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다 보면 무언가 내 삶에 훅 들어오는 것들이 있다. 그럴 땐 우리가 슬럼프와 감기를 잠시 쉬어가야 할 타이밍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그 의미와 본질을 파악하거나 해석할 줄 알아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2.
글쓰기의 시작은 ‘기록’이다. 정말이다. 기록하니 글쓰기가 시작됐다. 기록은 날아가는 것들을 붙잡아놓는 과정이며, 속절없이 당할 수밖에 없는 시간에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래서 모든 이의 글쓰기는 일기로 시작될 가능성이 크다.
3.
놀랍게도(?) 직장인이란 페르소나는 유한하다. 언젠가, 회사를 더 다니고 싶어도 그러지 못하는 때가 분명히 온다. 그런데 우리는 마치 직장 생활이 영원할 것처럼 생각하고, 아파하고, 힘들어한다. 나를 지워가면서까지 말이다. 우리의 페르소나는 변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페르소나가 바뀌더라도 그 중심을 잘 잡기 위해서는 바로 나라는 존재를 잘 세워가야 한다. 나를 위한, 내가 우선인 도전을 늘려가야 하는 것이다.
4.
직장에서 작성한 수백, 수천 개의 보고서를 떠올려보면 거기엔 손자병법 이상의 전략과 전술이 포함돼 있다. 그러나 그것을 내 삶에 적용해본 적은 없다. 아무리 좋은 내용을 쓰더라도 그것은 내 삶에 내재화되지 않는다. 대답은 있을지 몰라도 ‘나’와 ‘나에 대한 질문’이 없기 때문이다.
5.
물론 직장에선 대답형 인재가 필요하다. 그러나 내 인생에서 나는 ‘질문형 인재’가 돼야 한다. 먹고살기 위해서는 대답을 잘해야 하고, 존재하며 살기 위해서는 질문을 해야 하는 것이다.
6.
가장 현실적이고 효과적인 방법이 바로 글쓰기다. 따로 돈이 들지도 않고, 글이 생산물임을 믿고 받아들이기만 하면 된다. 초기 몇몇 생산물들은 품질에 문제가 있을 수 있고, 함량 미달일 수도 있겠으나 생산에 생산을 거듭하면 어느새 꽤 쓸모 있는 모양을 갖추게 된다. 그렇게 생산물이 쌓이면 그것은 나의 자본이 되고, 그 자본은 또 다른 생산을 위한 원동력이 된다.
7.
글쓰기는 방법보다 이유가 더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필력이나 기교보다, 내가 왜 글을 쓰고 싶은지를 규명하는 게 더 시급하다. ‘왜’는 목적이기 때문이다. 목표와 목적은 엄격히 구분된다. 목적은 방향과도 같으며 목표는 목적을 이루기 위한 단계 단계의 이정표다. 그래서 난 글쓰기의 목적을 적어 책상 앞에 붙여놓았다.
- 나는 ‘생산’하기 위해 글을 쓴다.
- 나는 나를 알아가기 위해 글을 쓴다.
- 나는 ‘선하고 강한 영향력’을 나누기 위해 글을 쓴다.
8.
퇴근 시간엔 전철이나 버스를 놓칠까 발걸음을 재촉한다. 집에 가서는 결국 누워서 아무것도 하지 않을 거면서 왜 그리 빨리 집으로 향하려 했던 걸까? 나는 잠시 다리에 힘을 빼고 속도를 늦췄다. 그러자, 주위가 보이기 시작했다. 퇴근길에 보이는 한강과 나무 그리고 꽃. 나와 같이 분주한 사람들과 그들의 상기된 얼굴들. 그 모든 풍경이 나에겐 어떤 영감이 됐다. 그리고 영감은 곧 글의 소재가 된다.
9.
내가 쓴 글 하나를 점으로 표현해본다. 점 하나는 보잘것없다.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미약하다. 그러나 이 미약한 점들을 ‘자주’는 아니더라도 ‘계속’해서 찍어나간다면 나는 점과 점을 연결할 수 있다. 바로 선이 되는 것이다. 여기서 예전엔 없던 ‘연속성’이 생겨난다. 나는 아무것도 안 했다고 생각했는데 선으로 이어지는 순간 나는 무언가를 이뤄낸 사람이 된다. 이러한 선순환을 통해 보다 많은 점들이 선으로 이어지면 비로소 면이 생겨나고, 보다 입체적인 면 위에서 우리는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의 세계관을 갖추게 된다. 이처럼 점을 찍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10.
