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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문장] 기획자의 독서

by 아르노


자신의 기분에 지지 않기 위해서, 쓸데없는 고민이 생활을 지배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걷기를 택한 것입니다. 거창한 이유는 아니지만 어쩌면 스스로에 대한 변화가 가장 절실할 때 본능적으로 걸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들 각자의 스타일이 있고 그걸 바탕으로 본인의 기획력을 펼치게 되죠. 이 스타일이란 것이 그저 방식에 국한되지 않고 자신만의 강점이 될 때 좋은 제품과 서비스로 연결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저는 기획자로서 관찰하는 습관이 중요한 이유는 딱 한 가지인 것 같습니다. 바로 ‘이해하는 힘’이죠. 관찰을 하면 그 대상의 특징적인 부분들이 레이더에 포착되고, 그걸 밀도 있게 반복해서 들여다보면 더 잘 이해되기 마련입니다.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하면 더 궁금한 것들이 생기고 때로는 다른 대상과의 공통된 연결고리가 발견돼서 의외의 가지치기를 할 수도 있습니다


좋은 아웃풋을 위해서는 좋은 인풋이 있어야 하고, 좋은 인풋이란 곧 ‘좋아하는 것으로부터의 인풋’이기도 한 것이죠.


얄팍한 술수가 전혀 통하지 않을 때가 바로 이 ‘딥 다이브’할 때인 것 같아요. 하나라도 더 깊게 들여다보려 애쓰는 만큼 내 손에 쥐어지는 동전이 늘어나니까요. 하지만 맨땅에 헤딩하는 식으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레이더를 좁혀서 어디부터 파내려 갈지 정도는 정해야 헛수고를 덜 수 있죠.


좋은 사람과 대화를 할 때 그 내용을 모두 기억하는 건 아니잖아요. 나에게 공감과 영향을 준 특정한 부분이 있고 대화 전체를 둘러싼 분위기가 있는 거죠. 결국 그것들이 우리에게 자극을 주는 것처럼 책도 누군가와 대화하듯 읽는 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대신 그 대화의 깊이가 깊을수록 여러분의 손에 동전이 들려 있을 확률도 커지는 거겠죠.


때로는 지금 읽고 있는 책 한 권이 그 사람이 머물고 있는 세상을 대신 보여주기도 합니다.


좋은 브랜드를 만들어가는 것이 마치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스스로 노력하는 과정과도 닮아서, 저는 브랜딩이 참 좋습니다.


세상에는 말과 글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 부지기수지만 그래도 나름의 이유를 찾으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는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특히 무엇인가를 기획하는 사람에게는 참으로 중요한 지점이거든요. 우리들 각자가 기획하고 있는 무엇인가는 내가 아닌 남이 쓰는 것이잖아요. 그 쓰임에는 이유가 있어야 하고 그것이 사랑받기 위해서는 더 큰 이유가 있어야 하는 법입니다. 고기도 먹어본 놈이 먹는다고, 이유도 찾아본 사람이 잘 찾을 수 있는 거죠.


저는 발산의 책이 주는 기쁨이 이런 것이라고 생각해요. 예기치 못한 곳에서 만나게 되는 접점. 그리고 그 접점들이 연결되면서 보여주는 큰 그림들을 이해하게 되는 것. 그 재미에 빠지면 책 읽는 행위 자체에 더 큰 호감이 생깁니다.


사실 꼭 직접적인 연관이 없더라도 괜찮습니다. 발산의 방향은 자유로우니까요. 저는 브롬톤BROMTON이란 영국 자전거 브랜드에 관한 책들을 읽다가, 자전거 자체보다 영국식 디자인에 더 빠져든 적도 있습니다. 그래서 영국에서 오랫동안 가든 디자이너로 활동한 오경아 작가의 《영국 정원 산책》이나 영국 디자인의 아이콘이라는 폴 스미스의 디자인 세계를 다룬 《폴 스미스 스타일》, 문화 인류학자 케이트 폭스가 쓴 《영국인 발견》 같은 책들을 읽기도 했습니다. 브롬톤 자전거에서 출발한 관심의 화살표가 영국 문화로 발산한 것이었죠.


