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부터 바빴다. 아내가 수소문으로 찾은 여행자가 나의 국제면허증을 들고 나하 공항까지 오기로 한 날이기 때문이다. 도착시간은 오후였지만 오전부터 괜시리 들떴다. 이 들뜬 마음, 한국에서 출발할 때도 그랬는데. 이제야 정말 이번 여행의 목적 달성을 할 수 있는건가!
_한국에서 황급히 날아 온 면허증
간단히 아침을 근처 소바집에서 먹고(이번 여행 8일 중 식사의 7할은 소바다) 나하공항으로 늦지 않게 출발했다. 인천공항에서 아내와 인증샷까지 찍어준 이 고마운 여행객은 이번에 친구들과 4일 일정으로 오키나와에 온다고 했다. 아내가 공항에서 떠날 때 사례를 했지만 나는 나대로 고마운 마음에 음료수라도 대접하고 싶어 미리 공항에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30분, 1시간이 되도록 입국장에 보이지 않는 이 분들. 어떻게 된걸까 연락을 한 번 더 해봐야 하나 생각하던 찰나 만날 수 있었다. 얘기를 들어보니 수화물에 문제가 생겨서 일행이 모두 수화물 찾는 곳에 발이 묶여 있다고 했다. 그렇게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아내가 힘들게 재발급 받은 국제 면허증을 건네받았다. 이제 다시 렌탈 샵으로 갈 시간이다.
_브레이크가 안 들어?
렌탈 샵에는 그때 나와 한바탕했던 직원도 있었다. 좋은게 좋은거라고 '니말이 맞았다. 한국쪽 담당자가 잘못 알려준것 같다'라고 적당히 얘기하고 렌탈 계약서를 작성했다. 당연히 그 때 내가 빌리려고 했던 기종은 못 빌리고(혼다 CB400SF 볼도르) 대안으로 계획해뒀던 바이크를 빌렸다.(스즈키 S1000GT)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지만 룰루랄라 설레는 마음으로 렌탈바이크를 몰고 숙소로 가는 중에, 아뿔사! 브레이크가 종종 말을 안 듣는 것이었다. 브레이크 호스에 공기가 차면 나오는 증상이었다. '이런 것도 체크를 안 하나' 괘씸한 마음으로 다시 바이크를 돌려 렌탈샵에 가 호소했더니 다른 바이크로 바꿔주겠다고 한다. 고장 때문에 손해 본 2시간도 배상을 요구하자 반납시 2시간은 무료로 추가금을 안 받겠단다. 더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아서 빠르게 다른 바이크를 다시 렌탈해(혼다 CB1300SF 볼도르) 숙소로 왔다. 엥? 어쩌다보니 오버리터(1000cc가 넘는 엔진을 가진) 바이크를 타고 왔네? 아쉽지만 이래저래 이 날은 어딜 가기는 너무 늦은 시간인데다 예정에 없던 비바람도 거세지고 있었다. 구글 맵에서 봐둔 동네 맛집 이자카야를 가 맥주를 마시다 잠들었다. 내일을 기약하며.
5일차_
벌써 오늘이 5일째다. 오늘부터 진짜로 바이크 투어다. 그 생각을 하니 어제 잠을 설치고 두어시간밖에 못잤다. 아침에 알람을 듣고 눈을 번쩍 떠 착착 라이딩기어를 착용하고 나가니 날씨가... 흐리고 비. 그래도 상관없다. 이젠 바이크를 탈 수 있다!
이날은 나하시를 중심으로 오키나와 남부를 돌아볼 생각이었다. 나답게 목적지같은 건 생각하지 않긴 했지만 아무튼 오랜만에 좌측 통행 도로를 타야 하고(마지막은 4년 전 홋카이도) 구글 내비게이션을 보고 가야했기 때문에 최남단 아무데나 찍어봤다.
오키나와 소바는 밀가루 제면으로 쫄깃한게 특징. 돼지고기 국물에 우동면 넣은 느낌.
_미끄럽지만 배려 있는 오키나와의 도로
오키나와의 도로는 좀 특이한 면이 있다. 일단 아스팔트의 상태가 상당히 부드럽고 나쁘게 말해 미끄러운 편이다. 이건 당연히 비를 맞으면 더욱 미끄러워지는데, 평소 낮에도 한 발로 바이크를 지탱하고 있다가 예고없이 주욱 미끌리는 경우도 종종 있다. 이건 5년 전 아내와 오키나와 투어를 왔을 때도 했던 경험이라 주의하게 됐다.
