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시민의 새로운 정치실험들은 실패가 아니라, '씨'를 뿌렸던 시간이었다
유시민의 발언은 합당하다고 본다. 한 시절 같이 노동운동하며 생사고락을 같이 했던 이가 배반을 하고 다른 정당으로 떠나서 국회의원이 되었어도 유시민은 예전에 함께 했던 정리를 잊지 않아서 전화를 했지만, 그 사람의 부인은 유시민을 사무적으로 또는 타인을 대하듯이 했다. 이미 멀어져 있었고 멀게 대했다.
명목상으로도 이미 끝난 관계였지만, 유시민은 그때에서야 심정적으로 그들과 관계를 끊은 것으로 보인다. 얼마나 허탈하고 함께한 지난 시간이 위선적으로 느껴졌을지에 대해서, 그 자신을 스스로 자책하고 원망했을지도 모른다.
유시민에게 그런 시간들이 어디 한두 번이었을까? 나는 유시민에게 도움 될지 안 될지 몰라서 지난 6개월 간, 우리나라에 펼쳐진 새로운 민주주의 현상에 대하여 유시민과 연계하여서는 말을 아꼈다.
리버럴의 상징인 유시민이 시도했던 많은 실험들이 지금의 우리 사회에 새로운 리버럴을 정착시켰다고 본다. 유시민의 새로운 정치실험들은 실패가 아니라 '씨'를 뿌렸던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유시민의 실패가 현재의 민주주의를 새롭게 구성할 수 있었던 동력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지난 시간들과 현재를 연결시켜 보면 왜 그러한지는 확연하게 드러나고 명확해진다. 역사의 관점에서 보면, 유시민의 정치실험은 실패가 아니라 대승적인 희생이었다고 본다.
언제나 눈앞에 현실 만을 우리는 본다. 하지만 어느 순간, 시간은 우리를 어딘가와 연결시키고 그 시간 동안에서 우리가 숨 쉬고 있었고 우리가 지속하고 있었음을 깨닫게 만든다. 지난 6개월 간은 우리 모두에게 그런 시간이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 말을 그때 글로 쓰고 싶었지만, 지금의 유시민에게 필요한 말일지 아닐지를 내가 판단하기는 그렇고 하여, 쓰지 않았다. 내가 이런 생각을 했던 것은 계엄 내란이 일어나고 한 두 달 안에 들었던 생각이다. 어느 순간에 어느 시간과 연결되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속적으로 어떤 시간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자유에 대한 것 빼면 별로 남는 것은 없다. 그런데 그 자유가 지극히 상식에 기반하고 이성에 기반한 자유가 아니라면 그것은 이미 방종이고 레일을 떠난 기차와 같아서 탈선이다.
나는 설난영의 말을 듣고 문학적이고 이쁜 소녀 또는 이쁜 여자가 밤 사이에 다 얼어 죽었나 보다고 생각했다(나는 설난영 발언의 농도가 다소 교양이 떨어 진다고 느꼈다. 영부인이 되어서는 안 되는 저속한 발언이라고 생각했다. 김문수 선거 운동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거라 생각했다. 표 깎아 먹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지만 굳이 말려야 할 필요도 없었다).
설난영의 발언이야 말로 노조와 노동자를 지금의 그 자신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반증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일반인(노조에 가입되지 않은 사람이나 가입해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은연중에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생각을 대선 후보의 부인이 발언하고 있는 모습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것은 역차별적 발언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설난영이 하고 싶었던 말은 노조 위원장도 부드러운 '사람'이라는 것을 역설하고 싶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나는 설난영의 발언에서 그런 부드러움을 전혀 발견할 수 없었다. '나 이런 사람이야' 라는 자기 과시 외에는 그 무엇도 없었다는 게 맹점이라면 맹점이었다.
변절이란 바로 그런 풍경을 연출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 부부가 '변절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를 만천하에 노출하는 순간이었다.
유시민이 분노하는 지점은 바로 이 지점이었을 것이다. 가만있어도 용서가 될까? 말까? 한데도 불구하고 설난영의 발언은 도를 한참 넘었기 때문이다. 유치하다 못해 민망해서 손발이 오글거리게 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일종의 구토를 부르는 것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저격 들어가야 하는 것이 맞다. 그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다 알고 있는 산 증인들이 버젓하게 다 살아 있는데도 불구하고 산 증인들을 죽은 사람처럼 대했기 때문이다.
유시민이 가만히 있었다면 유시민은 스스로 그 자신을 용서하지 못했을 것이다. 변절자들이 누릴 자유치고는 그 자유가 너무 사치스럽고 경망스러웠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치욕을 안겨주기 때문이다. 자유를 삶에 가져오려고 희생한 무수한 영령들에게 면목이 서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노동 운동을 팔아서 김문수가 얻은 것들, 그 옆에 설난영, 그리고 그 여자의 발언은 묘하게 히스테리적이다. 따지듯이 말하는 그 여자의 톤이나 말의 내용은 허망함이 짙게 묻어나는 것 같다. 아마 연극으로 만든다면 독백으로 처리해야 할 것이다. 과연 그 여자의 발언은 누구를 향하고 있었을까? 그때 그 여자 앞에 앉아 있던 사람들? 내 생각에는 아마도 대상이 없는 공허한 말이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그저 자기 인생이라는 허공에 던지는 말 이외에 그 무엇도 아닌, 정말 아무것도 아닌 말이었다고 본다. 그 여자의 발언은 관객에게 허무함을 불러 일으키는 대사일 뿐이다. 저 여자가 지금 무슨 말을 혼자 떠들고 있는 것일까.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심한 부끄러움을 유시민에게 안겨준 대사였다고 본다. 그 여자의 행동이나 말들은 그 여자 인생에서 집약되어 나온 것이다. 유시민이 지적한 것은 바로 그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유시민이 노동자와 여성을 비하했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한참 잘못짚었다고 생각한다.
유시민은 인간의 행로에서 한 사람이 만들어져 갈 때, 한 사람의 완성도의 관점에서 판단하고 비판한 것이라고 본다. 덜 된 사람들로 늙어 버렸다는 것을, 그 허무함을 비판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유시민은 그것이 슬펐던 것이라고 보며, 바로 그 지점에서 분노한 것이라고 본다. 유시민의 분노와 '할'이 국힘당과 내란 세력에 우리가 크게 분노한 것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유시민에대하여 #유시민_새로운리버럴의_씨를_뿌린_사람
#유시민의_정치실험은_실패가_아니라_대승적인_희생
#유시민의_이성적판단은_의리를_중요시한다
#유시민이_겪었을_무수한_고통이_그를_정치가_아닌_작가로_살게_했다고_본다
* 사진은 모셔 온 사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