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박8일 무계획 모터사이클 여행
렌탈한 바이크에 자신감도 붙었겠다. 이날부터는 좀더 본격적으로 오키나와 전역을 돌아보기로 했다. 물론 한번에 다 돌 수는 없겠지만 중부 지역을 중심으로 달려보기로 했다. 남부는 전날 주요 도로나 명소는 돌아봤으니 중부에 주로 모여있는 관광지들을 포인트로 다녀올 계획이었다.
일단 어제보다 좀 날씨가 개인 관계로 달리기 좋긴 했지만, 경험상 역시 조금만 구름이 있어도 바람이 꽤 쌀쌀했다. 그래서 이너 프로텍터가 풀 장착된 라이딩기어를 안에 입고, 그 위에 춥지 않게 바람막이로 무장하고 호텔을 나섰다.
호텔 옆으로 난 해안도로를 그대로 따라 계속 달리다보니 크고 작은 대교를 건너게 되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기분이 좋아졌지만, 무엇보다 바이크가 몸에 붙기 시작하고부터 비로소 이국적인 오키나와의 도로를 마음껏 누빌 수 있게 됐다는 해방감이 무척 컸다.
어딜달리나 목적지를 딱히 정하지 않고 달리는 것이 익숙하다보니 이번에도 한동안은 해안선을 따라 달렸다. 확실히 나하시 보다는 오키나와시 쪽으로 올라가다보니 도로의 차들도 제법 사이즈가 커지고 도심은 북적거리는 게 느껴졌다. 오키나와를 다 시골이라 생각했던 건 섣부른 생각이었다. 무엇보다 중간 중간 미군기지가 나오고 우리로 따지면 용산이나 이태원같은 느낌의 영어간판 상점들이 꽤 눈에 띄었다.
58번 도로는 오키나와 서부 해안을 따라 나 있는 고속화도로다. 꽤나 속도를 낼 수 있는 잘 닦여진 도로인데다 간혹 한쪽으로 바다가 훤히 보이기도 해서 상쾌했다. 조금 지루하다 싶으면 아예 해안도로로 빠져서 슬슬 달리는 것도 재미있다.
나고시에 들어서면서 이제 좀 많이 왔나... 싶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렇게 많이 온줄 몰랐는데, 오늘 가장 큰 목적지였던 코우리대교에 거의 접근한 것을 나중에 지도를 확대해보고 알았다. 달리는 것 자체에 꽤 취해있었나보다.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내가 타던 렌탈 바이크가 혼다 CB1300SF 슈퍼볼도르라는 기함급 스탠다드 바이크였다면, 이날 한참동안을 나란히 달렸던 혼다 자동차가 있었다. 바로 '분노의 질주' 영화 시리즈에도 종종 등장했던 S2000이다. 그런데 자세도 낮추고 배기도 되어있는데다 꽤나 공들여 꾸민 흔적이 보였다. 영화 속 장면에 들어와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혼다 바이크와 자동차가 나란히 달린다. 그것도 의미있는 모델 두 대가 아닌가? 부끄러워 인사를 하지는 못했지만 나중에 지나가며 보니 일본인이 아니라 서양인이었다. 아마 주둔 군인이 아니었을까 싶다. 아무튼 그런 감상젖은 자위에 빠져 한참 달린 덕에 얼마나 온지도 모르는게 분명했다.
에메랄드 비치는 한국에서 사전조사 때 '내가 수많은 오키나와 해변 중 하나를 가야한다면 여기를 가야겠다'해서 꼽은 곳이었다. 사실 나는 절벽아래 철썩이는 검푸른 성난파도를 내려다보며 감상에 젖는 타입이지, 하얀 백사장이나 에메랄드 빛 파도와 서퍼들을 보며 들뜨는 타입이 아니다. 그래서 해변은 전혀 관심 밖이지만 그래도 오키나와까지 왔는데... 싶어서 꼽아놓은 곳이다.
에메랄드 비치는 정말 스치듯이 지나가서 기억에 남은 게 없다. 게다가 잠깐 내려서 구경하려고 했는데 호객꾼들이 여기저기 보이고 그냥 있는 자연을 보러 왔는데도 주차비를 따로 받는 점도 유쾌하지 않아서 적당히 돌아보고 가던 길을 재촉했다.
