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카티와 아프릴리아의 색채
엔진의 배치 형태를 말하는 알파벳 L과 V의 형상을 상상하면 쉽다. 트윈은 실린더 개수가 두 개라는 것을 뜻한다. L형 2기통 엔진, V형 2기통 엔진이라 풀어쓸 수 있다. L트윈은 90도 각도로 배치된 2기통 엔진, V트윈은 V형으로 배치된 것이면 V형이라 부르는데 실린더 간 각도는 부르기 나름이다.
L트윈이라는 이름은 사실 이탈리안 브랜드인 두카티에서 기존 V형 2기통 엔진을 부르는 V트윈과 차별화를 하기 위해 붙인 이름이다. 쉽게 말해 우린 좀 다르다는 식으로 특별해 보이기 위해 작명한 것으로 별 다른 점이 없다. 말하자면 V형 90도 배치 2기통 엔진인 셈인데, 한 가지 특별한 것은 앞 쪽 실린더가 거의 지면과 수평에 가깝게 배치되어 정말로 알파벳 L과 동일한 모양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이렇게 앞 실린더가 지면과 수평이 될 만큼 누워있으면, 가장 무거운 실린더 헤드의 무게가 앞바퀴 쪽으로 극단적으로 몰리게 된다. 즉, 앞바퀴의 접지력이 극적으로 향상된다. 이는 날카로운 핸들링 특성이나 트랙션 성능으로 이어지게 되므로 스포츠 바이크로서 매우 이득이다. 더욱이 앞 실린더를 이렇게 앞바퀴에 가깝게 눕힐 경우 라디에이터 라던지 포크의 움직임, 앞바퀴와의 간섭 등으로 기술적인 레이아웃 문제가 심각한데, 두카티는 이를 잘 해결해서 고유의 레이아웃을 만들어낸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그들 말대로 L트윈이라는 차별화된 말을 쓰는 것도 납득이 된다.
엔진음이나 트랙션 특성도 차이가 있다. 이는 사실 배치라기보다는 실린더 간 간격에 따라서도 차이가 크고, 폭발 간극에 따라서도 차이가 있는데, 간단히 비교하자면 이탈리아 스포츠 바이크 대명사인 두카티와 약간 서자 느낌의 아프릴리아의 엔진 특성에서 예를 들기 좋다.
두카티의 경우 명확히 2기통 바이크의 전형적인 트랙션 특성이 나타나는데, 아프릴리아의 경우는 V트윈인 데다 실린더 간 간격이 약 60도 정도로 비교적 좁다. 엔진 박동도 두카티의 그것에 비하면 매우 촘촘하고 매끄러워서 2기통치고는 특유의 고동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트랙션 특성도 명확한 2기통의 느낌과는 사뭇 다르며 대신 가속감이 매우 매끄럽고 거의 3기통 혹은 4기통에 가까운 회전 질감으로 고회전에서도 진동이 적게 느껴지는 것이 장점이다. 대신 2기통 특유의 펄스감이 두드러지지는 않아서 뭔가 둔탁한 2기통 느낌을 선호한다면 아프릴리아의 60도 V트윈 엔진은 맘에 들지 않을 수도 있다.
대표적으로 RSV 1000 밀레가 그러한 엔진을 가졌지만 국내에 별로 유명했던 바이크가 아니어서 아는 이는 많이 없을 것 같다. 모터사이클을 소재로 한 거의 판타지 급 영화 '토크(Torque)'에서 주인공의 애마로 등장한 RSV 1000 밀레는 나름 멋지게 묘사됐지만 아무리 그래도 두카티에 비하면 네임밸류도 적고 뭔가 서자 느낌이 강하다. 하지만 성능은 크게 뒤처지지 않으며 나름의 맛이 있는 바이크로 기억된다.
그 이후 등장한 RSV4는 60도 V트윈을 곱하기 두 배 한 느낌으로 V형 4기통이지만 이 역시 실린더 간격이 좁아서 두카티의 파니갈레 V4와는 또 다른 느낌이다. 매우 매끄럽고 고회전 질감이 더욱 매력적인 것은 사실이다.
개인적으로는 20대 초반 아프릴리아의 RS125를 몇 대 소유했던 기억이 있어서 매우 애착이 가는 브랜드다. 그중에서 한 대는 파워밴드가 전혀 터지지 않는 고자 엔진이었는데 그때의 실망감은 20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다.
아무튼 그 당시 배기량 두 배였던 RS250은 당시 가장 인기가 많았던 CBR900RR이나 슬래드(GSX-R750)도 따라간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무서운 바이크로 유명했지만, 실제로는 상대가 안 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렇다. 배기량이 깡패다.
아무튼 잡설이 길었지만 L트윈과 V트윈의 차이는 이렇고, 두카티와 아프릴리아는 모두 이탈리아 브랜드이며 2기통 엔진에 목숨 걸었던 브랜드이긴 하지만 지금은 모두 4기통을 주력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럼에도 특유의 배치 방식이라던지 피스톤 폭발 감성은 그대로여서 역시 색깔을 잘 유지하는 부분이 훈훈한 포인트다.
아, 오랜만에 쉬버 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