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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순

양귀자

by 김알옹

양귀자 선생님 소설은 마치 시드니 셸던의 소설처럼 딱 통속소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고전의 반열에 오르기엔 뭐가 부족하다고 딱히 꼬집어 말하긴 힘들지만... 내가 대단한 문학평론가나 지각 있는 독자도 아니지만... 그냥 8090년대의 연애 이야기에 불과하지 않나? 우리 부모님 세대의 세태를 이해하는 좋은 자료 정도로 선을 긋고 읽지 않았다.


그런데 올해 내내 온라인/오프라인 서점의 베스트셀러에 <모순>이 올라와 있는 현상을 보고 신기하다는 생각에 책을 빌려왔다. (도서관에서도 예약이 꽉 차있어서 어렵게 빌렸다) 고작 25세밖에 안 된 주인공이 안정감 있는 남자와 가슴을 뛰게 하는 남자 사이에서 누구와 결혼할지 고민하는 사연을 왜 취업/연애/결혼을 포기하는 세대들이 공감해서 2025년의 베스트셀러에 올라와 있는지 잘 모르겠지만, 그래... 요즘 같이 짧은 영상이 대세인 시대에 젊은이들이 뭐라도 활자를 읽는 게 어디냐는 긍정적인 생각만 하기로 했다.


무척 좋은 문장들의 향연이다. 소셜미디어 어딘가 올려놓으면 있어 보이는 표현들이 넘쳐난다. 잘 쓴 소설이지만 통속소설임은 부정할 수 없다. 1998년에 발간된 소설인데 80년대스러운 촌스러운 느낌도 많이 난다. 안진진 씨는 엄마처럼, 이모처럼 되고 싶지 않아서 자신이 주체적인 선택을 하는 것 같지만, 결국 그 선택에 종속된 인생을 살아가지 않을까? 선택이라는 상황이 주어지기 전에 스스로에 대한 고민을 치열하게 하지 않는다면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분명 후회할 것 같다. 현실이냐 사랑이냐는 이분법적인 선택이 인생의 가장 큰 고민인 시대는 이미 지났다.







어릴 때 어머니 따라 은행에서 대기할 일이 종종 있었다. 집에서 신문을 많이 읽어서(스포츠면을 가장 먼저 읽음) 약간 활자 중독 어린이 었던 나는, 은행에서도 옆에 있던 잡지를 손에서 놓지 못했다. 여성중앙, 레이디경향, 우먼센스 등 주부 대상의 잡지는 별천지였다. 일단 첫 페이지를 열면 바로 비너스의 속옷 광고로 포문을 열고, 약 3/4 정도에 ‘주부들의 은밀한 고백’, ‘카마수트라 카운슬링’과 같이 텍스트들의 대공습이 있었다. 이런 걸 보다가 어른들한테 걸리면 안 좋은 일이 생길 거라는 눈치에 황급히 저 페이지들을 넘기다 보면 연재소설들이 등장했다. 양귀자, 박완서 선생님의 이름도 저기에서 처음 접했다.


지금과는 아주 다른 30년 전 은행의 모습 (출처: DVD Prime)


이런 8-90년대 통속소설을 우연히 접하게 되면 그때 그 은행이 생각난다. 버스비를 아끼려고 집까지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시는 어머니의 뒷모습, 다리가 아파서 좀 천천히 가면 안 되냐고 어머니에게 투정 부리던 나, 걷기 지루해서 보폭을 맞춰 지나치던 보도블록의 무늬와 같은 유년시절의 추억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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