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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적 지지, 그날의 약속은 지켜져야 한다

지금은 이재명, 철학 있는 자

by 아란도

#詩적지지 '그날의 약속은 지켜져야 한다. 지금은 이재명'

*2022/02/22에 쓴 글이다. 지금의 이재명은 3년 전의 이재명에게는 미래다. 3년 전에 했던 약속은 지금 지켜져야 한다. 우리는 이미 미래에 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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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적이란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거기에는 흘러옴과 흘러감이 있다. 그러니 시란 흐르는 것이다. 저기에서 이리로, 이곳에서 저곳으로 마구마구 흘러가는 것이다.


때로는 이런 억하심정이 들던 때도 있었다. 그래 너희들도 너희들이 미는 사람 대통령 되어 보아라, 그러면 마구마구 씹어주마!라고 피울음 짓던 때도 있었다.


그런 울분들이 우리 안에서 휘몰아치며 우리 안에서 사정없이 스크래치를 낼 때도 있었다. 이제 그런 울분들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 그 많던 피맺힘은 다 어디로 숨어버린 것일까.


삭히고 가는 시간 동안 그 피멍들은 어떤 다른 것의 모양으로 변화했어야 했나 보다. 그것은 쓰기 민망하여 잘 안 쓰는 말이지만 분명하게 자기의 형체를 때때로 선명하게 드러내곤 한다.


정치에서 미학적인 순간을 발견하거나 전해올 때 그것은 다른 순간들과 마찬가지로 반응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쪽 모듈과 저쪽 모듈을 연결시키기 때문이다. 무수한 모듈들을 순간에 관통하는 것은 바로 환희감과 함께 떠오르는 사랑의 감정이다. 그것이야말로 내 안의 화해를 스스로 도모하도록 하는 것이다.


미움과 증오를 삭히면 사랑이 될까? 아니다. 사랑이라는 동력원을 깨달았기 때문에 미움과 증오가 용해되는 것이다. 문제는 바로 이 지점이다. 미움과 증오를 계속 발산만 하였다면 그래도 과연 어느 순간 미움과 증오가 사랑에 용해될 수 있을까. 발산보다는 수렴에서 의식은 뭔가를 결정한다.


모두 명칭이다. 사랑도 미움도 증오도 원망도 모두 명칭이다. 이미 개념은 언어 저 너머에 있었다. 단지 필요에 따라 명칭을 붙였을 뿐이다. 이념도 그러하다. 필요에 따라 이념이 붙었을 뿐이다. 우리는 모두 언어 저 너머에서 개념을 이끌어 낸다. 그러니 명칭도 그에 따라 상황 따라 붙이게 된다. 미움과 증오는 필요와 상황에서 형성된 감정이다. 무엇인가 맞지 않았기에 쌓인 감정이다.


그렇다면 명칭에서 벗어나 언어 저 너머의 개념에 접근해 보자. 거기에는 무엇이 있나! 시가 있다. 그것은 몸으로 구현되는 세계이다. 몸으로만 관통하는 세계이다. 시가 무엇인가? 몸은 관절로 행위를 분절한다. 몸의 분절에서 언어의 분절이 파생한다. 그 분절에서 의미가 튀어나온다. 언어 저 너머의 세계는 모든 것이 뒤섞여 있는 무의미의 세계다. 언어의 분절을 통하여 의미가 드러난다. 그러므로 시는 무의미이면서 동시에 의미의 세계이다.


