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워드 애슈턴
영화 <미키17>의 원작소설.
지구를 대신할 행성을 개척하는 미래의 인류. 목숨을 담보해야 하는 위험한 일을 도맡아서 할 '사람'(익스펜더블)의 역할에 주인공 미키 반스가 자원한다. 미키는 친구 베르토의 스포츠 경기에 전재산을 걸었지만 모두 날려서 인생의 큰 위기를 겪고 있는 상태였다. 요즘으로 치면 불법 스포츠토토에 전재산을 몰빵한 젊은이가 땡전 한 푼 안 남아서 새우잡이배를 탄 셈.
위험한 임무들을 수행하다 여섯 번 죽고 일곱 번째 몸으로 임무 중 또 위기에 빠졌지만 겨우 살아 돌아왔더니 기지에선 그가 죽은 줄 알고 여덟 번째 몸을 만들어냈다. (정신은 백업해 놨다가 새 몸에 업로드한다) 자기가 두 명이 있는 상황. 180여 명이 살고 있는 기지에서 미키7과 미키8은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여러 에피소드를 겪는데...
항상 느끼지만 SF 작가들은 뭘 먹고, 읽고, 보고, 듣고, 느꼈길래 이런 상상력을 갖게 됐는지 궁금하다.
요즘 자주 등장하는 '테세우스의 배' 난제가 직접 언급되기도 하고, 미키 본인이 마치 테세우스의 배와 같은 존재이기도 해서, '인간의 정체성은 무엇인가?'라는 철학적 질문이 소설 전반을 관통한다.
미노타우르스를 죽인 후 아테네에 귀환한 테세우스의 배를 아테네인들은 팔레론의 디미트리오스 시대까지 보존했다. 그들은 배의 판자가 썩으면 그 낡은 판자를 떼어버리고 더 튼튼한 새 판자를 그 자리에 박아 넣었다. 커다란 배에서 겨우 판자 조각 하나를 갈아 끼운다 하더라도 이 배가 테세우스가 타고 왔던 '그 배'라는 것은 당연하다. 한 번 수리한 배에서 다시 다른 판자를 갈아 끼운다 하더라도 마찬가지로 큰 차이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계속 낡은 판자를 갈아 끼우다 보면 어느 시점에는 테세우스가 있었던 원래의 배의 조각은 하나도 남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배를 테세우스의 배라고 부를 수 있는가?
물건이나 인간의 정체성은 자신, 혹은 다른 사람들의 기억과 인식에 따라 바뀐다고 생각한다.
아침을 먹으면서 아이에게 테세우스 이야기를 꺼내봤다.
- 미노타우르스 알지?
- 응 그 황소 괴물.
- 누가 처치했더라?
- 어... 헤라클레스?
- 아니, 테세우스.
- 아아... 맞다.
- 그 테세우스가 타고 돌아온 배를(검은 돛을 달고 와서 아들이 죽은 줄만 알고 절망해 절벽에서 몸을 던진 아비의 사연과 그래서 그 앞바다를 에게해라고 이름 붙였다는 이야기까지 얘기하고 싶었지만 그럼 애가 학교에 지각할 테니 참았다) 그리스 사람들이 보존하려고 나무가 썩으면 조금씩 새 나무로 바꿔서 나중엔 원래 배의 조각은 하나도 안 남았대. 그럼 그 배는 원래 배랑 같은 배일까?
- 응. 사람들이 그 배를 기억하고 있잖아.
- 오오... 그러네? 맞아. 사람들이 그걸 뭘로 생각하는지가 중요하겠지.
- 응. (와구와구 먹는다)
- 있잖아. 인간의 세포는 계속 새로 생성되고 파괴되는 걸 반복하는 거 알지?
- 응 알지.
- 그럼 넌 태어났을 때 세포가 지금 하나도 안 남아있을 텐데, 여전히 김xx일까?
- 당연하지. 세포는 다 바뀌었어도 아빠의 유전자는 그대로 있잖아.
- 좋아. 학교 가자.
착한 녀석 같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