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박8일 무계획 모터사이클 여행
3일차_
비가 온다.
여기는 열대성 기후나 마찬가지다. 언제나 바람이 불고 언제든지 비가 오고 여름에는 태풍도 잦다. 알 수 없는 날씨 변동으로 항상 화창할 거라는 기대는 버리는 것이 좋다. 그리고 원래 예정에도 이날은 모터사이클을 반납하고(예정대로 빌렸다면) 하루 쉬어가는 날이었다. 비오는 날 모터사이클 타는 것은 선호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나는 어차피 모터사이클을 못 빌리는 처지가 됐을 뿐이다.
조금 늦잠을 자고 일어났다. 비가 오지만 하루도 허투로 보내고 싶지 않은 마음이 가득했다. 그래서 무작정 우산을 들고 또 다시 터벅터벅 길을 나섰다. 프론트에서 인사해주는 직원들을 보니 이틀전 모터사이클을 가져오면 호텔 어디에 주차해야 하냐며 꼬치꼬치 물었던 내 모습이 우스워졌다.
비는 열대성 기후답게 사방에서 뿌렸다. 내린다기보다 뿌린다는 표현이 맞겠다. 하지만 뭐 그렇게 홈빡 젖을 정도도 아니고 그냥 다 즐기기로 했다. 이런게 정신줄을 놓는다는 것인가.
호텔에서 가장 가까운 유이레일 역인 아사히바시 역은 국제거리라고 불리는 일종의 서울의 명동과 같은 쇼핑 거리가 가까운 곳이다. 그래서 주변에 호텔도 많고 관광객이 늘 붐빈다. 재미있는 것은 관광객 중에 일본인이 상당수라는 것이다. 일본 본토에서 휴가를 즐기러 온 사람들이나 특히 학생들처럼 단체가 많았다. 이따금씩 한국말도 들리고 중국말도 들렸다.(대만어일수도 있다)
이왕 이렇게 된 이상 어제부터 마음먹은 것은 역시 식도락 기행으로 마음을 바꿔보는 것이다. 나는 소바나 우동같은 면요리를 좋아하는데, 얼마 전 강남 어디선가 먹어본 자루소바(우리식으로는 판모밀 비슷하다)를 아주 맛있게 음미했기 때문에 그때 이후로 더욱 일본식 정통 소바가 매우 먹고싶었다.
그래서 찾아 간 국제거리 내의 한 소바집. 결론부터 말하면 완전 실패다. 기껏 잘쳐줘봐야 우리네 용우동이나 미소야 정도의 프렌차이즈였는데 구글 맛집에 등록이 되어서 기대했던 것이 문제다. 그냥 끼니 때우기 식밖에 안됐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밖에 나와보니 비가 점점 거세지고 있었다. 그래서 비를 피하려 잠시 옆 가게 처마에 뛰어들어갔다. 무의식적으로 가게안을 들여다보니 가죽세공 공방이 보였다.
'어차피 시간도 많은데 뭐 들어가볼까' 하는 마음으로 문을 열고 들어갔다. 참고로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니다. 귀찮아질 것 같은 일은 하지 않는다. 이 정도면 정말 마음을 놓은거다. 아무튼 거기는 젊은 청년이 가죽 공방을 차리고 한켠에서 망치로 가죽을 다듬고 있었고, 나름대로 쇼룸도 갖추었다. 가죽에는 평소 관심이 없지만 아무래도 모터사이클 관련업을 하다보니 늘 곁에서 볼 수밖에 없는 소재다.
여기는 지갑이나 팔찌같은 가벼운 장식품 정도를 만들어 판매하고 있었다. 문득 아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내의 마스코트인 리본이 있을까 찾아봤더니 몇개 있다. 두개 정도 집어들고 계산했다. 머리핀인줄 알고 샀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가방같은데 매다는 장식이란다.(아내 왈)
그러던 중 아내에게 반가운 전화가 걸려왔다. 지금까지도 내 국제 면허증을 급조해주겠노라 서울에서 동분서주 뛰어다니던 아내가 드디어 희소식을 알려왔다. 일단 면허증을 발급하기 위한 재료는 모두 모았고(이거 퀘스트인가) 문제는 발행한 뒤 어떻게 오키나와로 보내느냐였는데, 그것도 해결될 것 같다는 소식이었다.