삶은 행위의 분절이며 행위의 분절은 언어다. 언어의 분절은 시다. 그러므로 이들은 모두 무의미의 영역과 직접적인 연결을 이루고 있다. 그래서 시는 무의미다. 시가 직관의 영역인 것도 바로 그 이유일 것이다. 시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이지 자기가 시를 찾아가는 것은 아니다. 직관이 자기에게로 오는 것이지 자기가 직관을 찾아가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의식은 거대한 무의식의 바다에 한 점 떠올라 있는 연꽃과 같다. 그만큼 의식은 인간의 정신 형성에서 나중에 형성된 것이다. 그러니 이 의식은 모든 것을 결정해 놓으려고 한다. 에너지 낭비를 최소화하려는 의도일 것이다. 해서 의식이 자꾸 개입하는 것은 인간을 피곤하게 한다. 자의식이 강해지는 이유도 뭔가 상황이 원활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거대한 방향 전환이나 어떤 결정은 지금과는 다른 것으로 새롭게 세팅을 하는 것이어서 반드시 의식의 개입이 필요하다. 사람은 그 자신의 인생에서 어떤 결정을 할 때 의식을 모은다. 긴장하는 것이다. 신경이 사방을 예민하게 탐색하게 된다. 그 긴장도를 끌어올리는 일은 상당히 에너지 소모가 크다. 그러니 오래 지속할 수 있는 방식은 아니다. 어쨌든 의식은 이 방식을 통하여 어떤 결정을 하곤 한다. 그리고 다시 이완되는 것이다.


한편으론 의식이 어떤 곳에서 계속 에너지를 흡수하고 있다면, 그것 역시 긴장 상태다. 무의식에서 의식이 에너지를 빼오는 일은, 지식을 충전하는 것과 같고 몸으로 관통하는 것과 같다. 철학자들이 탐색하는 영역은 대체로 이 지점인 것 같다. 인간이 그 자신의 성장을 이루는 방식이기도 하다. 직관의 영역에서 어떤 정보를 빼오는 것 그 자체가 바로 개념을 빼오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니 詩적인 것이란 바로 이러한 것을 의미한다. 무의식이 도대체 무엇일까? 선험적인 것도 무의식이지만 자기 안에 층층이 쌓인 기억도 무의식이며 또한 집단 안에 쌓인 기억도 무의식이다. 그러니까 무의식은 잠재의식이면서도 접속하는 것의 원천으로서 기억의 총량과 같은 것이다. 자기가 접속하는 무의식이 무엇인가에 따라서 미래는 그 방향으로 기투한다.


그러니 연설이 詩적인 연설이 되려면 미래로 기투해야 하는 것이다. 그럴 때 과거는 그 방향으로 정렬한다. 예를 들자면, 미래로 쏘아 올린 동막골의 이야기는 바로 현재에서 미래로 쏘아 올린 메시지이다. 국민과 지지자들에게 하는 연설은 같은 것이면서도 조금은 다른 차이가 있다. 국민은 미래의 존재이며 지지자는 현존하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현존하는 존재들에게는 화합을 약속하고 미래의 국민들에게는 안녕을 보장하는 것이다. 동막골 메시지는 현재에서 미래로 보내는 타임캡슐이다. 평화에 대한 열망과 화합에 대한 의지는 미움과 증오를 용해하는 '사랑'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호소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짧은 콩트에는 국민과 지지자들에게 보내는 <약속>이 담겨 있다.


감성이 살아 있다!라는 것은 바로 그 시간 안의 간극을 이해하고 있다는 의미다. 누구보다 시간의 변화에 대해서 잘 이해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래서 '철학 있는 자!'이다.





내 나름대로 나만의 생각을 써 보았다. 아직 덜 여문 생각이지만 지금 이렇게 떠오르므로 그대로 옮겨 보았다. 그러고 보면 같은 내용일지라도 다양한 변주를 통하는 것 같다.


어쨌든 변화하는 심정을 기록하는 것은 필요한 일인 것 같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약속>은 지켜져야 한다는 것이다. 지지자들의 분별은 각자의 몫이다. 더 이상 스크래치를 보는 것보다는 앞을 보기로 한다. 앞으로도 모두 그렇게 흘러야 할 것이다. 특정한 인칭 주어 없이 그저 쓴 글은 내 생각을 중점 하여 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미 특정 인칭 주어는 드러나 있다고 여긴다.






#詩란무엇인가_직관이란무엇인가_시적연설은_과거와_미래를_현재에서_소통하게_한다


#인간은_詩이다 #삶은_詩이다 #삶을_사는_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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