꼭 브랜드가 아니더라도 자신만의 관심사를 정해서 ‘수렴’과 ‘발산’의 책 읽기를 해보는 것은 분명 의미 있는 경험이 될 거라 확신합니다. 수렴의 책 읽기가 ‘구심력’에 의한 독서라면 발산의 책 읽기는 ‘원심력’에 의한 독서거든요. 내가 정한 주제의 한 가운데를 깊이 파는 즐거움과 그 주제의 가능성을 무한히 확장해보는 재미를 동시에 즐길 수 있으니까요.


줍고 보관하는 것만으로도 나름의 의미가 있겠지만 이 생각의 조각들은 잇고 연결할 때 그 가치가 훨씬 커지는 것 같아요. 마치 조각난 파일들을 모아 제자리를 찾아주는 디스크 조각 모음처럼 말입니다.


저에게 책이란, 이 생각의 조각 모음을 위한 실행 프로그램이기도 합니다. 차이가 있다면 딱히 의도를 갖지 않고 무심히 펼쳐든 책 한 권을 통해서도 훌륭한 조각 모음을 할 수 있다는 거예요.


저는 몰입을 위해서는 ‘이해’와 ‘공감’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이 사는 세상으로 들어가려면 그들은 누구이고 어떠한 세상 속에 살고 있으며, 어떻게 살아가는 사람들인지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 거죠. 그래야 길이 보입니다. 적어도 그들 곁에 발을 붙이고 말을 걸어볼 수 있는 통로 같은 게 생긴다고 할까요? 그다음은 스스로 ‘왜’라는 질문으로 공감대를 넓혀가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왜 이 사업을 시작하게 되었을까. 이 사용자는 왜 이 기능을 쓰지 않을까. 왜 이 브랜드는 제품 가짓수가 현저히 적을까. 왜 이 회사의 마케팅은 자극적이기보다는 겸손에 가까울까. 스스로 끊임없는 질문 리스트를 만들고 그에 대한 답을 유추해가는 거죠. 공감이야말로 맞장구가 아닌 질문이거든요. 그저 ‘당신 말이 맞아’라는 리액션이 아닌 ‘저도 그 문제를 한번 진지하게 고민해볼게요’라는 태도에 관한 것이니까요.


트렌드의 전선에 있는 사람으로서 늘 새로운 것에 대해 관심을 기울여야 함은 분명하지만 그게 내 생각을 옥죄는 틀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생각도 근육이라 계속 연습과 훈련을 반복해서 그 탄성을 유지해줘야 하는데, 내 힘으로 진득하게 끝까지 생각을 완성한 경험이 없으면 여간 어렵지 않습니다. 서 말의 구슬을 ‘꿰는’ 힘. 그 힘이 필요한 것이죠


실제로 기획 일을 하다 보면 페르소나를 잡게 되는 일이 많잖아요. 신제품 출시나 사용자 환경 분석을 할 때도 그렇고요. 그럴 때 이 훈련이 효과를 크게 발휘합니다. 특히 요즘은 ‘30대 여성으로 패션 업종에 종사하며 하루 소비지출은 얼마이고….’ 하는 식의 단순한 페르소나 대신 마치 한 사람의 삶 자체를 설계하는 방식으로 페르소나를 잡습니다. 그러니 이런 연습이 되어 있으면 데이터를 기반으로 페르소나를 형성했을 때 훨씬 구체적이고 매력적인 설정이 가능합니다.


정반합正反合의 논리라는 것이 있습니다. 헤겔의 변증법에서부터 출발한 이론인데, 테제These(정)라고 불리는 명제나 주장이 있고, 이와 대립되는 안티테제Antithese(반) 그리고 이 두 가지가 모두 배제되고 새로운 초월적 상태인 진테제Synthese(합)의 관계를 설명하는 이론입니다. 쉽게 말해 기본이 되는 주장과 이와 반대되는 주장이 각각 있고, 이는 서로 모순적일 수밖에 없으므로 그중 버릴 것과 취할 것을 선택해 ‘합’으로 나아간다는 개념입니다. 그리고 이 과정을 무수히 반복하다 보면 진리에 가까워진다는 게 바로 정반합이죠.


