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금희
<나의 폴라 일지>를 읽고 노트를 써놓은 게 불과 3개월 전인데 왜 또 책이 나온 것이지... 저 여행기에서 분명 남극을 배경으로 한 소설을 구상했다는 언급을 보고 '언제 나올까?' 하며 기대하긴 했지만, 이렇게 빨리 다음 작품이 나올 줄은 몰랐다. 심지어 배경이 남극이 아닌 걸 보니, 대기 중인 작품이 있다는 얘기 아닌가? 몹시 다작하고 계시는군요 작가님! 저는 두 팔 벌려 대환영입니다.
책은 첫 장을 넘기자마자 희곡의 형식을 띤다. 작가님 언제 충청도 사람을 잡수셨대유? 사투리를 이렇게 찰지게 쓰시다니...
어린 열매 (아이답지 않게 느물느물하게) 여보세요, 식사는 하셨쥬? 창시긴데 우리 비디오 즘 갖다주세요.
지금은 바빠서 못 간다며 연체료를 내면 되지 않느냐고 나온다.
어린 열매 지금 돈이, 연체료가 문제가 아녜요. 애타게 찾넌 분이 계셔서 안 올라걸랑 이짝 아자씨가 받으러 가시겠대유. 그럭하며는 동니 사람들끼리 뭐 인사도 하시구 으른덜끼리 해결하게요. 츰 보는 아자씨 손님인데 인상은 좋으셔유.
그렇게 보고 싶었으면 개봉할 때 극장에서 보지 그랬느냐고 억지를 쓰는 소리.
어린 열매 (옆 손님과 대화하며) 영화 개봉했을 때 대깍 보시지 그랬냐넌디, 이, 아, 그러셨구나. (다시 전화에 대고) 그때는 개인 사정으루다가 큰 핵교에 댕기셔서 못 보셨다는디유, 십 년을 댕기셨다니께 뭐. (옆 손님에게 확인하며) 이이, 십이 년을 계시다 지끔 나오시구 이제사 급하게 시청을 원하신대유. 인상은 뭐 말도 할 것 없이 엄청 좋으셔유.
주인공 손열매는 성우이다. 친하게 지내던 고수미에게 사기를 당해 돈 한 푼 안 남고 살던 집에서 나온 손열매는, 우울증세가 심해 목소리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 상태로 고수미의 고향인 완주마을로 향한다. 한강을 끼고 있는 '완평'이라는 도시에 있는 이 마을은, 장의사이자 암환자인 고수미의 엄마가 살고 있으며, 댐 건설로 수해를 겪어 마을의 많은 아이들을 잃은 아픈 기억이 있는 곳이다.
완주에서 열매는 고수미의 엄마, 옆집에 사는 중학생 양미, 신비로운 존재인 마을 청년 어저귀, 은둔 중인 배우 정애라, 이밖에 많은 마을 주민들과 가끔은 다투기도, 가끔은 서로 챙겨주고 위로하며 여름을 보내고 점점 생기를 되찾는다.
여러 사건이 발생하며 결국 열매는 완주를 떠나게 되지만 이곳에서 얻은 따뜻한 연대와 위로의 경험으로 남은 삶을 잘 살아낼 자신을 갖게 된다. 소설의 마지막에 열매는 오디션에 가서 아이들에게 이야기해 주듯 자크 프레베르의 <장례식장에 가는 달팽이들의 노래>라는 시를 한 편 읽는다. 이 시를 읽고 소설의 모티브를 받아오셨나 싶을 정도로 소설의 중심을 관통하는 시다.
죽은 나뭇잎의 장례식에
두 마리 달팽이가 조문하러 길을 떠났어
검은 색깔의 껍데기 옷을 입고
뿔 주위에는 검은 헝겊을 두른 차림이었어
그들이 길 떠난 시간은
어느 맑은 가을날 저녁이었지
너무 느려서 도착했을 때는
이미 봄이었어
죽었던 나뭇잎들은
모두 부활해서
두 마리 달팽이는
너무나 실망했단다
하지만 해님이 나타나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어
괜찮으시다면 정말 괜찮으시다면
여기 앉아서
맥주 한잔 드세요
혹시 생각이 있다면
정말 그럴 생각이 있다면
파리로 가는 버스도 타보시지요
오늘 저녁 떠나는 버스가 있거든요
여기저기 구경할 수 있어요
하지만 이제 상복은 벗으세요
내가 꼭 당부하고 싶은 말이에요
상복은 눈의 흰자위를 검은빛으로 만들고
우선 인상을 보기 싫게 하거든요
죽음의 사연들은 무엇이든
아름답지 않고 슬픈 법이지요
당신들에게 맞는 색깔
삶의 색깔을 다시 입으세요
그러자 모든 동물
나무와 식물이 노래 부르기 시작했어
목이 터져라 노래했어
살아 있는 진짜 노래를
여름의 노래를 불렀어
그리고 모두들 마시고
모두들 건배했지
아주 아름다운 밤
여름밤이었어
그러고 나서 달팽이 두 마리는
집으로 돌아갔어
집으로 돌아가면서 그들은 아주 감동했어
집으로 돌아가면서 그들은 아주 행복했어
술을 너무 많이 마신 탓인지
그들은 조금씩 비틀거렸어
하지만 하늘 높은 곳에서
달님이 그들을 보살펴 주었네
(천천히, 여운을 주며)
하지만 하늘 높은 곳에서
달님이 그들을 보살펴 주었네
200쪽가량의 분량에 소설과 희곡을 넘나드는 형식이 적절히 배치되어 읽는 재미를 배가시키고, 많은 인물들이 등장함에도 혼란스럽지 않으며, 세태를 넘나드는 언어사용과 작가님 특유의 감정 묘사까지...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면서 치유받는 느낌을 받은 좋은 작품이다. 많은 사람들이 읽으면 좋을 것 같아 줄거리는 정말 대충 정리했다. 직접 읽어보세요!
작가의 말에 나온 정보인데, 이 작품은 '무제'라는 출판사의 대표인 박정민 배우(!)가 기획한 '듣는 소설'이라고 한다. (윌라에 가면 들을 수 있다) 소설 안에서 텍스트만 읽어도 인물들이 살아 숨 쉬는 게 느껴지는데, 오디오북으로 배우들의 실감 나는 연기를 들으면 또 다른 재미가 있을 거라 기대된다. (이 모든 배우들이 재능기부를 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