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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의 마치

정한아

by 김알옹

쿠팡플레이에서 드라마로 만들어져 유명세를 탄 <안나>의 원작 <친밀한 이방인>을 쓴 정한아 작가님의 신작 소설. 이 작가님의 소설은 처음 읽어본다.


한때 스타 배우였지만 나이가 든 후 모종의 사정 때문에 중년-노년 전문 배우가 되어 다작을 하는 주인공 '이마치'가 알츠하이머가 의심되어 어느 전문 클리닉에서 치료를 받는다. 효과는 있다고 입소문을 탔지만 공식적으로는 인정받지 못한 혁신적인 VR 치료법으로(비싸다) 치료받는 이마치. 이 치료법이란 마치 영화 <인셉션>처럼 의식의 깊은 곳까지 파고 들어가서 기억을 되찾는 것이다. <인셉션>은 꿈의 다층 구조를 차근차근 타고 내려가서 결국 내면의 가장 비밀스러운 잠재의식을 들여다 보는 방식이었지만, 이마치는 좀 더 세련되게 VR 안의 AI의 도움을 받아 의식 안에 있는 큰 아파트로 들어간다. 아파트의 각 층은 연도별로 각 나이대의 이미치가 살고 있다는 설정. 가령 60층 꼭대기엔 현재의 이마치가, 29층엔 29세의 이마치가, 43층엔 43세의 이마치가 살고 있는 것이다.


201702051130062172_d.jpg VR이든 약물이든 알츠하이머 치료제가 어서 개발되면 좋겠다. (출처: Youtube 'Tribemix')


이 작품의 구조를 아주 잘 설명해 주는 한 마디가 책에 그대로 등장한다.


"실제가 아니면 뭐죠?"
"겹겹이 쌓인 페이스트리요."


아파트를 오르내리며 이마치는 자신의 인생을 회상하며 기억을 회복한다. 이마치의 회상을 독자가 함께 들여다보게 되는데, 우여곡절이 참 많은 삶이다. 사연 하나 없는 배우의 삶이 어디 있겠냐만, 아무래도 소설이다 보니 극적인 사연들이 많이 깔린 인생이다.


반전이 꽤나 등장하는데, 정해연 작가님처럼 자극적인 소재로 만들어낸 매콤하고 속쓰린 반전이 아니다. 슴슴하게 덜 자극적이라 소화가 잘 되는 반전이다.






아주 재미있게 읽었다. 인물과 사건으로 이야기의 구조를 얼마나 공들여 설계했는지 알 수 있으며, 감정 과잉이 느껴지지 않아서 좋은 작품이었다. <친절한 이방인>도 읽어봐야겠다.


좋은 문장들이 많이 나와서 읽기 즐거웠는데, 몇 개를 가져와본다.


“부부 사이가 끝나는 건 돈이나 사랑이 아니라, 농담이 마를 때야. 부부끼리만 하는 우스갯소리 말이야. 서로를 조금은 두려워하고, 조금은 동정하고, 조금은 경멸하고…… 그런 마음을 웃기는 얘기로도 내뱉지 않게 되면, 그땐 정말 끝이 나는 거지.”


“누구나 자기가 아는 세상 안에서만 살아가니까. 내가 아는 것, 내가 본 것, 내가 받은 것을 줄 수밖에 없는 거야. 자식에게 그 이상의 것을 주고 싶어도 그게 뭔지 몰라. 아니, 상상도 할 수가 없지. 내 손에 있는 것 말고는 줄 게 없어.”


VR 치료 직후 자해와 자살 충동에 시달리는 경우는 흔했다. 치료가 트라우마를 유발하느냐고 묻는다면, 이마치는 물론 그렇다고 대답할 것이다. 자신에게 유리한 기억, 좋은 기억만 남길 수는 없으며, 무작위로 차오르는 기억을 막을 방법도 없었다. 고통스러운 기억들은 매번 새롭게 아귀를 벌리고 달려들었다. 그렇다고 해도 VR 치료를 중단하는 알츠하이머 환자는 없었다. 자신이 누군지를 잊어버리는 쪽과 자신이 누군지를 아는 쪽. 어느 쪽이나 지옥이라면, 누구나 익숙한 지옥을 선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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