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 피플 존

정이현

by 김알옹

정이현 작가님은 2002년에 등단했다. 가장 유명한 작품 <달콤한 나의 도시>를 언제 읽었더라.. 찾아보니 2006년 작품이다. 아마도 20대 후반 언젠가 읽지 않았을까? 통통 튀는 젊은 여성들이 등장하는 걸로 기억한다.


30대를 지나 40대에 이르러서 작가님의 소설을 별로 접한 적이 없다. 그러다 얼마 전 <사는 사람>을 위픽 시리즈에서 만났고 아주 잘 가다듬어진 문장들이 좋아서 '이래서 베테랑 작가의 소설을 읽는구나'라고 좋아했던 기억이 난다.

<발리에서 생긴 일>같은 SBS 드라마 특유의 분위기가 있었던가. (출처: SBS)


<노 피플 존>에는 2025년에 발표된 작품 세 편, 2018년 한 편, 2020년 두 편, 2021년 두 편, 2023년 한 편 총 아홉 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작품들 사이에 7년가량의 시차가 있지만 마치 모두 올해 쓰인 것처럼 세련된 문장들이 가득 차 있어서 깔끔하게 읽힌다. 책 뒷부분에 수록된 해설에서 평론가는 작가님의 소설을 구역으로 표한한다면 서울시 강남구일 것이라고, 그곳에 축적된 세속성과 음험한 욕망을 압축적으로 스케치하는 데 정이현을 따라올 작가는 드물다고 평한다. 난 작가님의 표현이 깔끔하고, 상류층 등장인물들을 눈앞에서 보는 것처럼 잘 그려내서 파인다이닝 레스토랑이 많은 강남구라고 생각하련다.


그리고 상류층을 바라보는 관찰자의 시선 또한 아주 잘 그려낸다. 첫 수록작인 <실패담 크루>의 몇몇 단락들을 보자.


홍이 대꾸했다.
"와인도 너무 좋겠어요. 그런데 제가 잘은 모르지만, 그런 분들은 하이엔드급만 드시지 않을까요. 혹시 와인에 대해 잘 아는 분 계실까요?"
비싸서 안 된다는 뜻이었다. 넓은 세상으로 나아갈수록 이런 완곡어법을 세련되게 구사하는 사람들의 비율도 느는 것만 같았다. 예의 바르게 돌려 말하면서 정곡 찌르기, 공격적이지 않고 남의 신경 거스르지 않으면서 원하는 바를 관철하기 등의 기술을 가르치는 사교육 업체가 나만 모르는 곳에서 성업 중인지도 몰랐다.


내 기준에서 그들은 명백히 어른이라 할 만한 존재였다. 게다가 그들은 흘러넘치도록 많이 가진 인생이었다. 사회적 자산, 경제적 능력, 문화적 자본 등 모든 것이 국내 최상위에 속했다. 고궁이 내려다보이는 자택 거실에 앉아 샴페인을 홀짝이는 삶, 요나스 구의 작품을 화장실 앞 복도에 걸어놓는 삶, 좋아하는 작가를 만나러 베를린까지 날아갈 수 있는 삶. 그들은 누구나 선망할 만한, 반짝반짝 매끄럽게 빛나는 공간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그런 사람들이 불에 그을은 유리 조각을 삼키는 표정을 지을 때, 마음이 부서지는 것 같은 감정에 휩싸인 적 있다고 고백할 때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밀려난 것은 나뿐임을 알았다. 내가 사라진 자리는 또 어떤 젊은 피로 대체되었을까. 그 순간 나는 깨끗이 승복했다. 내가 졌다. 휴대폰 화면을 향해 선뜻 손끝을 뻗을 수 없어서 당혹스러웠다. 나는 이 밤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실패담 크루>는 변호사, <선의 감정>에서는 의사가 등장한다. (주인공인 의사가 '진상'환자를 대하다 사소한 실수를 저지르며 죄책감에 시달리다가 스스로 합리화하는 과정이 잘 그려져 있다.) <단 하나의 아이>는 개인 플레이 튜터(놀이 가정교사), <사는 사람>은 수학학원 상담실장, <가속 궤도>는 과학학원 원장, <이모에 관하여>는 입주도우미 이모가 등장한다. 이쯤 되면 전문직 중산층 사교육 전문 소설 아닌가.


