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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켄슈타인적 글쓰기

몽테뉴의 글쓰기 방식/ 28장

by 아란도 Mar 15.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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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세 1>를 읽으며, 28장  '우정에 관하여'에서 몽테뉴는 이렇게 써놓고 있다.


"내가 데리고 있는 화가가 작업하는 것을 유심히 보다가 그를 따라 해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는 벽면마다 그 한가운데 가장 좋은 자리를 골라 자기 재주를 다 쏟아부어 공들여 그린 그림을 배치한 다음, 다채롭고 기이하다는 것 외에는 아무 매력이 없는 환상적인 그림들로 주변의 빈 공간을 채운다.


사실 여기 있는 이 글들도 기괴하고 괴물 같은 것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우연 말고는 아무 질서도 연결도 조화도 없이, 확실한 형태도 없이 제각각인 사지를 기워 붙인 기괴하고 괴물 같은 몸뚱이들 아닌가?


몸은 아름다운 여인인데, 물고기 꼬리로 끝난다. - 호라티우스- "


______


* 화가가 그 자신이 주되게 공들여 그린 외의 그 주변을 환상적인 비현실적 그림들로 채우거나, 또는 추상적으로 채우거나 또는 무의 공간으로 여백 처리하거나 등에 있어서 보자면, 이것은 우리의 정신도 그런 방식을 취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인간의 정신도 주된 것이 거주할 공간이 필요하고 그 주변은 환상이 채운다. 배경처리는 솔직히 아무것이라도 상관은 없다. 다만 환상적인 느낌은 좀 더 천상의 느낌과 가깝다. 그것은 어디로부터 왔을까.


몽테뉴는 그 자신의 글을 가리키며, "기괴하고 괴물 같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우연 말고는 아무 질서도 없고, 연결도 조화도 없이, 확실한 형태도 없이 제각각인 사지를 기워 붙인 기괴하고 괴물 같은 몸뚱이'라고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사실 모든 글은 몽테뉴의 표현처럼, 기괴하고 괴물 같은 것이다. 니체는 호메로스의 서사시를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표현했다. 시가 하나의 세계 창조라면, 서사시는 어떤 편집된 세계다. 몽테뉴는 그 자신의 글쓰기를 편집된 형태라고 말하고 싶었겠지만, 편집은 근래의 용어이므로, 몽테뉴의 표현에 더 중점을 두어야 한다.


산문은 그 자체로 편집된 글이다. 산문은 마치 몽테뉴식 표현에 의하면 프랑켄슈타인인 것이다(몽테뉴는 '인어'라고 생각한 듯하지만). 지금의 생각에 과거의 기억이나 역사적 자료와 격언이나 인용이 끼어들어 있다. 그것들은 원래는 모두 분리되어 있는 것이다. 상관관계없이 놓여 있는 흔적들이기도 하다. 하지만 몽테뉴라는 저자에 의해 그것들은 가치 쳐진 후에 알맞게 한 자리에 모여 배치된다. 그것은 마치 "제각각인 사지를 기워 붙인" 형태가 된다. 아무 관계가 없는 각 시대의 이야기들이 몽테뉴에 의해 한 자리에 모여 새로운 몸으로 재탄생된 것이다. 그러니 "기괴하고 괴물 같은 몸뚱이"이가 된 것이다. 반면에 이 괴물은 어떤가? 프랑켄슈타인은 여러 개의 죽은 몸에서 취사선택되어 만들어진 괴물 같은 몸뚱이를 가지고 있지만, 그는 선하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을 인간이라 생각하고 있고 인간의 마음으로 행위하기 때문이다. 몽테뉴의 책도 선하다. 왜냐하면 무엇인가를 한데 모아서 그 자신의 에너지를 부여하여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무엇인가를 만들 때는 그것이 완성되기 전에는 넝마더미 같고 기이하고 흉축할 수도 있다. 옷도 마찬가지다. 옷은 끝단까지 다 마무리가 될 때, 어느 순간 옷이 된다. 그전까지는 그것은 옷이 아니다. 하지만 이러한 괴물 같은 과정을 감내할 수 있는 이유는, 인간은 먼저 형태를 상상하기 때문이다. 그 형태에 대한, 완성된 모양에 대한 감각이 이미 있기 때문에 그 괴물의 과정을 아무렇지도 않게 건널 수 있다. 하지만 상상한 형태와 실제로 완성된 형태는 다를 수도 있다. 손끝의 차이일 수도 있고 재료의 차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미 가지고 있는 형태에 대한 감각은  이미 형이상학적인 사랑이어서 그것은 이입된다.


몽테뉴가 말한 자기 글, 글의 형태야 말로 '에세'라는 말에 가장 부합한 것 같다. 나는 그래서 문득, 내 생각에는 '에세'라는 말은 라틴어에서 차용된 말인 것 같다. 몽테뉴는 겸손하게도 유년시절에 배운 라틴어를 학교에 다닐 나이 때쯤에는 다 잊어버렸다고 말하지만, 그는 라틴어를 종종 그의 글에 사용한다. 에세라는 말도 라틴어의 존재에서 온 말이라고 나는 추론해 본다. 'Essais'는 프랑스어로 테스트, 실험, 시도 등으로 해석된다고 한다. 나는 라틴어 'Est' '~이다'는 곧 존재이기도 하므로, 어떤 유사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에세는 겉으로는 그 자신의 변화를 기록하는 형태이지만, 역사, 문화, 종교, 예술, 예절, 시 등에 걸친 방대한 서사시라고 보아야 하니까 말이다. 곧 존재함에 대한 가록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 이 글은 '마리아의 사유' 글에 첨언 형태로 쓴 글이다. 글을 쓰는 방식, 그 형태와 모양이 완성되기까지에서 사람이 겪는 온갖 자기혐오적 감정들, 그리고 어떤 중심점으로 결국 정렬하게 되지만, 어떤 글을 쓸 때는 불쑥 솟아오르는 어떤 형태적 감각에 의해서일 때가 많다. 그러한 느낌을 글로 쓰는 것이지만  그 글이 완성되기까지는 그 주변에는 모호한 환상 혹은 안개로 둘러싸이게 된다. 선명함은 그런 모호함에 둘러 쌓여서 오히려 얼핏 얼핏 길을 보여준다. 어떤 책을 읽더라도 늪지대를 지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드러나고자 하는 글은 모호한 안개처럼 표현되는 배경 글들과 받침 글들에 의해 의미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렇게 드러난 의미들이 늪지대를 무사히 건너갈 마른땅이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무수한 글자들은 드러나 있지만 의미는 은폐되어 있다. 한 권의 책에서 찾아내야 할 것들, 책 사이에, 단락 사이에, 글자  사이에 숨겨진 것들, 그러한 보물을 찾아 떠나는 여행은 멀리 갈수록 가까워지는 것이지만, 때로는 부유하는 느낌도 받는다. 너무 멀리 온 것만 같은. 하지만 들어온 문과 나가는 문은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깥은 똑같은 바깥일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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