 등에 있어서 보자면, 이것은 우리의 정신도 그런 방식을 취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인간의 정신도 주된 것이 거주할 공간이 필요하고 그 주변은 환상이 채운다. 배경처리는 솔직히 아무것이라도 상관은 없다. 다만 환상적인 느낌은 좀 더 천상의 느낌과 가깝다. 그것은 어디로부터 왔을까.


몽테뉴는 그 자신의 글을 가리키며, "기괴하고 괴물 같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우연 말고는 아무 질서도 없고, 연결도 조화도 없이, 확실한 형태도 없이 제각각인 사지를 기워 붙인 기괴하고 괴물 같은 몸뚱이'라고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사실 모든 글은 몽테뉴의 표현처럼, 기괴하고 괴물 같은 것이다. 니체는 호메로스의 서사시를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표현했다. 시가 하나의 세계 창조라면, 서사시는 어떤 편집된 세계다. 몽테뉴는 그 자신의 글쓰기를 편집된 형태라고 말하고 싶었겠지만, 편집은 근래의 용어이므로, 몽테뉴의 표현에 더 중점을 두어야 한다.


산문은 그 자체로 편집된 글이다. 산문은 마치 몽테뉴식 표현에 의하면 프랑켄슈타인인 것이다(몽테뉴는 '인어'라고 생각한 듯하지만). 지금의 생각에 과거의 기억이나 역사적 자료와 격언이나 인용이 끼어들어 있다. 그것들은 원래는 모두 분리되어 있는 것이다. 상관관계없이 놓여 있는 흔적들이기도 하다. 하지만 몽테뉴라는 저자에 의해 그것들은 가치 쳐진 후에 알맞게 한 자리에 모여 배치된다. 그것은 마치 "제각각인 사지를 기워 붙인" 형태가 된다. 아무 관계가 없는 각 시대의 이야기들이 몽테뉴에 의해 한 자리에 모여 새로운 몸으로 재탄생된 것이다. 그러니 "기괴하고 괴물 같은 몸뚱이"이가 된 것이다. 반면에 이 괴물은 어떤가? 프랑켄슈타인은 여러 개의 죽은 몸에서 취사선택되어 만들어진 괴물 같은 몸뚱이를 가지고 있지만, 그는 선하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을 인간이라 생각하고 있고 인간의 마음으로 행위하기 때문이다. 몽테뉴의 책도 선하다. 왜냐하면 무엇인가를 한데 모아서 그 자신의 에너지를 부여하여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무엇인가를 만들 때는 그것이 완성되기 전에는 넝마더미 같고 기이하고 흉축할 수도 있다. 옷도 마찬가지다. 옷은 끝단까지 다 마무리가 될 때, 어느 순간 옷이 된다. 그전까지는 그것은 옷이 아니다. 하지만 이러한 괴물 같은 과정을 감내할 수 있는 이유는, 인간은 먼저 형태를 상상하기 때문이다. 그 형태에 대한, 완성된 모양에 대한 감각이 이미 있기 때문에 그 괴물의 과정을 아무렇지도 않게 건널 수 있다. 하지만 상상한 형태와 실제로 완성된 형태는 다를 수도 있다. 손끝의 차이일 수도 있고 재료의 차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미 가지고 있는 형태에 대한 감각은 이미 형이상학적인 사랑이어서 그것은 이입된다.


몽테뉴가 말한 자기 글, 글의 형태야 말로 '에세'라는 말에 가장 부합한 것 같다. 나는 그래서 문득, 내 생각에는 '에세'라는 말은 라틴어에서 차용된 말인 것 같다. 몽테뉴는 겸손하게도 유년시절에 배운 라틴어를 학교에 다닐 나이 때쯤에는 다 잊어버렸다고 말하지만, 그는 라틴어를 종종 그의 글에 사용한다. 에세라는 말도 라틴어의 존재에서 온 말이라고 나는 추론해 본다. 'Essais'는 프랑스어로 테스트, 실험, 시도 등으로 해석된다고 한다. 나는 라틴어 'Est' '~이다'는 곧 존재이기도 하므로, 어떤 유사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에세는 겉으로는 그 자신의 변화를 기록하는 형태이지만, 역사, 문화, 종교, 예술, 예절, 시 등에 걸친 방대한 서사시라고 보아야 하니까 말이다. 곧 존재함에 대한 가록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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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첨언한 내용은 몽테뉴와 연관되므로, 몽테뉴 메거진에도 따로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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