평범한 직장인이라고, 반복의 저주에 걸린 월급쟁이라고 자신을 불행 프레임론에 욱여넣지 않았으면 좋겠다. 프레임의 경계에서 한 발자국만 옮기면 우리는 스스로를 객관화해볼 수 있다. 남의 떡이 더 커 보이고, 남의 삶이 더 재미있어 보이는 것처럼 나의 삶도 한 발자국 떨어져 바라보면 새로운 의미가 가득하다.
11.
더 많은 글의 소재는 감정에 있다. 감정을 들여다보고, 또는 감정을 다른 어떤 것에 이입할 때 비로소 메시지가 생긴다. 그리고 그 메시지는 읽는 사람에게 전달돼 감동과 공감, 위로와 깨달음을 만들어낸다. 글이 써지지 않거나 쓸 게 없다고 느껴 글쓰기를 멈출 때, 나는 지금 무엇에 집중하고 있는지 그리고 어디서 소재를 찾고 있는지를 돌아보곤 한다. 일상, 즉 나와 내 주위의 이야기는 뻔한 것이란 ‘뻔한 생각’을 잠시 접어두고 말이다.
12.
그 0.01% 때문에 그날 하얀 옷을 입은 자신과 밥 먹을 때 조금 더 조심하지 못한 자신을 탓한다. 하지만 이 순간을 슬퍼하기만 할 필요는 없다. 이로 인해 우리 마음은 소란해졌고, 이제 글 쓸 소재가 생겼기 때문이다. 자기반성과 상황, 에피소드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겪으며 생긴 감정과 깨달음. 그것들을 한 자 한 자 풀어나가면 된다. 물이 지나치게 맑으면 물고기가 없다. 조금은 탁한 물속에서 소재라는 월척을 낚아내면 되는 것이다.
13.
더 깊어야 한다. 더 넓어야 한다. 내 사색과 통찰이 깊고 넓을수록, 평범한 일상도 다르게 보고 특별히 표현하려 노력할수록 우리는 일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에세이에 가까워질 수 있다.
14.
메시지는 자기반성과 역지사지 그리고 일상을 달리 보는 통찰에서 온다.
15.
나에게 돈이 되는 글쓰기는 ‘선택’이지만, 나를 위한 글쓰기는 ‘필수’다. 글로 숨을 쉬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여기서 내가 바라는 건 ‘중심 잡기’다. 그래서 나는 돈이라는 말에 매몰되지 않기 위해, 돈이란 단어를 가치로 치환한다. ‘돈을 벌어야지’가 아니라,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어야지’라는 생각. 자본주의 사회는 가치가 돈으로 환산되기 때문에 두 단어가 비슷해 보일 수 있지만 어디에 중심을 두느냐에 따라 그 결과는 확연히 달라진다.
16.
글쓰기가 삶 쓰기라면 다시, 삶은 온전히 내 것이다. 내가 누구의 삶을 대신 살 수도 없고, 남이 내 삶을 대신 살아줄 수도 없다. 그러니 나의 글엔 내 목소리가 선명히 들어있어야 한다. 감명 깊게 읽은 글이나 명언, 그리고 인용구들은 내 글 안에서 주체가 돼선 안 된다. 그것들은 내 목소리를 내는 데 도움을 주는 고마운 객체가 돼야 하는 것이다. 아무리 하찮아 보이는, 소위 말해 개똥철학이라도, 나는 그것을 당당하고 선명하게 말할 줄 알아야 한다. 어디선가 따온 멋있는 문구가 내 글의 완성도를 보장해주지는 않는다.
17.
세상의 속도를 어찌할 수 없다면 내 마음의 속도를 조절해야 한다. 그림자를 앞서 나간 조급한 마음을 잡아와야 한다. 다른 사람들에게 가 있는 마음을 다시 나에게로 돌이켜야 한다. 중심을 잡는 것이다. 중심을 잡을 수 있다면 나만의 페이스를 만들어갈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