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거릿 애트우드
초등학교 2학년 때였나, 아버지가 저녁에 집에 오시면서 서점에서 책을 한 권 사 오셨다. 토마스 불핀치의 <그리스 신화>였다. 초등학교 3학년 때는 화장실에 갈 때마다 항상 <소년소녀를 위한 트로이의 목마>라는 책을 갖고 들어가서 한참 나오지 않고 그걸 읽던 기억이 난다.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나는 장면이 있다. (백열전구가 꽂힌 화장실의 노리끼리하고 따뜻한 빛을 배경 삼아) 전염병인가 날씨인가 여하튼 신들의 방해로 배를 띄우지 못하는 미케네군이 신탁을 청하자, 깽판의 주인공인 아르테미스가 아가멤논의 딸 이피게네이아를 제물로 바치라고 x랄해놓고 막상 바치고 나니 납치하듯 데리고 가서 신관으로 삼는 이야기를 화장실에 앉아서 읽던 10세 소년의 모습이다. 읽을 때마다 항상 너무 재미있어서 책이 마르고 닳도록 읽었다. (이피게네이아 이야기는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킬링 디어>의 모티브가 된다.)
소년소녀를 위한다는 제목과는 반대로 '정신이 나가서 자기 배를 창으로 꿰뚫는 아이아스', '친구를 죽인 헥토르를 죽여 복수에 성공하고도 분이 안 풀려 헥토르의 시체를 마차에 끌고 온종일 진지 주변을 빙빙 도는 아킬레우스', '아킬레우스의 발꿈치를 꿰뚫는 파리스의 화살'과 같은 19금 내용들이 적나라한 삽화와 함께 소개되어 있는 어질어질한 책이었다. 그런 자극적인 내용들만 모아놓은 책을 2차 성징이 오기도 전에 여러 번 읽은 아이는 자라면서 웬만한 자극적인 콘텐츠엔 꿈쩍도 안 하는 아저씨가 됐다.
그래서 아이한테는 만화로 된 그리스 신화/일리아스/오디세이아 책을 권하지 않았고(아직 머릿속에 이미지가 없으니 자극적인 내용이 나와도 글로만 읽으면 어떤 장면인지 상상할 수 없을 테니까), '소년소녀'나 '어린이를 위한' 따위가 붙은 책도 권하지 않았다. (속은 건 나로 족했다) 그렇다고 천병희 교수님의 고퀄리티 번역 원전을 읽으라고 주면 '서사시 무엇?'이라는 반응이 나올 테니, 고민하다가 아우구스테 레이너의 서양고전 시리즈 중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가 쉽게 읽을 수 있을 내용으로 줄글로 잘 쓰여 있길래 그 두 권만 읽어보라고 빌려서 줬다. 나랑 같은 나이인 초등학교 3학년 때였고, 유전자는 속이지 못한다고 재미있게 잘 읽는 모습에 뿌듯했다.
서양 문학을 신화와 서사시로 시작하게 된 나는 그래서인지 문학 작품들을 그 뒤로도 친숙하게 읽었고, 자연스럽게 문과적 인간이 되어 지금은 딱히 기술이라고 할 것도 없이 나이만 먹어 몹시 문송한 사람이 됐다.
그리스 신화 이야기가 나오니 쓸 말이 정말 많은데, 다양한 버전의 그리스 신화를 읽다가 이윤기 선생님의 작품을 마지막으로 따로 신화를 찾아 읽은 적은 없다. 그러다 어느 날 매들린 밀러의 <키르케>와 <아킬레우스의 노래>를 읽었다. 오디세이아에 잠시 등장하는 키르케를 주인공으로 그녀를 거쳐가는 다양한 사람들과의 이야기, 친우 파트로클로스와 사실은 애인이었다는 아킬레우스의 사정. (자기가 아끼던 전리품 브리세이스를 아가멤논에게 빼앗겨도 '아 ㅆ... 나 전쟁 안 나가'정도로 소극적인 반응을 보이던 아킬레우스가 친구 죽었다고 분노조절장애처럼 길길이 날뛰고 다 쓸어버리던 이유가 단번에 이해된다.)
10살 소년이 여러 번 읽어 성인이 된 이후에도 인문학적 자양분(이라고 하면 너무 고차원적이지만..)으로 삼은 그 이야기를 정말 재미있게 재해석해서 신나게 읽었다. 평생 라면만 끓여 먹던 사람이 어느 날 짜파게티와 불닭볶음면을 먹게 되어 뛸 듯이 기뻐한 기분이랄까. 그 뒤로 누군가 소설을 추천해 달라고 하면 "일리아스나 오디세이아... 그리스 신화 같은 거 좋아하나요?"라고 물어보고 그렇다고 하면 주저 없이 매들린 밀러의 소설을 추천한다.
한강 작가님의 수상 때 이름이 오르내리던, 아마 몇 년 내로는 수상하지 않을까 싶은 마거릿 애트우드 선생님이 2005년에 쓰신 <페넬로피아드>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오디세우스의 아내 페넬로페의 이야기다. 매들린 밀러처럼 상상력을 마구 불어넣어 이야기를 가지고 노는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페넬로페의 시점에서 결혼하고 조금 있다가 남편이 10년은 전쟁으로, 10년은 모험으로 독수공방을 하는 과정을 그려놓은 이야기가 21세기의 저승에서 페넬로페가 자기 썰을 푸는 식으로 펼쳐진다. 오디세우스의 귀환 후 구혼자들을 다 죽이는 과정에서 그들과 (몸과 마음을 모두) 내통한 시녀들 12명도 함께 목매달아 죽이는데, 이들의 사연을 담은 노래가 <오디세이아> 서사시의 '코러스'처럼 등장한다. 사실 페넬로페가 구혼자들을 물리치기 위해 시녀들에게 몸을 바치게 하고 정보를 빼내기도 했다는 속사정이 있었다는 설정이다.
헬레네는 여전히 재수 없고 무책임하고, 페넬로페는 너무 수동적이다.
또 어디 신화를 소재로 비틀어서 쓴 재미있는 소설 없을까?
어느덧 글을 100개 썼다. 뿌듯하다!
혼자만의 노트라고 생각해서 댓글창을 항상 닫았는데, 이걸 연다고 딱히 엄청난 댓글이 달리진 않겠지만 그래도 한 번 열어볼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