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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란도 Aug 29. 2023

사색

발자크의  '고리오 영감'을 읽었던 어느 날





정오가 다가올 무렵, 매미 소리를 경청하였다. 빛가리개를 반쯤 걷어서 위에 고정하여 놓았었는데 아예 고착화된 상태로 있다. 바람에 나부끼는 모습을 볼 때마다 어떤 상념이 든다. 마치 잃어버리고 있던 저 깊은 곳의 기억을 깨우듯이.


한잔 하는 여름날의 그 어느 날이다. 눈앞에 보이는 서가를 보며 본능의 염려를 다독여본다. 저어기 서가에 꽂힌 책들을 쓴 이들의 감정과 생각과 삶이 모두 순일하기만 했겠는가. 평탄한 인생길을 걷기만 했겠는가. 만약 그랬다면 저 책들은 내 서가에 꽂히지도 않았을 것이며 책으로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묘한 위안이 된다. 서가 앞에 앉아 있으니. 인간의 본능은 안락을 꿈꾸며 안주하기를 기대한다. 그리고 몸은 그 상태를 자족하려 한다. 그러나 책들은 말한다. 인생에서의 길은 거기에 있지 않다고 한다. 본능을 넘어서는 지금, 이겨내는 그 마음의 순간에 있다고 말한다. 감정을 격상하는 충일함으로 인해 두려움은 멀어져 간다.


철학책이 어려운 이유는 무엇일까. 그 책의 오타 교정은 볼 수 있으나, 그 내용에 있어서는 누군가가 편집을 해서도 안 되고, 또 편집할 능력도 안 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 자신만이 편집이 가능한 것이란 바로 한 개인의 관념이 사상이 된 순간이다. 그것을 누가 편집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러니 생각은 그 자신만이 다듬어 낼 수 있다.


또 한편으로는 철학은 그 자신의 심연에서 이끌어 낸 사유라서, 수동성의 방향을 취하고 있다. 그래서 그 방법론은 인식론적인 설명 방식을 취한다.


존재론적인 것을 세밀하게 묘사하듯이 풀어서 논리적으로 설명하려면 언어가 수동태 형태가 된다. 이 수동태 형을 능동태로 바꾸어 버리면 그 고유한 심연의 움직임이 사라져 버린다. 맛이 사라진다. 그 느낌이 사라져 버리면 비록 이해되었다고 할지라도 그건 그 느낌이 거세된 상태라서 그것과의 접속된 것은 아니다. 연결이 끊어진 것이다.


철학의 수동태형 문장은 인과적이고 그렇기에 논리적인 형태의 당위성인 '이것이 있으면 저것도 있다. 이기도 하며, a이면 b이다.'라는 그 관계의 연결을 꾸준히 드러내게 된다.


이것이 수동태형 문장의 묘미이다. 수동태 문장은 말이 길어진다. 그래서 어렵게 다가온다. 뭔가 꼬고 또 꼬아 놓은 느낌이기 때문이다.


메커니즘을 언어로 설명하는 방식은 소설에서 배경이나 인물의 심리를 집요하게 묘사하는 것과 같다. 관찰된 것을 지루하도록 따라가 보는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엄청난 역동성의 에너지가 있다. 다만 그 자신은 기록자이므로 따라만 가서 구경만 하는 것과 같다. 그 자신이 어떤 행위를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단지 보고 온 것을 기록만 하는 것이다. 그 자신이 거기서 뭔가 행위를 한다면 집중도는 시들고 놓치게 되기 때문이다.


어쩌면 단테의 <신곡>도 이러한 메커니즘에 관한 이야기를 드라마 형식의 에피소드로 만들어 저승 여행을 여행자 또는 순례자 형태로 풀어놓은 은유가 아닐까 싶다. 우리가 어디를 여행하거나 순례할 때 능동적인 형태보다는 수동적인 형태를 취할 때 더 깊게 그 여행이 자기에게로 들어오는 것도 같은 이치일 것이다.


그저 느끼고 보고 듣고 생각하여 그 자신의 내면에 새기고 그걸 토대로 사유해 갈 때 그것은 심연의 바닥으로 가라앉아서 비로소 뿌리를 내리기 때문이다. 발아된 것은 어느 날 문득 그 자신에게서 피어날 것이고 그걸 자기 안에서 재발견하는 것이 실재적 경험 혹은 깨달음이기도 하다. 새로움은 거기서 피어난다.


피드백 없는 메아리들이 울리는 시간들... 그렇다. 피드백을 받을 수 없는 이유는, 그것에 대해 평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철학을 누가 평가할 수 있단 말인가. 그것도 개인이 심연에서 건져 올린 철학을.


철학이 어려운 이유는 그것에 대해 누가 편집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저 교정 작업이 있을 수 있을 뿐이다. 그 자신 외에는 글을 수정하거나 교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철학자들이 대체적으로 문학적 글쓰기를 훈련하는 것은 아니다. 문학가와 철학자의 차이라면 바로 그 지점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고뇌는 해볼 수 있다. 철학과 문학의 언어교배로서 교집합을 찾을 수는 있다.


발자크의 <고리오 영감>을 읽으며 드는 생각이다. 글을 쓰는 이들에게 무한한 영감을 주었겠구나 싶다.  


이 책을 읽으며 문학과 철학과 인간과 삶과 진부함과 수치심과 불행과 허영과 가난과 그리고 인간이 갖는 저마다의 감정선이 상황에 대처하는 복잡 미묘함이 왠지 슬프다는 것에 대해서, 온갖 생각들이 스치고 지나간다. 그리고 읽어가는 동안에도 그럴 것이라고 여긴다. 하지만 기묘하게도 지적 허영을 충족시키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미묘하게 어렵게 읽히는 이유가 아무래도 독자의 머릿속에 소설의 배경과 인물을 각인시키려 애를 쓰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도 발자크가 그리 기획했기 때문일 것이다.


여름날 매미 소리와 함께 소설의 배경과 현재 읽는 시간대가 기묘하게 잘 맞아떨어지는 느낌이었다.







#발자크_고리오영감



책 포장지 이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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