아니 도대체 어떻게? 내가 알아본 바로 Fedex나 UPS 모두 아무리 빨라도 하루 이틀 걸리고 그것도 일본 본토나 가능한 배송시간이었다. 공항에서 오키나와로 가는 관광객 아무나 붙잡고 남편에게 이것좀 전해달라고 부탁한다고 했던 아내의 말이 생각났다. 다행히 그런 것은 아니었고 아내가 기지를 발휘해 인터넷 네이버 카페에 오키나와 여행객들이 모이는 커뮤니티를 통해 월요일에 오키나와로 떠나는 여행객을 수소문해 부탁해놨다는 것이다.
이럴수가! 그게 진짜 돼?
기쁜 마음을 안고 숙소로 돌아왔다. 습관적으로 맛집을 검색해 봤다. 근처에 괜찮은 이자카야나 오키나와 가정식이 있으면 맛보고 싶었다. 그러던 중 오키나와식 이자카야를 발견했다. 비를 대충 맞으며 걸어갔는데, 의외로 저녁시간인데도 아무도 없었다. 보통 이런 현지 맛집은 영어가 아예 안되기 때문에 좀 걱정했는데, 다행히 여긴 메뉴에 사진과 영어 설명이 있었다.
오키나와는 찬프루라는 일종의 현지식 샐러드가 유명했는데, 이상하게 그건 당기지 않았다. 재밌는건 염소관련한 메뉴들 이었다. 염소 회(사시미)를 한 접시 시켰다. 사실 염소 메뉴 중에는 염소 고환 회도 있었는데 사진으로 보이는 비쥬얼만 해도 이미 끔찍하고 허망해서(염소의 혼) 그래도 먹을 수 있는 육회를 주문했던 것이다. 고환 회 사진에는 그것으로 보이는 둥그런 살점이 여섯개 정도 있었는데 도대체 왜 여섯개나 준비했는지(여섯개 달린 건 아닐테고) 너무 무섭고 또 미안한 마음에 그 이상 쳐다볼 수 없었다.
아무튼 염소 육회는 그냥 먹을만 했다. 제주도에서 파는 말 회같은 느낌인데, 좀 쫄깃하고 지방이 있는지 질겅거리는 부분도 있었다. 아무튼 지역 전통 메뉴라니 맛배기로 먹어본 것으로 만족했다. 추가로 희안하게 생긴 메뉴 위주로 두어개를 더 시켜먹고 증류주인 오키나와 아와모리를 시켰다. 이게 생각보다 도수가 꽤 되는지 알딸딸 했다. 아무튼 도쿠리 한 병을 다 먹긴 했는데 그냥 좀 쎈 청주 느낌뿐 특별할 건 없었다.
후다닥 먹고 '내일부터는 정말 모터사이클 투어를 할 수 있는 건가!' 기대하며 숙소로 갈 참이었다. 가는 길에 꽤 큼지막한 마트(슈퍼마켓)가 있어서 들러보았는데, 사실 여기가 그래도 열대 지방이니 맛난 과일이 있을 것 같아서 사보려고 했던 것이다.
근데 무슨 말도 안되는 겨울 과일 딸기가 있질 않나 겁나 작은 몽키바나나, 굉장히 작고 달지 않아보이는 푸르스름한 땡귤이 소량으로 있을 뿐이었다. 정말 살 것이 이렇게 없나 싶어 마트를 네다섯바퀴 돌고 안되겠다 싶어 설탕캔디(이것도 오키나와 사탕수수로 만든 지역 특산물이라서)를 한 봉 사서 숙소로 왔다.
나중에 알고보니 작고 푸르스름한 땡귤이라고 했던 것이 오키나와에서만 나는 귤이라고 한다. 한번 먹어볼걸 그랬다. 그리고 설탕캔디는 딱 하나 입에 넣자마자 뱉고 버렸다. 나중에 한국에서 커피 마실때 하나씩 넣어먹을걸 그랬다.
다 한국 돌아온 뒤에 알게된 정보다.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