책의 본질을 ‘내용’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저는 책의 본질은 ‘읽는 경험’이라고 봅니다. 책이란 결국 읽히기 위해 쓰였고, 역사적으로도 더 많이, 더 오래, 더 잘 읽는 방향으로 발전해왔으니까요. 그 과정에서 읽는 경험을 더 좋게 만들고자 하는 모든 시도들을 저는 존중하고 사랑합니다.


지인 중에 유독 운전에 겁이 많아 나이 마흔 가까이 면허 시험조차 응시하지 못했던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던 그가 어느 날 회사 근처에 멋진 바이크를 몰고 나타나는 바람에 깜짝 놀랐죠. 어떻게 된 일이냐 물었더니 되돌아온 답변이 저를 더욱 놀라게 했습니다.

“운전을 할 줄 모르니까 늘 자전거를 타고 다녔거든. 그러다가 웬만한 자전거를 다 섭렵했어. 결국 전기 자전거까지 탔고 말야. 근데 그 속력이면 왠지 오토바이도 괜찮을 것 같은 거야. 그래서 이 녀석을 샀는데 너무 만족스러운 거 있지. 근데 여전히 자동차 운전은 겁이 나. 가만히 보니까 나는 차체의 크기나 폭을 가늠할 수 없는 것에 큰 공포를 느끼더라고. 그래서 바닥 없고, 뚜껑 없어도 내 몸에 붙어 있는 이륜차가 좋아.”

‘욕심내지 말고 내가 할 수 있는 부분에서 조금씩만 변주를 줘보자!’라는 마인드가 생긴 건 그때쯤인 것 같습니다. 늘 독하게 마음먹고 한 번에 방향타를 돌려야 변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해온 사고방식이 선풍기 바람에 아이스크림 녹듯 녹아내렸죠. 자동차 운전이 무서우니 애초에 바이크를 타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마 아무도 없을 겁니다. 대신 편하고 익숙한 것에서 조금씩 나아가려는 노력이 어느덧 낯선 것을 초월한 변화를 가져다주는 거겠죠.


사실 루틴을 만들기 가장 어려운 이유는 지루함과 막연함 때문입니다. 매일매일 똑같은 행동을 반복해야 하는 데서 오는 지루함 그리고 ‘과연 이렇게 한다고 내가 정말 나아질 수 있을까’ 하는 막연함 때문이죠. 그래서 루틴은 누군가가 만들어줄 수 없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어떻게든 본인의 방법으로 본인에게 맞는 루틴을 설계해야 하는 것이죠.


저는 훌륭한 루틴을 가진 사람들이 모두 독종이거나 의지의 끝판왕들이라고 보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는 많이 본 것 같네요. 본인은 몰아서 하는 것이 너무 힘들어 늘 조금씩 해놓다 보니 루틴이 완성되었다는 사람들도 있었고, 스스로의 나약함을 믿지 못해 의도적으로 루틴을 만든 사람들도 많았거든요.


조금씩 천천히라도 온전한 내 글을 써보길 바랍니다. 문장과 문장의 조합보다는 길과 길을 연결한다는 느낌으로, 절대적 물리량보다는 기억의 총합을 선물한다는 생각으로요.


저자 김도영 님의 추천 책 리스트


<멋진 보통 사람들에게 전하는 ‘그때’를 위한 책 >


01. 다른 사람의 직업을 통해 내 일을 바라보고 싶을 때 : 일의 기쁨과 슬픔


02. 사업으로서, 산업으로서의 디자인이 궁금할 때 : 0.1cm로 싸우는 사람


03. 일상 속의 내 모습을 꺼내어 보고 싶을 때 : 보통의 존재


04. 알 수 없는 무거운 분위기가 우리 곁에 내려앉았을 때 : 그리스인 조르바


05. 직장인으로 산다는 것의 의미를 찾고 싶을 때 : 남아 있는 나날


06. 나만의 페이스로, 내 삶의 레이스를 완주하고 싶을 때 :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07. 거인의 어깨에 올라 장인의 세상을 내려다보고 싶을 때 : 커피집


08. 회사 때려치우고 사업이나 해볼까… 하는 생각을 다잡고(?) 싶을 때 : 사업을 한다는 것


09. 생각의 조각 모음이 필요할 때 : 생각의 탄생


10. 사소하지만 구체적이고, 당연하지만 필연적인 행복을 찾고 싶을 때 : 행복의 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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