야가지 섬과 코우리 섬을 잇는 코우리 대교는 이미 들어서기 전부터 표지판이 보인다. 멀리서도 그 풍경을 딱 알아차릴만큼 아이코닉한 모습에 놀랐다. 신나게 달려 대교 한 가운데를 달릴 즈음에는 오히려 속도를 줄이고 지나가는 풍경을 붙잡게 될 지경이었다. 마치 바다 한 가운데를 달리는 기분이었다. 대교를 다 지나고 섬으로 올라가자 관광지다운 모습들이 보여, 역시나 적당히 둘러보고 돌아 나왔다. 거꾸로 다시 코우리 섬을 나오는 길도 역시 장관이었다. 오키나와 여행을 하며 기억에 남은 두세번째 명장면이다.
여기까지 오고나니 시간이 꽤나 흘렀고, 이제 다시 돌아가야 할 길을 체크해봐야만 했다. 해가 떨어지면 상당히 체감온도도 급감하므로 그 전에 호텔로 돌아가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일은 북부 코스를 돌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에 중부를 최대한 겹치지 않게 돌아보기 위해 돌아가는 길은 동부 해안을 거슬러 내려가기로 결정했다.
긴조를 지나 우루마시에 돌입했을 때 5년전 아내와 왔던 해중도로가 근처에 있다고 구글이 알려줬다. 아마 그때 내비게이션에 입력하고 달렸던 것 같다. 그때는 탑박스가 달린 혼다 NC750X를 빌려 아내와 텐덤라이딩을 즐겼는데, 사실은 한여름 8월이어서 더위로 상당히 고생을 했다.
츠케멘(비빔 라멘)징베에 라는 곳이 유명하다고 하여 면요리 좋아하는 나로서 체크해둔 곳이 있었다. 그런데 내가 조사한 책이 좋았던 것인지, 희안하게 꽤 맛집이니 사람도 많고 관광객이 많겠구나 각오하고 들어가면 의외로 현지인 뿐이고 분위기도 조용조용한 곳이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난 그점이 더 좋았다. 북적이는 것은 질색하기 때문이다.
여기는 양념 간이 무척 세므로 조금만 찍어 먹으라는 어드바이스가 많았지만 조금 먹어보니 된장찌개같은 느낌이어서 전혀 부담없이 면을 마구 비벼 남기지 않고 제대로 먹어주었다. 점원으로 보이는 아가씨는 내가 현지인으로 보였는지 일본말로 뭐라뭐라 설명을 해주고는 사라졌는데, 아마 비벼먹는 법을 알려준건가 싶다. 한국에서도 몇번 먹어본 적이 있는 스타일인지라 어려움 없이 잘 먹었다.
갑자기 생각난 건데, 오키나와의 맛집이라고 내가 들어가 본데는 거의 90퍼센트 확률로 식권 자판기로 운영을 했다. 아날로그 키오스크라고 해야하나, 한국으로 치면 국민학교 때 시립도서관같은 데 식당에 있던 우동 1500원, 김밥 1000원, 라면 1200원 하던 종이표를 자판기를 눌러 구입하고 그걸 점원에게 주면 그 메뉴를 갖다 주는 식이다. 간혹 일본어로만 메뉴가 써있고 영어는 커녕 그림 한장도 없어서 난감했던 적도 있긴 하지만 적당히 눈칫밥으로 메인메뉴를 시켜먹곤 했다.
오키나와 시로 다시 돌아와 나하까지 가는 길을 검색해보니 빨리가면 40분만에 갈 길이었다. 그런데 아직 해가 지려면 한 시간은 더 있어야 해서 왠지 아쉬웠다. 그래서 그냥 순수하게 더 달리고 싶은 마음으로 동부 해안가를 따라 내려왔다. 노래를 들으며 라이딩을 즐기다보니 금방 해가 졌고, 피치못하게 야간 주행을 하게 됐다.
밤에 모터사이클을 타는 것은 어지간하면 지양하려고 했지만 여행지까지 와서 한시간 한시간이 아쉬운 건 어쩔 수 없는 일 아닌가? 좀 춥긴 했지만 밤의 오키나와 도심을 불나방처럼 쏘다니다 숙소로 돌아왔다. 이날 든 생각인데, 4기통 바이크는 역시 일본과 찰떡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