아무튼 여기도 일본이다. 교통에 대해서도 기본적인 배려가 높고, 특히 사람이나 자전거, 모터사이클에 대한 배려는 더 그렇다. 우리나라와 사뭇 다른 광경이 많이 펼쳐진다. 일본은 비보호로 우회전(우리나라로 치면 좌회전)을 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렇다보니 눈치껏 운전해야 할 때가 많다. 모터사이클은 무게가 가볍기 떄문에 가속이 빠르고 제동도 빠르지만, 비보호 좌회전 시 급히 회전할 때는 아무래도 조심스러운 면이 있기 때문에 자동차 쪽에서 배려해주는 것이 한층 고맙게 느껴진다.
또 한가지, 차로가 상당히 넓은 편인데 비해 도로에 주행하는 자동차들은 주로 소형이나 경형 박스카가 많다 보니 차로 사이 간격이 상당히 넓다. 길이 막히거나 서행 흐름 시 모터사이클이 앞으로 빠져나가기 수월하다. 그리고 교차로 정지선은 모터사이클이 자동차보다 수미터 앞에 대기하게 별도로 설정되어 있다. 대만도 이와 마찬가지였는데, 이 덕에 굳이 자동차 뒤에 배기가스 맡으며 거북이 주행을 할 필요가 없다. 우리나라에서는 눈치보며 위법해야 할지 몰라도 일본은 그렇지 않다.
원래 CB400SF 볼도르를 빌리려고 했는데 어쩌다보니 1300을 타고 있다.
_길이 없어도 간다
남부를 향해 달리는데 기분이 아주 좋았다. 날씨가 좀 흐린건 흠이었지만 오랜만에 느끼는 해방감, 거기에 오랜만의 4기통 네이키드를 타고 여행지를 달리는 기분은 끝내줬다. 구글 내비게이션의 낭랑한 목소리가 이러쿵 저러쿵 말을 걸어왔지만 기분에 취해 경치에 취해 꿋꿋이 직진한 결과 땅끝에 닿게 되었다. 그런데 갑자기 비포장로가 나온다.
멈춰서서 들어갈까 말까 잠시 고민했지만, 여행지에서 생기는 용기같은게 솟았는지 빅 네이키드로도 과감하게 달리게 됐다. 중간 중간 비내린 흙에 웅덩이가 있어 놀라긴 했지만 바이크가 좋은건지 내가 구력이 생긴건지(20년 탔으면 생길만도 하지만) 숭덩숭덩 넘고 넘어 정말 막다른 길에 다다랐는데, 지도를 보니 아예 길이 없는 곳이었다. 남는 게 시간이다보니 이런 헛고생도 즐겁다. 더 신나게 달려 돌아나왔다.
길도 없는데 잘도 왔다. 오키나와는 사람 한 명도 없는 이런 바닷가가 아주 많다. 거의 다 그렇다.
_한국인 위령탑
제대로 해안도로를 타고 평화기념공원에 다다랐다. 여기는 한국에서 사전조사할 때도 가볼까 했던 곳인데 다름아니라 태평양전쟁 때 강제 징용당한 한국인들을 기리는 위령탑이 세워져 있는 큰 공원이다. 이름도 모르는 곳에 끌려가 스러져간 젊은 청춘들을 생각하며 추모를 하고 자판기에서 뜨거운 캔커피를 하나 뽑아 마셨다. 여기가 영상 15도는 되어도 비도 오고 나름 겨울이기 때문에 달리면 쌀쌀하다. 참고로 한국은 영상이 아닌 영하 15도였다. 내가 모터사이클 여행을 오키나와로 온 이유는 분명하다. 겨울이지만 바이크를 타고 싶었기 때문이다.
가는길에 또 소바(이번엔 온소바)를 먹고 바이크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리뷰를 한다고 고프로에 대고 한참을 말했는데, 돌아와서 보니 바람소리에 묻혀 하나도 들리지 않는다. 바이크 얘기는 나중에 다른 편에서 따로 하기로 하고 여행얘기만 해보겠다. 남쪽 해안 도로를 따라 달리다 '오지마' 섬이 등장했는데, 오지마라고 하니까 왠지 가고 싶어져서 목적지를 찍고 가보았다.
_오지마 섬에서 만난 바이크 청년
정말 작은 섬이고 1분만에 한바퀴를 돌 정도로 작았지만 예쁘고 아기자기한 섬이었다. 섬을 건너는 다리 앞에 익숙한 바이크가 보여서 가까이 가봤더니 CB400SF. 카울달린 볼도르는 아니지만 내가 맨 처음에 빌리고 싶던 바이크였다. 마침 차주로 보이는 청년이 옆에서 도시락을 까먹고 있길래 세우고 말을 걸었다.
나 "안녕하세요!"