그러나 작가님의 소설의 백미는 깔끔하게 떨어지는 선을 직접 긋거나 혹은 타인이 그은 선을 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등장인물들이, 직접 그은 선 밖의 사람을 도우려는 인간적인 감정으로 선을 넘거나 혹은 폭력적인 타인이 선을 마구 넘어오는 구조이다. 읽다 보면 '어.. 이러면 안 되는데!'라는 마음이 자주 들게 된다.


추천사를 쓴 정세랑 작가도 이를 언급한다.


정이현은 침범의 순간을 누구보다도 치밀하게 재구성하기 때문인 듯하다. 침범은 항시 일어난다. 일상에 범죄가, 진실에 거짓이, 이해에 오해가, 선의에 악의가, 희망에 회의가 한순간도 멈추지 않고 침범한다.... 작가는 성별과 계층과 세대 사이의 무너지고 끓어오르는 톱니 같은 경계선에 매크로렌즈를 댄다. 한껏 가까이 다가가면서도 초점을 뚜렷이 유지하고 마는 이 특별한 소설들을 읽고 나면 우리가 속한 사회의 진짜 표정이 보인다.


김애란 작가님이 계속해오고 있던 사회 관찰을, 정이현 작가님은 조금 더 좁은 구역(강남에 한정된)에서 진행하는 느낌이다. 그리고 내가 무척 좋아하는 장류진 작가님(최근의 에세이는 제외), 성해나 작가님(그저 빛)의 소설 쓰는 스타일이 정이현 작가님의 그것과 아주 비슷하게 느껴졌다. 좋아하는 스타일의 대가를 만나니 소설 읽기가 다시 즐거워진다.


아래는 수록작 <사는 사람>을 예전에 먼저 읽고 써놓은 내용 요약이다.




<사는 사람>에서 수학 전문학원(유명한 학원인 '생각하는 황소'를 모델로 한 학원으로 보인다)의 상담실장으로 일하는 주인공이 크게 두 가지 일을 겪는다.


1. 주인공은 부동산 임장 모임에서 만난 남자와 코드가 맞아 사귀게 된다. 남자와 주인공은 집을 구매하지 않을 거면서(그만한 돈이 없다) 서울의 1급지 아파트들의 목록을 만들어서 주말마다 부동산을 돌아다니며 그 아파트들을 임장 한다. 성수의 어느 부동산에서 이 커플은 마치 그들이 어떤 의도로 임장을 하는지 파악한 듯한 중개사의 몇 가지 조치 - 구매자의 개인정보 공유, 계약금이 들어있는 통장 잔고 공개 등 - 로 마음이 상하게 된다.


2. 주인공은 항상 학원에서 매뉴얼대로 일한다. 이 학원은 그날 배운 진도로 수업 후 시험을 봐서 점수는 실시간으로 학부모에게 1등과 꼴찌의 이름을 포함해 공개되며, 일정 점수를 몇 차례 못 얻으면 더 이상 다닐 수 없게 된다. (황소가 이런 시스템이라고 들었는데, 우리 아이는 저걸 견딜 수 없을 인물이라 애초부터 보내지 않았다) 어떤 여학생이 학원 시험 점수가 낮으면 집에서 매를 맞는다고 주인공에게 하소연하며 시험 문제만 미리 보여달라고 인스타 DM으로 부탁을 해온다. 주인공은 청소년 학대를 그냥 지나칠 수 없지만 직접 개입할 수는 없기에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 시험지 미리 보여주기. 누군가 길에서 도와달라고 청하면 그를 도우려 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인 것처럼. 하지만 이 일은 주인공의 생각과 다르게 흘러가는데...


두 사건을 겪으며 주인공은 대체 '사는'건 무엇일까 하는 질문에 스스로 답하며 자아를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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