(황급히 자기 바이크를 옮겨주려 한다. 비키라는 줄 알았나보다.)
나 "바이크로 여행 중이세요?"
"하이,하이"
나 "전 한국에서 왔는데, 어디서 오셨어요?"
"오사카에서 왔습니다"
나 "이 바이크도 그럼 렌탈?"
"네, 렌탈입니다. 어디서 출발하셨나요?"
나 "나하에서요"
(CB400 볼도르 둘러보며)
나 "좋은 바이크 타네요. 원래 저도 이걸 빌리려고 했는데 1300이나 되는걸 타고 있어요.ㅎㅎ"
"아 그건 1300인가요? 와 좋네요"
나 "개인 바이크도 가지고 계세요?"
"네. YZF-R3 집에 있어요"
나 "아 정말요? 저는 바이크를 너무 좋아합니다. 직업도 관련된 거고 집에 바이크는 네 대나 있어요."
"저도 바이크를 너무 좋아해요!"
(호탕하게 웃음)
나 "언제까지 여행하세요?"
"4일 정도 하는데, 이제 바이크 반납하러 가야 합니다"
나 "아 지금요? 그럼 우리 사진이나 한장찍고 갈까요"
스물 여섯이라고 했던 친구. 난 마흔 하나라고 했더니 오- 하고는 갸우뚱 한다. 뭐 임마 왜
_니라이-카나이 다리
어색하지만 왠지 반가웠던 만남을 뒤로하고 다음 목적지로 달렸다. 이곳도 한국에서 사전조사한 곳인데 별거는 없고 그냥 다리 위에서 달리는 풍경이 멋지다고 해서 가보았다. 근데 가보니 상상 이상으로 멋지다. 약간 높은 지대에서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고가 도로가 굽이쳐 있는데, 약 10년전 오스트리아 쪽에서 알프스를 바이크로 달릴 때 느꼈던 벅찬 감동을 다시 느꼈다. 하늘에 붕 떠서 달리는 느낌이 들었다. 세우고 사진을 찍으면 안될 것 같아서 그냥 지나치긴 했지만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_소울풀한 동네 아저씨들의 이자카야
사실 전날부터 하루 일정이 끝나면 마무리로 저녁식사겸 가는 곳이 생겼다. 여기도 이제 5일차라 동네 구석구석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는데 특히 이 이자카야는 얼마전에 경험삼아 가봤던 오키나와 정통 가정식 이자카야와 달리 가성비도 훌륭하고 분위기도 현지 느낌이 물씬 나는게 맘에 들어 매일 가게 됐다.
모든 메뉴가 300엔. 번외로 400엔 짜리도 몇 개 있다. 전체적으로 가벼운 안주거리가 대부분이지만 방어, 참치, 고등어 사시미라든지 회 종류도 의외로 퀄리티가 좋고 양이 섭섭하지 않다. 그 밖에 생선 구이류나 튀김, 한국에 드문 독특한 안주도 많아서 골고루 시켜먹는 재미가 있다.
문어 초절임, 방어 사시미, 열빙어(시샤모) 구이
전통주인 아와모리도 종류가 무척 많고, 주력 음료인 맥주는 기린이나 오리온 생맥주를 시킬 수 있는데 나는 주로 오리온 생맥주를 마셨다. 생맥주라 그런지 정말 맛있고 뭔가 분위기가 취기오르는 분위기라 나도 모르게 기본 세 잔이상은 마셨다. 참고로 나는 한국에서는 맥주 한잔이면 적당, 두잔이면 과음이다. 안주도 한번 가면 6접시 이상 먹었다. 한번은 8접시를 먹었는데 혼자 술집에서 그렇게 걸걸하게 마시고 나온 건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이 집은 여행 마지막 날 밤까지 총 5번을 갔는데 한번도 아와모리를 안 마신게 좀 아쉽다. 사실 아와모리는 염소 사시미 먹을 때 꽤 마셨는데 별 감흥이 없었다. 일본 맥주는 발포주가 기본 개념이라 밍밍하고 영 안 마시는데, 오리온 생맥주는 상당히 맛있었다.
참치 사시미다. 나에게 맥주 3잔은 과음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사진은 흔들렸다.
참고로 이 집은 로컬 분위기에 비해 의외로 영어 메뉴판도 있고 사모님도 영어를 좀 한다. 나는 혼자다 보니 주로 바(Bar) 자리에 앉았는데, 정 가운데에 대형 화로가 있고 거기에서 대부분의 구이 메뉴를 숯불로 굽고 있는 사장님(할아버지) 구경하는 것도 재미있었다. 분위기에 취할 수 있는 가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